▣ 본문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v. 37-38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침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v. 39절-40절]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믿는 사람이 모든 물건을 통용하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v. 41절-47절]
▣ 본문내용 요약
앞선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백성들 가운데 사람들이 마음의 찔림을 통해 자신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질문합니다. 이에 베드로는 가장 먼저 '회개'할 것을 촉구합니다. 회개를 통한 죄사함과 하나님과 공동체 앞에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고 고백하는 침례예식을 통해 죄사함을 받으라고 권면합니다. 그리하여 이날 약 3천명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회개를 통해 회심한 성도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기도에 전념하고 소유를 팔아 나누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한 모습을 통해 많은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게 되었고, 하나님은 이를 통해 구원의 역사, 확장을 이루어 가십니다.
▣ 본문주해
37~38절 회개의 촉구
'찔리다'(37절)로 번역된 κατανύσσμαι(카타뉘쏘마이)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거나 잘못을 깨닫는 것보다 더 강한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70인역의 시편 109편 16절에서 이 단어가 '마음이 상한 자'라는 의미로 쓰였음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는데, 이는 베드로의 설교가 청중들의 마음을 상하게 했고, 일종의 심리적 공황 상태로 몰아넣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청중들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눅 3:10).
39절 확장된 약속
'이 약속'(39절)은 사도행전의 주요한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용서와 성령의 은혜가 '너희와 너희 자녀'뿐 아니라 '모든 먼 데 사람'에게 까지 주어집니다. '멀다'에 해당하는 μακράν(마크란)이 시간적인 의미라면 '모든 먼 데 사람'은 '먼 미래의 후손들'이 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이것이 공간적인 의미라면, 먼 나라에 흩어져 사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이나 이방인들을 가리키게 됩니다. 누가의 선교적 지평을 염두에 둔다면 후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40절 구원을 받으라
'확증하다'라는 뜻의 διαμαρτύρειν(디아마르튀레인)과 '권하다'라는 뜻의 παρακαλειν(파라칼레인)은 복음 전도를 묘사할 때 종종 사용됩니다. 전자는 역사적 사실을 제시하는 활동, 후자는 설득하는 활동을 가리킵니다.
"구원을 받으라"로 번역된 문장은 수동태로 사용되었는데, 구원은 하나님의 고유의 행동이며, 우리는 그의 행위로 인해 '구원될'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 패역한 세대'는 일차적으로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던 예루살렘 군중을 가리키지만, 구약과 신약의 용례를 볼 때 하나님의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 인간 사회의 전반을 아우르는 의미입니다.
41절 3천 명이 믿고 침례를 받음
말씀을 '받는다'는 것은 받아들이고 수긍하고 믿는 것 까지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당시 회개를 촉구하던 베드로의 설교(말씀)을 통해 3천 명의 사람들이 말씀에 대한 반응으로 침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오해하는 한 가지는 구원의 증거, 구원에 대한 반응으로 침례나 세례를 받는 것이지, 침례를 받아야만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즉, 침례가 구원에 이르는 필수요소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침례가 구원에 이르는 어떠한 단계적인 부분이라면 예수님이 침례받으시는 사건에 대해 우리는 다시 한 번 고찰해야 할 것입니다.
42절 오순절 공동체의 특징
오순절 공동체는 네 가지 활동의 모습으로 특징지어집니다. 사도들의 가르침, κοινωνία(코이노니아), 떡을 뗌 그리고 기도입니다.
첫 번째 특징인 '사도들'은 1:12~26에 서술된 '열둘'을 가리킵니다. 사도적 '가르침'을 설교와 엄밀하게 구분하기 어렵고 또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두 번째 특징인 κοινωνία(코이노니아)는 번역하기 어려운 단어입니다. 대개 '교제하다', '서로 사귀다', '친교를 나누다'등으로 번역되었는데, 서로 웃으며 인사하고 친절한 말투로 대화를 나누는 정도라고 하기에는 너무 가볍고 피상적입니다. 이어지는 상황과 단어의 어원을 생각해보면 감정적 교류 이상의 실질적 나눔을 의미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칼빈이 그의 주석에서 이 단어를 '서로 사귐, 구제 그리고 형제 사랑의 다른 의무'라고 해설한 것도 그러한 맥락이었을 것입니다.
세 번째 특징인 '떡을 뗌'도 모호한 면이 있습니다. 이것이 성만찬인가 아니면 애찬(공동식사)인가에 대한 논쟁이 있기 때문입니다. 20장 11절과 누가복음 24장 30절에서 같은 단어가 성만찬을 암시하기 때문에 여기에서도 성만찬을 동반한 공동식사로 보는 것이 옳은 해석인 것 같습니다.
네 번째 특징은 '기도(들)'인데, 이 문장에서 복수형으로 쓰였기 때문에 여러 종류의 기도가 드려졌음을 의미합니다. 그중에는 유대인들이 예배 때 드렸던 '쉐마', '아미다', '쉐모네 에스레', 그리고 시편들과 주기도문, 다른 기독교적 기도들도 해당되었을 것입니다.
43절 사도들을 통한 기사와 표적
여기에 언급된 '두려움'은 경외심보다는 더 강한 공포심을 나타냅니다. 사람들이 42절에 묘사된 공동체에 모습을 보고 두려워하지는 않았을 것 입니다. 그렇다면 하반절의 '기사와 표적'이 두려움의 이유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공동번역 성경은 다음과 같이 옮겼습니다. "사도들이 계속해서 놀라운 일과 기적을 많이 나타내 보이자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44~45절 하나가 된 공동체
'믿는 사람', 즉 신자는 교회 구성원들을 지칭하는 최초의 용어입니다. '성도'라는 용어도 나오지만, 사도행전에서 더 자주 쓰인 단어는 '신자'입니다.
'모든 물건'으로 번역된 απαντα(하판타)를 물건으로 한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 '통용하다'보다는 '공동으로 소유하다'가 원문의 뜻에 더 가깝습니다.
45절은 구제를 개인의 선택에 맡겨 두지 않고 신앙 공동체 차원에서 삶의 원리로 실천했음을 의미합니다.
46~47절 날마다 모여 하나님을 찬미함
공동체의 모습이 다시 묘사되는데, 42~43절의 묘사와 비슷하면서도 다릅니다. '날마다 성전에 모였다'는 것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매일 열리는 기도 시간에 참석했음을 의미합니다.
'집에서'로 번역된 구문은 '집집마다 돌아가면서(새번역)' 또는 '이 집 저 집에서(공동번역)'라고 옮겨야 더 정확합니다. 여기에는 '떡을 뗌'과 '음식을 함께 먹음'이 동시에 언급됩니다. 둘 다 특정 의미를 한정하는 전문 용어는 아닙니다. 당시 교회 공동체에서 성만찬과 공동식사가 엄격히 구분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47절 상반절은 번역하기가 까다롭습니다. 개역개정은 "하나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새번역은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호감을 샀다"라고 번역했습니다.
κάρισ(카리스)는 일반적으로 '은혜', '호의'를 뜻하지만 이 구절과 같이 동사 εχειν(에케인)과 결함하면 '감사하다'라는 뜻이 됩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했고 온 백성 앞에서 (하나님께) 감사했다고 옮길 수 있습니다.
▣ 본문의 메시지
성령강림과 베드로가 선포한 말씀을 듣고 청중은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질문합니다. 그 물음에 대한 답은 명확합니다. 먼저 회개하라!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주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죄를 지적받았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회개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회개와 함께, 혹은 회개하고 난 뒤 이어지는 의식이 '침례'였습니다. 회개와 침례를 순차적 단계로 구분지을 수는 없습니다. 단, 회개를 통한 반응으로 침례를 받게 되는 것이지 침례를 받았다고 회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침례는 "내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따르겠습니다'라는 의식으로 곧 '기독교인이 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고백과 침례의식을 통해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되는 데 그것이 성령의 내주를 의미하는지, 성령의 은사를 의미하는 것인지는 오랜 논쟁이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회개-침례-성령받음'의 과정을 베드로는 '약속(επαγγελια,에팡겔리아)'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에서 약속을 '복'이나 '은총' 혹은 '구원'으로 이해해도 될 것입니다. 이 약속을 하나님께서는 유대인과 이방인들 모두에게 주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모든 민족과 열방을 구원하시기 위해 일하고 계셨고 지금도 역사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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