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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Story】/[생명의 삶] 에스겔ㅣ2025년

[생명의 삶] 에스겔 2장 1절-10절 _ 2025. 7. 20(주일)

by LogosLab Steward 2025. 7. 20.

❖ 이 자료는 개인적인 말씀 묵상과 연구를 바탕으로 [목회자의 설교 준비][성경을 더욱 깊이 알고자 하는 ], 그리고 [말씀묵상에 도움이 필요한 성도]를 돕기 위해 제작되었습니다. 본 자료의 모든 저작권은 작성자인 LogosLab Steward에게 있으며, 자유롭게 사용 및 참고하시되 출처를 밝혀주시고, [무단 복제 배포]를 합니다. 이 자료가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풍성하게 경험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 본문

1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 발로 일어서라 내가 네게 말하리라 하시며 
2 그가 내게 말씀하실 때에 그 영이 내게 임하사 나를 일으켜 내 발로 세우시기로 내가 그 말씀하시는 자의 소리를 들으니
3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손 곧 패역한 백성, 나를 배반하는 자에게 보내노라 그들과 그 조상들이 내게 범죄하여 오늘까지 이르렀나니 
4 이 자손은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굳은 자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노니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5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 가운데에 선지자가 있음을 알지니라 
6 인자야 너는 비록 가시와 찔레와 함께 있으며 전갈 가운데에 거주할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말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도 그 말을 두려워하지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하지 말지어다 
7 그들은 심히 패역한 자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지어다 
8 너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듣고 그 패역한 족속 같이 패역하지 말고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하시기로 
9 내가 보니 보라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보라 그 안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 
10 그가 그것을 내 앞에 펴시니 그 안팎에 글이 있는데 그 위에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 

📖 말씀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말하라"

 

서론 | 두려움과 회피의 시대에, 말씀을 향한 한 걸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다양한 목소리가 넘쳐나는 시대입니다. 누구나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플랫폼이 있고,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 공간도 많습니다. 그러나 정작 ‘진리’를 말하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내가 믿는 바를 고백하는 순간,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불쾌함이 되고, 불편이 되며, 심지어 ‘혐오’라는 이름으로 낙인찍히기도 합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 이 간단한 고백조차도 조심스럽게 해야 하는 시대. 진리이기에 마땅히 말해야 할 것을 말하는 것이 두려운 시대 속에서 우리는 점점 입을 닫고, 조용히 믿음을 ‘개인적인 신념’으로만 간직하려 합니다. 진리를 믿지만, 진리를 말하지 않는 사람들이 되어가고 있는 현실 앞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붙잡아야 할까요?

 

저 역시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로서 고민한 적이 많습니다. ‘이 말씀을 전하면 부담스러워하지 않을까? 상처받지는 않을까? 혹시 관계에 금이 가지는 않을까?’ 이런 생각은 어느새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들의 반응을 먼저 살피게 만들고, 결국 말씀의 능력이 아닌 내 감정과 인간적인 판단이 앞서도록 만듭니다.

 

바로 그때 제 마음을 붙들었던 말씀이 에스겔 2장 7절이었습니다.

 

“그들은 심히 패역한 자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지어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반응보다 ‘말씀의 전달’을, 결과보다 ‘순종의 충실함’을 강조하셨습니다. “듣든지 아니 듣든지 말하라.” 이 단순한 명령은 에스겔의 사역 전반을 관통하는 방향이었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신앙의 나침반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명령 앞에서 우리는 질문하게 됩니다.

 

‘어떻게 그 말씀을 감당할 수 있을까?’

‘어떻게 용기를 낼 수 있을까?’

‘그들은 듣지 않는데, 나는 계속 말해야 하는가?’

 

이 질문은 단지 선지자 에스겔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도 던져진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단지 한 사람만이 아닌, 모든 성도를 복음의 증인으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침묵이 신중함으로 여겨지는 이 시대에,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를 말씀의 자리로 다시 불러내십니다.

 

본문 에스겔 2장 1–10절은 선지자 에스겔이 그 부르심 앞에서 어떤 마음과 자세로 말씀을 듣고, 또 그 말씀을 어떻게 감당해 가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두려움 가운데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일으켜 세우시며, 말씀을 먹이시고, 사명을 주십니다.

 

그리고 지금도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인자야, 네 발로 일어서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내 말을 먹고 전하라.”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말하라.”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들은 자는 결국 전하는 자리로 부르심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이 질문을 따라 우리는 본문 속 에스겔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을 맡기실 때 어떤 과정을 통해 우리를 준비시키시는지를 살펴보려 합니다. 지금 그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향해 동일한 음성으로 말씀하십니다.

 

 

본론 ㅣ 듣고, 먹고, 말하라!

 

1. 부르심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데서 시작합니다.

 

에스겔서 2장은 한 사람의 선지자가 어떻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일어서게 되는지를 아주 깊이 있게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에스겔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자야 네 발로 일어서라 내가 네게 말하리라” (1절)

 

그리고 곧이어 2절에서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그가 내게 말씀하실 때에 그 영이 내게 임하사 나를 일으켜 내 발로 세우시기로 내가 그 말씀하시는 자의 소리를 들으니”

 

이 짧은 두 절 속에는 선지자의 사명을 준비하는 데 있어서 꼭 필요한 세 가지 핵심 원리가 담겨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음성에 대한 경청, 하나님의 영의 임재, 그리고 그에 따른 영적 일어섬입니다.

 

먼저, 하나님은 에스겔을 ‘인자야’라고 부르십니다. 이는 단순한 호칭이 아닙니다. 에스겔서 전체에서 90회 이상 등장하는 이 표현은 에스겔이 초능력을 가진 예언자가 아니라, 연약하고 유한한 인간이라는 정체성을 항상 기억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그 연약함을 아시면서도 그를 부르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명을 주실 때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위에 그 사명을 세우신다는 분명한 선언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하나님은 “일어서라”고 명령하시지만, 정작 에스겔이 실제로 일어선 것은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임했을 때였습니다. 이 장면은 우리가 흔히 오해하는 ‘결단’의 개념을 바로잡아줍니다. 어떤 때 우리는 “하겠습니다, 순종하겠습니다”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지 않으면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인간의 결심은 결코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지 못합니다. 사명의 시작은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입니다.

 

마지막으로 에스겔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순서입니다.

‘일어섬, 성령의 임재, 말씀을 들음’

이 순서는 단순한 사건의 나열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먼저 하나님 앞에 엎드린 자를 성령께서 일으키시고, 그 일어난 자에게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그러므로 말씀은 단지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영혼으로 준비된 자만이 듣는 것입니다. 말씀을 제대로 듣기 위해서는 먼저 엎드림이 있어야 하고, 그 엎드림 위에 성령의 임재가 임할 때 비로소 우리는 들을 수 있는 자리로 나아가게 됩니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이 종종 빠지는 함정이 있습니다. 듣기보다 말하기를 더 빨리 하려는 태도입니다. 말씀을 전하고 싶은 열정은 크지만, 그 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적이 있는가? 하나님의 마음이 아닌 나의 열정만으로 앞서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듣지 않은 자가 말하면 말은 넘치지만 생명은 없습니다. 선포는 있지만 권위는 없고, 활동은 있지만 능력은 없습니다. 말씀은 듣는 자만이 말할 수 있는 특권입니다.

 

에스겔이 사명을 받기 전 경험한 세 가지는 단순한 개인적 체험이 아닙니다. 바로 엎드림, 일어섬, 듣기. 이 세 가지는 모든 복음의 증인이 반드시 거쳐야 할 사명의 여정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진리는 외치는 것 이전에 먼저 듣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먼저 일으키지 않으면, 나는 아무도 일으킬 수 없습니다. 먼저 하나님 앞에 엎드리십시오. 그곳에서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을 일으키실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음성을 듣는 자로서, 세상 앞에 말씀을 선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라기는 날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리에 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2. 말씀은 반드시 먹은 자만이 전할 수 있습니다.

 

에스겔 2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굉장히 인상적인 명령을 내리십니다.

너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듣고 그 패역한 족속 같이 패역하지 말고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8절)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말씀을 ‘먹으라’고 하십니다. 이 명령은 단순히 문자적이거나 환상적인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먹는다’는 것은 곧 말씀을 자기 안에 받아들여 소화하고, 자신의 일부로 만들어 살아내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자주 등장하는 매우 중요한 상징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받으실 때,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유혹 앞에 이렇게 응답하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마태복음 4:4)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구절은 신명기 8장 3절을 인용한 것으로, ‘말씀을 먹는다는 것’이야말로 생명의 길이라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말씀은 그냥 듣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양식처럼 ‘먹고 살아야 할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에스겔이 먹은 두루마리에는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가득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은 그저 달콤하거나 위로가 되는 말이 아니라, 때로는 고통스럽고 무거운 심판의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겔은 그 말씀을 ‘그대로 먹습니다.’ 입에 쓴 말씀이든, 마음에 무거운 말씀이든, 말씀 그대로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자만이 그 말씀을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너무도 쉽게 말씀을 ‘전하려’ 합니다. 그러나 정작 그 말씀을 ‘먹어본 적은 있는가?’ 말씀을 살아낸 경험 없이, 사람 앞에 선포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 우리는 자주 잊곤 합니다.

 

복음은 강의실에서 배운 지식이 아니라, 삶에서 체험한 진리입니다. 아무리 탁월한 설명이라도, 살아낸 자의 한 마디를 이길 수는 없습니다. 말씀을 먹은 자는, 말보다 삶으로 증명합니다. 그는 설득하려 하지 않습니다. 진리가 자기 안에서 ‘진짜’가 되었기 때문에, 그의 삶 자체가 하나의 메시지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패역한 시대 한복판에서, 말씀을 전하기 전에, 먼저 내 말을 먹어라.”

 

오늘 우리가 회복해야 할 신앙의 태도는 말씀을 더 많이 ‘들으려는’ 열심이 아니라, 그 말씀을 ‘내 안에 살아있게 하는’ 진지한 삶입니다. 말씀을 먹은 자는 그 말씀을 통해 사고방식이 바뀌고, 태도가 바뀌며, 말과 선택과 가치관이 바뀝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나를 먼저 찌르고, 나를 먼저 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말씀을 ‘먹은 자’만이 진정한 권위를 가지고 말씀을 전할 수 있습니다. 말씀은, 먹은 자만이 전할 수 있습니다. 이 진리 앞에서, 우리는 가볍게 설 수 없습니다. 우리가 먼저 그 말씀을 삼키고 살아낼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3. 사명은 반응보다 충성에 기준을 둡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주신 사명의 자리에는 미리 경고된 현실이 있었습니다. 에스겔이 전할 대상은 “패역한 족속”이었고, 그들은 “듣지 않을 수 있는 자들”이며,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굳은 자들”이었습니다. 게다가 에스겔은 “가시와 찔레 가운데”, “전갈 사이에 거주하는 자”처럼 살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쯤 되면 누구든 질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듣지 않을 사람들에게 왜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까?”

“어차피 반응이 없을 것을 아시면서도 왜 사명을 주십니까?”

 

그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지어다” (7절)

 

이 말씀은 에스겔의 사역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기준입니다.

사명은 ‘결과’가 아니라, ‘충성’에 기준을 둡니다.

 

오늘날도 우리는 복음을 전하다 보면 수없이 이 벽에 부딪힙니다. 듣지 않는 가족, 무관심한 직장 동료, 냉소적인 세상,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말씀을 꺼냈다는 이유로 거리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흔히 이렇게 속삭입니다.

“말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을까?”

“듣지도 않을 텐데, 굳이 말해야 하나?”

 

하지만 이때 우리는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주신 명령을 기억해야 합니다.

“듣든지 아니 듣든지, 말하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공적인 결과를 맡기신 것이 아니라, 충실한 순종을 맡기셨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모두가 변화되지는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변화될 수 있는 기회조차 사라집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이것입니다. 말씀을 거절하는 사람보다, 말씀 전하기를 포기한 사역자가 더 위험합니다. 에스겔은 실패가 예고된 무대에 올랐습니다. 말씀을 전할수록 외면당했고, 말씀을 지킬수록 고립되었으며, 말씀을 따를수록 고통스러운 길을 걸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은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며, 그들의 말을 두려워하지 말라.” (6, 7절)

 

이것은 단순한 감정적인 위로가 아니라, 사명의 기준은 사람의 반응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충성임을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에스겔은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사람의 표정을 읽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명자의 시선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종종 복음을 전할 때, 열매가 있을 사람을 먼저 찾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결과를 따지지 않으시고, 그 자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이냐 아니냐를 먼저 물으십니다.

 

오늘날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때때로 돌밭에 씨를 뿌리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말은 헛되이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이사야 55:11)

 

말씀은 반응에 따라 흔들리지 않습니다. 말씀은 충성된 이들을 통해 선포되고, 증거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결과 중심의 사역자’로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충성된 종’으로 부르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전한 말씀이 당장 어떤 반응을 불러일으키지 않더라도, 그 말씀은 이미 하나님의 손에 들려 쓰임받고 있습니다. 그러니 포기하지 마십시오. 반응 없는 현실 앞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지어다.”

 

오늘 이 부르심 앞에 다시 서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충성된 사명자로 서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결론 ㅣ 말씀이 거절당해도, 진리는 결코 실패하지 않습니다.

 

에스겔 2장은 우리에게 사명자의 현실이 얼마나 험난한지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패역한 족속’에게 보내십니다. 그가 서야 할 자리는 ‘가시와 찔레’ 사이요, ‘전갈 가운데’입니다. 그곳은 따뜻한 환영이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무관심과 냉소, 때로는 적대와 고통이 기다리는 자리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질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왜 굳이 이런 곳에 사명을 주십니까?”

“왜 듣지도 않을 사람에게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그 어떤 결과도 약속하지 않으십니다.

“네 말을 들을 것이다”,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라는 말 대신, 단 하나의 명령만을 주십니다.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지어다.” (7절)

 

이 말씀은 부르심을 받은 우리의 사명의 본질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정의합니다. 사명은 성공을 기준으로 하지 않고, 충성을 기준으로 합니다. 우리는 종종 사역의 열매로 평가받고 싶어합니다. 많은 이들이 변화되길 바라고, 내 말 한마디에 누군가 돌아오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열매보다, 그 자리에서 끝까지 ‘말씀에 서 있었는가’를 보십니다.

 

세상 가운데 말씀이 거절당할 수 있습니다. 복음이 비웃음을 당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말씀이 무력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은 그 자체로 살아 있고, 능력이 있으며,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진리입니다. 진리는 사람들이 받아들여야만 진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거절당해도 진리이고, 묵살당해도 살아 있으며, 외면당해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쩌면 오늘 우리도 에스겔처럼 전갈 같은 시선들 속에서 복음을 전해야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말씀을 전하는 우리의 기준은 언제나 동일해야 합니다. ‘사람의 반응’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말씀을 말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이 시대에, 우리는 더욱 분명하게, 더욱 충실하게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다시 한번 기억합시다.  하나님은 지금도 누군가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이렇게 부르고 계십니다.

 

“인자야, 네 발로 일어서라.”

“두려워하지 말고 내 말을 먹고, 전하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말하라.”

 

이 부르심 앞에서 어떤 자세와 태도로 서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먼저 들은 자로, 그 말씀을 먼저 삼킨 자로,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로, 우리는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말씀이 거절당해도 괜찮습니다. 진리는 결코 실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를 끝까지 붙들고 살아낸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절대로 실패한 인생이 아닙니다. 오늘도 그 자리에 충성되게 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에스겔 2장 1절-10절 본문 연구 및 주석]

📖 본문 배경

 

❖ 개요

 

에스겔 2장은 에스겔 선지자에게 주어진 본격적인 소명의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선지자’로 부르시는 장면이 담겨 있습니다. 1장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던 에스겔은 이제 그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인 사명을 받게 됩니다. 이 장은 에스겔의 사역의 출발점이며, 동시에 선지자로서 감당해야 할 사명의 본질과 무게를 드러냅니다.

 

본문은 크게 세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2절은 에스겔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일어서고, 그 순간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임하는 장면입니다. 이는 단지 육체적인 동작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준비가 되는 영적인 각성을 의미합니다.

3–7절은 에스겔이 부름을 받은 대상인 이스라엘 백성의 상태와, 그 가운데에서 외쳐야 할 하나님의 말씀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반복적으로 그들을 “패역한 족속”이라 부르며, 듣든지 아니 듣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고 명하십니다.

8–10절은 에스겔이 하나님의 두루마리 책을 먹는 환상을 통해, 자신이 앞으로 전해야 할 말씀이 ‘애가와 애곡과 재앙’임을 직시하게 되는 장면입니다.

 

전체적으로 이 본문은 ‘선지자의 부르심과 위임’, 그리고 그 사명의 본질이 무엇인지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때로 거절당하고 고난받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만 하는 부르심’ 안에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깊이 일깨워 줍니다.


❖ 역사적 배경

 

에스겔 2장은 여전히 기원전 593년경, 에스겔이 바벨론 포로지인 그발 강가에서 하나님의 환상을 본 직후의 상황에 해당합니다. 에스겔은 여호야긴 왕과 함께 바벨론에 끌려온 1만 명의 포로 중 하나였고, 이들은 예루살렘이 아직 완전히 멸망하기 전 단계의 포로들로,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심판의 실상을 깨닫지 못한 채 막연한 회복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 유다 백성은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면서도 여전히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 앞에서 깊이 타락한 상태였습니다. 그들은 우상 숭배, 불의한 재판, 가난한 자에 대한 착취, 제사장들의 부패 등 수많은 죄악을 행하며, 하나님의 경고에도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패역한 족속’에게 에스겔을 보내십니다. 이들은 과거 선지자들의 경고도 무시했던 자들이었고, 조상 때부터 이어진 불순종의 역사를 반복하고 있던 백성이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에스겔은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하라”는 부르심을 받게 됩니다. 이 부르심은 회개의 가능성을 전제하면서도, 그들의 완고함과 심판을 동시에 염두에 둔 것이었습니다.


❖ 문화적 배경

 

고대 근동 문화에서 ‘왕의 전령’ 혹은 ‘사자(使者)’의 역할은 단순한 전달자가 아니라, 왕의 권위를 대변하는 존재였습니다. 특히 바벨론이나 앗수르 시대의 문헌을 보면, 왕의 말을 거역하는 것은 곧 왕 자신을 거역하는 것이며, 전령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왕에 대한 모독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인자야”라고 부르며, “내가 너를 보낸다”고 선언하시는 표현은 에스겔을 단순한 예언자가 아닌 ‘하나님의 공식적인 전령’으로 세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곧 에스겔이 전하는 말이 ‘하나님의 권위를 가진 말씀’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한 본문에 등장하는 ‘두루마리’는 당시 문서의 일반적인 형태로, 중요한 법령이나 계약, 예언의 말씀들이 이 형태로 기록되어 전달되었습니다. 두루마리를 먹는 장면은 문자 그대로의 행위가 아니라, 그 말씀을 자신의 존재 안에 받아들이고 동화하는 예언자의 상징적 행위였습니다. 이는 고대 근동 문화에서도 ‘지혜’를 먹는 상징과 연결되며, 말씀의 내면화를 통해 사명을 감당하는 깊은 의미를 전달합니다.


❖ 신학적 배경

 

신학적으로 에스겔 2장은 ‘하나님의 부르심의 본질’과 ‘선지자 사명의 특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본문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패역한 족속’에게 보내십니다. 이는 선지자 사역이 대개 ‘환영받지 못하는 자리’에 세워진다는 진리를 전제합니다. 선지자는 대중의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해야 하는 자입니다.

 

본문에서 반복되는 표현인 “패역한 족속”, “듣든지 아니 듣든지”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인간의 완고함을 드러냅니다. 동시에 이 부르심이 ‘결과’에 있지 않고 ‘충실함’에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선지자는 사람들이 듣지 않아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말씀을 전해야 하며, 그 존재 자체로 하나님이 여전히 말씀하시는 분임을 증거해야 합니다(2:5 참조).

 

또한 에스겔이 말씀을 듣고 먹는 장면은, 선지자 사역이 단순히 외부적인 소명만이 아닌, 내면 깊이 하나님의 말씀을 품고 살아야 하는 사명임을 보여줍니다. 말씀은 단지 전하는 도구가 아니라, 그 사람 자체를 빚어내고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입니다.

 

에스겔 2장은 그 어떤 외적인 성공보다 ‘하나님의 영이 임한 자’, ‘말씀을 내면화한 자’, ‘순종하는 자’가 진정한 하나님의 사명자임을 선포합니다. 이는 오늘날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름 받은 자들에게도 여전히 적용되는 불변의 원리입니다.


📖 본문 요약

❖ 단락 구분

 

1–2절 | ‘인자야, 네 발로 일어서라’ – 하나님의 명령과 성령의 임재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인자야”라고 부르시며, 그에게 “네 발로 일어서라”고 명령하십니다. 이때 하나님의 영이 에스겔에게 임하고, 그는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 일어섭니다. 이는 선지자의 부르심이 인간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시작됨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에스겔은 곧이어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시작합니다.

 

3–5절 | 패역한 백성에게 보내심을 받은 에스겔

하나님은 에스겔을 “패역한 족속”, “나를 배반한 자들”인 이스라엘 자손에게 보내신다고 하십니다. 이들은 조상들부터 지금까지 하나님께 범죄해 온 자들이며,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굳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말씀을 듣든지 아니 듣든지 상관없이, 선지자가 그들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라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가 동시에 나타나는 경고입니다.

 

6–7절 | 두려워하지 말고 말씀을 전하라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반복적으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앞으로 가시와 찔레, 전갈 같은 존재들 사이에서 살아야 하지만, 그들의 말이나 얼굴을 무서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백성이 심히 패역하더라도, 선지자는 말씀을 전하는 사명을 계속 감당해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8절 |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위한 준비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너는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듣고, 그들처럼 패역하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그리고 “네 입을 벌려 내가 주는 것을 먹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이는 단순한 명령이 아니라, 에스겔이 앞으로 전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자신의 내면에 깊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9–10절 | 두루마리 책과 그 안에 담긴 메시지

에스겔 앞에 한 손이 나타나고, 그 손에는 두루마리 책이 들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책을 에스겔 앞에 펴 보이시는데, 그 안팎에는 글이 가득하고, 그 내용은 ‘애가와 애곡과 재앙’으로 가득합니다. 이는 에스겔이 전하게 될 하나님의 말씀이 기쁨이나 회복보다는 심판과 슬픔의 메시지가 중심이 될 것임을 예고합니다.


❖ 내용 요약

 

에스겔 2장은 선지자로서의 에스겔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부르심을 받는 순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엎드려 있었고, 하나님은 그에게 “일어서라” 하심으로 사명의 첫 발걸음을 시작하게 하십니다. 이때 하나님의 영이 에스겔에게 임하여 그를 일으키시는데, 이는 선지자의 사명이 인간적인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말씀에 의해 시작되고 유지됨을 명확히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패역한 족속”, 곧 오랫동안 하나님의 뜻을 거역해 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내십니다. 그들은 완고하고, 얼굴이 뻔뻔하며,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이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런 백성에게 말씀을 계속해서 들려주시고, 선지자가 있다는 사실 자체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게 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반복적으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가 마주할 백성들은 전갈처럼 위험하고, 가시처럼 거슬리는 존재들이겠지만, 하나님의 사명을 맡은 자는 환경과 대중의 반응에 흔들리지 않아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선지자는 듣든지 아니 듣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선포해야 합니다.

 

본문 후반부에서는 에스겔에게 두루마리 책이 주어지는데, 이는 곧 그가 앞으로 전하게 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책의 내용은 ‘애가와 애곡과 재앙’으로, 당시 이스라엘이 처한 영적 상태와 닥쳐올 심판을 상징합니다. 에스겔이 그 책을 먹게 된다는 다음 장면(3:1~)과 연결하여 볼 때, 이 말씀은 그저 전해지는 정보가 아니라, 선지자의 삶을 통해 구현되어야 할 진리임을 말해 줍니다.

 

결국 이 본문은 에스겔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유, 그 사명의 내용과 성격, 그리고 사명자에게 요구되는 영적 태도를 깊이 있게 보여주는 서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때로 쓰고 무겁지만, 그 말씀을 먹고 살아가는 자만이 이 땅에 생명의 소망을 전할 수 있음을, 에스겔은 자기 소명 속에서 깨닫게 됩니다.


📖 붙잡는 말씀

6 인자야 너는 비록 가시와 찔레와 함께 있으며 전갈 가운데에 거주할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말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도 그 말을 두려워하지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하지 말지어다 

 

에스겔 2장 6절은 하나님께서 선지자 에스겔에게 주신 사명의 자리와 그 자리에서의 자세를 명확히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에스겔은 이제부터 “가시와 찔레와 전갈 가운데” 살아가야 하는 삶을 시작합니다. 이는 단지 물리적인 고난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굳고 말씀을 거부하며, 조롱하고 저항하는 백성들 속에서 살아가야 할 선지자의 현실을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세 번이나 반복하여 강조하십니다. 이는 단순한 용기를 북돋는 말씀이 아니라, 선지자의 사명은 결코 사람들의 반응이나 눈빛에 따라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하나님의 기준을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패역한 족속’이라는 표현이 반복될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는 그 패역함보다 더 크신 하나님의 뜻에 집중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주십니다.

 

오늘 이 말씀은 사역자뿐 아니라, 복음 안에서 진리를 따르며 살아가고자 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지는 음성입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가시와 찔레’ 같은 말과 시선 속에서 신앙을 지켜야 할 때가 많습니다. 진리를 말할 때 조롱당하고, 선을 행할 때 오해받으며, 믿음을 고백할 때 외면당하는 세상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똑같이 말씀하십니다.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 말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 얼굴을 무서워하지 말라.”

 

이 말씀은 제게도 특별한 의미로 다가옵니다. 목회자로서, 때로는 복음을 선포하는 일조차 벽에 부딪힐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의 반응이 냉담할 때, 내가 전하는 말씀이 외면당할 때, 낙심과 두려움이 함께 찾아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그런 저에게 다시 힘을 줍니다.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하라.” 이 말씀 하나면 충분합니다. 하나님은 사역의 ‘결과’가 아니라 ‘충실함’을 보십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복음을 붙들고 살아가는 소명자입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세상이라는 들판 한가운데에서 우리는 여전히 ‘말씀을 먹고 사는 자’로 부름받았습니다. 그곳이 아무리 가시밭일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시선을 그 땅의 돌기보다도 ‘하늘의 명령’에 고정시키길 원하십니다.

 

오늘, 나는 누구의 얼굴을 무서워하며 말하지 못하고 있었는가?

어떤 말들에 눌려 복음의 삶을 잠시 멈추고 있었는가?

다시 이 말씀을 붙듭니다.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 말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 얼굴을 무서워하지 말라.”


📖 단어 연구

❖ 인자 (בֶּן־אָדָם / 벤 아담)

 

✦ 뜻과 의미

히브리어 ‘בֶּן־אָדָם’(벤 아담)은 직역하면 ‘사람의 아들’ 또는 ‘인간의 자손’을 의미합니다. ‘벤’은 ‘아들’을 뜻하고, ‘아담’은 ‘사람’ 혹은 ‘인류’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본래 인간의 유한성과 나약함, 그리고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존재성을 드러내는 겸손한 칭호입니다.

 

✦ 본문에서의 의미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처음 부르실 때부터 반복적으로 “인자야”라고 부르십니다. 이 표현은 에스겔서 전체에서 무려 90회 이상 등장하며, 에스겔에게 주어진 독특한 정체성을 형성합니다. 본문 1절에서도 하나님은 “인자야, 네 발로 일어서라”고 말씀하시며, 에스겔이 하나님의 영광 앞에 철저히 인간으로서 부름받았음을 보여줍니다. 즉, 이 호칭은 에스겔의 사명을 높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연약함을 자각하게 하여, 모든 능력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강조하는 장치입니다.

 

✦ 신학적 의미

신학적으로 ‘인자’는 인간의 연약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도구로서 쓰임받는 존재의 이중적 의미를 가집니다. 다니엘서와 신약(특히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리킬 때 사용하신 표현)에서 ‘인자’는 종말적 구속자 또는 메시아의 칭호로 확장되지만, 에스겔서에서의 ‘인자’는 인간으로서의 본질을 상기시키는 겸손의 언어입니다. 이는 선지자가 결코 하나님의 자리에 서는 자가 아니라, 오직 그분의 음성을 담는 통로임을 분명히 하는 신학적 표현입니다.


❖ 패역(한) (מֶרִי / 메리)

 

✦ 뜻과 의미

히브리어 ‘מֶרִי’(메리)는 ‘반역’, ‘불순종’, ‘고의적인 반항’을 의미하는 단어로, 단순한 실수나 연약함이 아니라 적극적인 거부와 반항의 태도를 나타냅니다. 이는 율법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그것을 어기는 태도를 강조할 때 사용됩니다.

 

✦ 본문에서의 의미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패역한 족속”이라고 반복적으로 표현하며, 이 단어는 그들의 상태가 단순한 무지나 방황이 아니라, 하나님을 인식하고 있음에도 고의적으로 반항하고 불순종하는 상태임을 강조합니다(2:3, 5, 6, 7, 8). 하나님의 명령과 말씀을 지속적으로 거부해 온 역사적 죄악의 누적이 바로 이 단어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그들의 반응에 구애받지 말고 말씀을 전하라고 명령하심으로, 이 패역함이 사역자의 낙심의 이유가 되어선 안 됨을 분명히 하십니다.

 

✦ 신학적 의미

‘메리’는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규정짓는 결정적 표현으로, 언약 백성이 하나님을 저버릴 때 어떤 영적 결과가 따르는지를 묘사합니다. 신명기, 이사야, 예레미야 등에서도 이 단어는 하나님의 심판의 정당성을 설명하는 데 자주 사용되며, 에스겔서에서는 이 단어를 통해 이스라엘의 전적인 타락과 하나님으로부터의 단절 상태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패역함 속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말씀하시고, 선지자를 보내신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인내와 자비가 함께 드러납니다.


❖ 두려워하다 (יָרֵא / 야레)

 

✦ 뜻과 의미

히브리어 ‘יָרֵא’(야레)는 ‘두려워하다’, ‘경외하다’, ‘무서워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문맥에 따라 ‘공포’ 혹은 ‘존경과 경외’를 동시에 포함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이 단어가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경외심을 나타낼 때와, 인간적인 공포를 묘사할 때 모두 사용됩니다.

 

✦ 본문에서의 의미

에스겔 2장 6절에서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을 세 번 반복하십니다. 이는 단지 감정적인 위로를 위한 말이 아니라, 선지자의 사역 환경이 얼마나 위협적이고 감정적으로 압도될 수 있는지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깊은 인식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야레’라는 단어를 반복하심으로써, 에스겔의 두려움이 어디서부터 오는지, 무엇을 경계해야 하는지를 정확히 짚고 계십니다.

 

✦ 신학적 의미

‘야레’는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명령과 연결되어 가장 신학적으로 풍부한 단어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곧 지혜의 근본이 되듯이, 사람이나 환경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사명을 약화시키는 장애물입니다. 에스겔에게 주신 이 말씀은 오늘날 사명을 감당하는 모든 신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지는 말씀으로, 진리 앞에서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신앙의 용기와 신적 권위의 뿌리를 상기시킵니다.


❖ 말하다 / 고하다 (דָּבַר / 다바르)

 

✦ 뜻과 의미

히브리어 ‘דָּבַר’(다바르)는 ‘말하다’, ‘전하다’, ‘말씀하다’는 의미를 가진 대표적인 구약의 단어입니다. 명사형 ‘דָּבָר’(다바르)는 ‘말씀’ 또는 ‘일’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계시적 말씀을 표현하는 데 자주 등장합니다.

 

✦ 본문에서의 의미

본문 7절에서 하나님은 “너는 내 말로 고할지어다”라고 명하십니다. 여기서 ‘말’은 단순히 에스겔 개인의 생각이나 느낌이 아닌,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 즉 계시된 진리를 의미합니다. 에스겔은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고하는 자이며, 이는 선지자의 핵심 사명이 ‘전달자’(herald)로서의 정체성에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 신학적 의미

‘다바르’는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지칭하는 가장 중요한 단어 중 하나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말씀으로 창조가 시작되었고, 신명기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생명과 축복의 길로 연결됩니다. 에스겔서에서 다바르는 심판의 도구이자 회복의 소망이며, 선지자들의 입술을 통해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작동합니다. 말씀은 생명을 낳고, 역사를 움직이며, 심판과 구원을 동시에 선포하는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 두루마리 (מְגִלָּה / 므길라)

 

✦ 뜻과 의미

히브리어 ‘מְגִלָּה’(므길라)는 ‘두루마리’ 혹은 ‘말아서 보관하는 문서’를 의미합니다. 고대 근동에서 책의 형태는 지금처럼 제본된 것이 아니라, 파피루스나 가죽 위에 글을 쓰고 이를 돌돌 말아 보관하는 두루마리 형태였습니다. 이 단어는 성경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계시, 율법, 예언의 말씀을 담은 상징으로 자주 등장합니다.

 

✦ 본문에서의 의미

에스겔 2장 9–10절에서는 한 손이 에스겔을 향해 펴지며, 그 손에 ‘두루마리 책’이 들려 있습니다. 이 두루마리는 그 안팎에 글이 가득한 상태로, 그 내용은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입니다. 이것은 에스겔이 앞으로 선포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 결코 가볍거나 기쁘기만 한 메시지가 아님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심판, 슬픔, 고통에 대한 예언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또한 두루마리를 ‘먹는다’는 다음 장면은, 그 말씀을 단지 읽고 전하는 수준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에 흡수하고 살아내야 할 사명임을 의미합니다.

 

✦ 신학적 의미

성경에서 두루마리는 하나님의 계시된 뜻과 말씀의 전달 수단으로 자주 등장합니다. 예레미야 36장에서도 바룩이 두루마리에 예언을 기록하고 낭독하며, 스가랴 5장에서는 날아다니는 두루마리를 통해 심판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요한계시록 5장에서도 봉인된 두루마리를 열 자격이 있는 유일한 분으로 어린양이 등장하며, 종말의 심판과 구속의 메시지가 연결됩니다.

 

에스겔서의 두루마리는 단지 예언자의 말의 출처를 보여주는 도구가 아니라, 그 삶 자체가 말씀을 삼켜야 하는 운명을 지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선지자는 말씀을 읽는 자가 아니라, 말씀으로 살아가는 자입니다. 그 말씀은 때로 달지만, 대부분은 고통스럽고 무겁지만,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는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전하게 됩니다.


📖 절별 주해

1절 | 하나님의 부르심, 선지자의 첫 소명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 발로 일어서라 내가 네게 말하리라 하시며"

 

이 구절은 에스겔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직접적인 부르심의 시작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인자야”라고 부르시며, 그를 향해 “일어서라”고 명하십니다. 이는 단순히 육체적 자세의 변화가 아닌, 선지자로서의 새로운 정체성과 사명을 받아들이라는 상징적 요청입니다. 이전 장면에서 하나님의 영광 앞에 엎드려 있던 에스겔은 이제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의 말씀을 받아 세상을 향해 나아갈 사명자로 세워져야 합니다. “일어서라”는 말은 곧 ‘정신을 차리고 준비하라’, ‘내가 말할 것이 있으니 경청하라’는 하나님의 영적 호출입니다.

 

특히 여기서 ‘내가 네게 말하리라’는 선언은, 선지자의 사명이 자신의 생각이나 판단이 아닌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전하는 데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말씀하시며, 그것을 듣는 자세를 갖춘 자에게 사명을 맡기신다는 원리를 보여줍니다. 에스겔은 더 이상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메시지를 담아 움직여야 할 ‘선포자’로 부름받은 것입니다.


2절 | 하나님의 영으로 일어선 선지자

"그가 내게 말씀하실 때에 그 영이 내게 임하사 나를 일으켜 내 발로 세우시기로 내가 그 말씀하시는 자의 소리를 들으니"

 

에스겔이 일어선 것은 그의 의지나 결단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그의 ‘영’이 임하셨고, 바로 그 성령의 권능이 에스겔을 일으켰습니다. 이는 모든 하나님의 사명은 성령의 임재 없이는 시작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그 영이 내게 임하사’라는 표현은 신약시대 오순절 사건을 연상시키는 장면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사역이 함께 역사한다는 성경 전체의 원리를 보여줍니다.

 

이 구절은 에스겔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상태로 완전히 들어가게 되는 전환점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자의 소리를 들으니’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지자가 온전히 수용하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힘으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임할 때 비로소 들리고 깨달아지는 영적인 사건이라는 점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도 말씀을 읽고 듣는 자리에서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다는 신학적 교훈을 제공합니다.


3절 | 반역의 역사 속으로 보냄받는 사명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손 곧 패역한 백성, 나를 배반하는 자에게 보내노라 그들과 그 조상들이 내게 범죄하여 오늘까지 이르렀나니"

 

하나님은 에스겔을 “이스라엘 자손”, 곧 “패역한 백성”에게 보내십니다. 이들은 단지 우연히 길을 잃은 무지한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배반’한 자들입니다. 과거 조상들부터 현재까지 이어진 범죄의 연속성은 이스라엘의 영적 병리 현상이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줍니다. 이는 선지자 사역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여정이 될 것인지를 예고하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보낸다”는 히브리어 ‘샬라흐’는 공식적인 사절의 파송을 의미하며, 이로써 에스겔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씀을 전하는 권위 있는 선지자가 됩니다. 이 말씀은 인간적인 기대나 열매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보낸 사자라는 정체성이 사명의 중심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또한 이는 당시 포로 상태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희가 아직도 회개하지 않았다’는 강한 경고의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4절 | 뻔뻔함과 완고함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

"이 자손은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굳은 자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노니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 상태는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굳은 자’로 묘사됩니다. 이는 감정적 냉소가 아니라, 오랫동안 죄에 물들고 회개의 가능성을 스스로 거절한 완고한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러한 완고한 자들에게도 여전히 주어집니다. 이는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이 함께 나타나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라고 명하십니다. 이것은 선지자의 메시지가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직접적인 선언임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말씀이 이러하시다’는 것은 히브리어로 ‘코 아마르 아도나이 야훼’이며, 선지자들이 계시의 말문을 열 때 사용하는 전형적인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백성에게 주어지든지, 그것은 곧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는 행위입니다.


5절 | 선지자의 존재 - 메신저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 가운데에 선지자가 있음을 알지니라"

 

하나님은 백성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말씀을 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수용 여부와 상관없이 반드시 선포되어야 함을 뜻합니다. 선지자의 사명은 결과에 있지 않고, 진리의 선포 자체에 있습니다. 또한 이 구절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던 이스라엘조차도 “선지자가 있었다”는 사실로 인해 나중에 심판받게 될 것을 암시합니다.

 

하나님은 항상 경고와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분입니다. 이 ‘선지자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인내와 긍휼을 상징하며, 동시에 백성들의 불순종에 대한 증거이기도 합니다. 이 구절은 오늘날에도 진리를 외치는 사역자들이 흔들리지 않고, 사람들의 반응과 상관없이 말씀을 선포해야 할 근거가 됩니다.


6절 | 두려움과 싸워야 할 사명자의 현실

"인자야 너는 비록 가시와 찔레와 함께 있으며 전갈 가운데에 거주할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말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도 그 말을 두려워하지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하지 말지어다"

 

이 구절은 선지자 에스겔이 감당해야 할 사명의 현실이 얼마나 위험하고 험난한지를 직설적으로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의 사역 환경을 ‘가시와 찔레’, ‘전갈’로 비유하십니다. 이는 단지 외적인 고난이나 핍박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적으로 날카롭고 영적으로 해로운 공격이 따를 수 있는 위험한 사역지를 묘사하는 표현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반기기보다는 거부하고, 선지자를 조롱하거나 위협하는 태도로 일관했기 때문에, 이 사역은 실제로 큰 정신적, 영적 부담을 동반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반복적으로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세 번이나 같은 취지의 명령이 주어진 것은, 두려움이 얼마나 실질적인 위협이었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 두려움을 이길 근거는 하나님 자신에게 있음을 강조하는 방식입니다. 사람의 반응보다 하나님의 명령이 더 크고 무겁다는 사실을 에스겔에게 깊이 각인시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모든 시대의 사역자들에게, 진리를 전하는 자는 외적인 위험보다 내적인 담대함을 먼저 준비해야 함을 일깨워 줍니다.


7절 | 듣지 않아도 전해라

"그들은 심히 패역한 자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지어다"

 

이 절은 5절의 내용을 다시 한번 강조하며, 선지자의 사명이 결코 백성의 반응에 따라 좌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백성들이 ‘심히 패역하다’고 진단하십니다. 이는 단순히 회개하지 않음을 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일부러 거절하고, 자신들의 길을 고집하는 완고함을 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너는 내 말로 고할지어다”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고하다’는 말은 단순한 전달이 아닌, 담대하게 외치는 것을 의미하는 표현으로, 에스겔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도 빠짐없이, 거침없이 선포해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전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반드시 ‘전해야만 하는’ 불가피한 사명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은 백성의 수용 여부와 관계없이 반드시 선포되어야 하며,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는 진리의 선포 속에서 함께 드러난다는 중요한 신학적 원리를 반영합니다.


8절 | 먼저 말씀을 삼켜야 하는 선지자

"너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듣고 그 패역한 족속 같이 패역하지 말고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하시기로"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패역한 족속처럼 되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이는 선지자가 전하는 말씀과는 별개로, 그의 삶의 태도와 내면의 순종도 하나님 앞에서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즉, 선포자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순복하고, 그 말씀을 자신의 존재 안에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는 명령은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선지자의 존재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되어야 한다는 영적 원리를 보여줍니다. 말씀은 단순히 전해지는 정보가 아니라, 선지자의 인격과 삶 속에 내면화되어야 할 ‘영적 양식’입니다. 에스겔이 입을 벌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먹는 이 상징적 행위는, 이후 에스겔의 사역 전반에 있어 그가 전하는 모든 말이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계시임을 보여주는 강력한 근거가 됩니다.


9절 | 계시의 전달자에게 펼쳐진 하나님의 손

"내가 보니 보라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보라 그 안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


에스겔의 시선은 이제 다시 환상 가운데로 들어갑니다.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친히 에스겔에게 계시를 주시는 장면으로, 말씀의 출처가 분명히 하나님 자신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두루마리 책’은 당시 고대 근동 문화에서 문서나 법령을 기록할 때 사용되던 형태이며, 하나님의 계시가 구체적인 형태로, 읽고 전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제공된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이 두루마리는 선지자가 임의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능동적으로 펴시며 주시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판단이나 선택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계시를 받아들이는 데서 사명이 시작됨을 보여줍니다. 또한 이 장면은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단지 선지자로 임명하는 수준을 넘어서, 그에게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고 계신다는 인격적이고 구체적인 소명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매우 인상적인 계시입니다.


10절 | 애가와 재앙으로 가득한 말씀의 내용

"그가 그것을 내 앞에 펴시니 그 안팎에 글이 있는데 그 위에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

 

하나님께서 펼치신 두루마리의 특징은 안팎에 글이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고대 두루마리는 일반적으로 안쪽 면에만 글을 기록했지만, 여기서는 바깥면까지 기록된 것으로 묘사되며, 이 말씀이 얼마나 충만하고 가득한 심판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글의 내용은 “애가와 애곡과 재앙”으로 요약됩니다. 이는 에스겔이 앞으로 선포해야 할 말씀이 위로와 소망보다는 고통과 심판의 메시지가 중심이 될 것임을 예고합니다.

 

이 장면은 선지자가 전할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무겁고 고통스러운 진실을 담고 있는지를 시각적으로 묘사한 구절입니다. 동시에, 이 무거운 말씀조차도 하나님께서 백성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셨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말씀하시고, 경고하시며,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이 두루마리는 하나님의 공의의 말씀이며, 동시에 아직 끝나지 않은 자비의 기회를 보여주는 ‘계시의 문서’입니다.


📖 묵상

에스겔 2장의 말씀은 우리 모두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로 부르시는 깊은 부르심의 현장입니다. 말씀을 읽는 내내 제 마음에 가장 크게 울렸던 것은, 에스겔이 어떤 백성에게 보내졌는가보다도, 그가 어떤 존재로 부름받았는가였습니다. 그는 강가에서 환상을 본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쓰러졌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일으켜 세우시며 말씀하십니다. “인자야, 네 발로 일어서라.”

 

이 장면은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하시는 말처럼 느껴집니다. 세상 앞에서 주저앉아 있고, 신앙 앞에서 움츠러들고, 때로는 세속적인 가치관과 싸우느라 지친 우리에게 “일어나라”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하나님은 넘어져 있는 자를 보고 ‘왜 이러고 있느냐’ 책망하시기보다, 그에게 말씀하시고, 영을 보내셔서 일으켜 세우십니다. 그분의 부르심은 책망이 아니라 회복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나서 부르심의 방향을 보십시오. “패역한 족속에게 보내노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이 꼭 잘 준비된 교회 강단이나 따뜻한 공동체 안에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는 걸 보여줍니다. 가시와 찔레와 전갈이 있는 곳, 말씀을 거부하는 사람들 속, 심지어 듣지 않을 것이 뻔한 사람들 가운데로 하나님은 말씀을 들고 가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 앞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복음을, 진리를, 언제나 받아줄 사람에게만 전하려 했던 건 아닐까?”

“거절당할 것 같으면 아예 말을 꺼내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말하라.”

‘결과’가 아니라 ‘순종’이 사명의 기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전했는지를 묻지 않으시고, 내가 네게 말한 것을 전했느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선지자는 말씀을 먼저 ‘먹은 자’라는 사실입니다.

전하기 전에, 들은 말씀을 내 안에 삼켜야 합니다. 내 뼛속까지 말씀이 들어와야 비로소 진짜로 전해질 수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내가 그 말씀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면, 그 말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정보가 아니라 존재를 새롭게 만드는 양식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말씀을 말하기 어려운 시대에 살아갑니다. 진리를 말하면 혐오라 하고, 신앙을 고백하면 편견이라 몰리기 쉬운 시대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런 시대에 하나님은 다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얼굴을 무서워하지 말라. 그 말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의 말씀은 거절당해도, 그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실패하지 않습니다.

진리 앞에 선 자는 이미 승리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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