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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Story】/[생명의 삶] 디모데전서ㅣ2025년

[생명의 삶] 디모데전서 3장 14절-4장 5절 _ 2025. 7. 12(토)

by LogosLab Steward 2025. 7. 12.

❖ 이 자료는 개인적인 말씀 묵상과 연구를 바탕으로 [목회자의 설교 준비][성경을 더욱 깊이 알고자 하는 ], 그리고 [말씀묵상에 도움이 필요한 성도]를 돕기 위해 제작되었습니다. 본 자료의 모든 저작권은 작성자인 LogosLab Steward에게 있으며, 자유롭게 사용 및 참고하시되 출처를 밝혀주시고, [무단 복제 배포]를 합니다. 이 자료가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풍성하게 경험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 본문

3장
14 내가 속히 네게 가기를 바라나 이것을 네게 쓰는 것은 
15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 
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 
4장
1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2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3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4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 말씀

"진리 위에 세워지는 교회"

 

서론 │ 흔들리는 세상, 흔들리지 않는 기초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그 변화는 때로는 진보로, 때로는 위기로 다가옵니다. 기술의 발전, 윤리의 상대화, 공동체의 해체, 그리고 진리의 희석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거대한 물결입니다. 그 가운데 교회는 어디에 서 있어야 할까요? 흔들리는 시대 한복판에서 흔들리지 않는 기초 위에 서야만 참된 교회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물음은 단순히 시대 분석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정체성과 사명에 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내며, ‘하나님의 집’인 교회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가르칩니다. 특별히 디모데전서 3장 15절은 이 편지의 핵심 요약이자 교회를 향한 분명한 정의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 이 구절은 교회를 단순한 모임이나 제도적 기관으로 보지 않습니다. 교회는 살아 계신 하나님께 속한 공동체이며, 세상 가운데 진리를 붙드는 기둥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교회가 세상의 흐름에 편승하거나, 시대의 소리에 민감하되 하나님의 음성에는 둔감하다면, 본질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진리의 공동체입니다. 복음의 진리 위에 서 있을 때 교회는 교회답게 기능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반드시 붙들어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지금 진리 위에 서 있는가? 우리 교회는 지금 무엇을 중심에 두고 있는가?

 

디모데전서 3장 14절부터 4장 5절까지의 본문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줍니다. 이 본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교회의 정체성과 역할(3:14–16), 둘째는 거짓 가르침에 대한 경계와 바른 신앙의 분별(4:1–5)입니다. 바울은 단지 교회의 구조나 제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무엇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를 강조합니다. 그리고 그 뿌리는 진리입니다.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오늘 이 말씀 앞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교회의 본질을 회복해야 합니다. 진리가 무너지는 시대일수록 교회는 더욱 진리를 붙들어야 하며, 복음이 흐려지는 시대일수록 더욱 선명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기초, 그것은 건물도 전통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제 우리는 본문을 통해 진리 위에 세워지는 교회의 세 가지 기둥을 함께 살펴보려 합니다.

 

 

 

본론ㅣ진리 위에 세워진 교회의 사명

 

 

1.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로 세워져야 합니다. (3:14–15)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 (딤전 3:15)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개인적인 권면을 넘어서, 교회의 본질을 정확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단순한 모임이나 제도가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이며, 그 본질은 ‘진리의 기둥과 터’라는 표현으로 선포됩니다. 여기서 ‘기둥과 터’는 단순히 구조적 안정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떠받드는 책임그 진리 위에 세워진 견고함을 함께 내포한 상징입니다.

 

‘기둥’(στῦλος)이라는 단어는 고대 신전에서 하늘을 떠받드는 구조물로 이해되었습니다. 교회는 진리를 장식물처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가운데 진리를 드러내고 선포하는 사명을 지닌 기둥입니다. ‘터’(ἑδραίωμα)는 기초라는 뜻으로, 진리가 단순히 이념이나 교리가 아니라 삶의 근거요, 존재의 중심이 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즉, 교회는 진리를 가르치고 보호할 뿐 아니라, 그 진리 안에 거하며, 진리에 뿌리내린 삶을 살아가야 할 공동체입니다.

 

더 나아가 바울은 16절에서 경건의 비밀, 곧 복음의 핵심을 노래합니다. 이 고백은 초기 교회에서 널리 알려졌던 신앙의 선언으로 보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십자가, 부활, 승천, 복음 선포, 영광 받으심을 압축한 내용입니다. 이는 단지 교리적 요약이 아니라, 교회가 무엇을 붙들고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신앙의 중심축’입니다. 다시 말해, 교회는 복음의 사람들로 구성된 공동체이며, 그 복음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진정한 교회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가 위기 속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거짓 교사들, 율법주의, 혼합된 가르침들이 들어와 교회를 흔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디모데에게 단호히 말합니다. “네가 속히 오지 못할 수도 있지만, 교회가 무엇인지 알고, 교회답게 살아야 한다”고. 교회는 사역자가 있음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 위에 세워질 때만 온전한 교회로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너무나 중요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교회의 규모나 예배 형식, 사역의 다양성보다 중요한 것은, 그 교회가 진리 위에 세워져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교회의 모든 사역은 진리라는 기초 위에서 진행되어야 하며, 목회의 모든 판단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진리를 희석하거나 타협하는 순간, 교회는 더 이상 ‘하나님의 집’이 아니라, 사람의 조직에 불과한 껍데기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우리는 교회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진리 위에 서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나는 지금 무엇 위에 내 인생을 세우고 있는가? 세상의 유행, 감정,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 있는가? 교회는 결국 우리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기둥 삼아, 복음을 터 삼아 살아갈 때, 우리는 세상 속에서 무너지지 않는 신앙의 구조물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시대는 교회가 더 많이 말하기보다, 진리로 살아내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진리를 수호하는 것이 말의 전쟁이 아니라, 삶의 증명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서, 그 말씀을 삶으로 살아낼 때, 교회는 다시금 이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2. 교회는 거짓 교훈을 분별하고 바른 가르침을 지켜야 합니다. (4:1–5)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딤전 4:1)

 

바울은 4장에 들어서며 무게감 있는 경고로 시작합니다.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이라는 표현은, 이것이 단순한 인간의 추측이나 염려가 아니라 성령께서 직접 계시하신 명확하고 확정적인 예언임을 보여줍니다. 바울은 훗날에 일어날 일이 아니라, 이미 에베소 교회 안에서 현실화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에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이는 단지 신학의 오류가 아니라, 믿음 자체를 파괴하는 영적 배교의 문제였습니다.

 

거짓 교훈은 언제나 ‘종교적인 모습’을 띠고 나타납니다. 3절에서는 사람들이 결혼을 금하고 음식물 섭취를 금하는 율법주의적 가르침을 언급합니다. 이는 유대적 율법주의와 초기 영지주의가 혼합된 형태로, 신체를 악한 것으로 보고, 금욕과 규칙을 통해 경건을 이루려는 잘못된 가르침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단호히 말합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고,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 (4:4)

 

이러한 가르침은 단순한 신학 논쟁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중심을 흔들 수 있는 매우 위험한 요소였습니다. 당시 에베소 교회에는 ‘경건’이라는 이름 아래, 복음을 대신할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려는 흐름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참된 경건은 삶의 영역을 제한하거나 왜곡된 신비주의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이 주신 모든 선한 것을 감사함으로 누리는 삶에 있다고 강조합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거짓 교훈은 다양한 방식으로 반복됩니다. “이것만 하면 복 받는다”, “이런 기도를 해야 하나님이 응답하신다”는 식의 신앙의 공식화, “성공하면 믿음 좋다”는 세속적 번영주의, 혹은 “이것은 믿지 않으면 구원 못 받는다”는 협박적 종교주의는 본질적으로 복음의 자유를 제한하고 믿음을 왜곡하는 가르침입니다. 이런 시대일수록 우리는 더욱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바울은 5절에서 바른 가르침의 기준을 분명히 제시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여기서 ‘거룩’은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결과가 아니라,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의 뜻에 참여할 때 이루어지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즉, 참된 신앙은 규칙이나 형식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말씀을 듣고 기도로 순종하는 삶에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 기준을 지켜야 합니다. 말씀 없는 열정, 기도 없는 행동, 은혜 없는 경건은 언제나 거짓 교훈의 통로가 됩니다. 오늘날 수많은 정보와 사상이 넘쳐나는 가운데, 교회는 분별력을 잃기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말씀 중심의 신앙 교육과 건강한 영적 훈련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다시 질문해야 합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믿음’이라 말하고 있는가? 내가 따르는 가르침은 성경에 근거한 것인가, 사람의 말인가? 교회는 단순히 ‘말을 잘하는 사람’을 따르지 않고, 말씀을 정확히 해석하고 복음 중심으로 전하는 사람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러한 분별력과 기준을 심어주며, 교회가 진리 안에 굳건히 서기를 원했습니다. 교회는 단순히 외형을 유지하는 기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와 복음을 지키는 등대가 되어야 합니다. 이 사명을 지키지 못하면 교회는 결국 방향을 잃고, 세상의 물결 속에 휩쓸리게 될 것입니다.

 

 

결론 │ 교회는 진리 위에 세워져야만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진리 위에 세워진 살아 있는 공동체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빠르게 변하고, 수많은 이념과 가치가 교차하더라도, 교회가 흔들리지 않는 이유는 ‘기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기둥은 다름 아닌 복음의 진리입니다. 디모데전서 3장 15절에서 바울은 교회를 가리켜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단지 비유적인 언어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진 정체성과 사명을 동시에 선언하는 말씀입니다. 교회가 교회답기 위해 반드시 붙들어야 하는 본질, 그것이 바로 진리입니다.

 

오늘날 교회를 향한 외부의 비판은 점점 날카로워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 위험한 것은 외부의 공격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진리가 희미해지는 현상입니다. 설교에서 복음이 빠지고, 예배에서 경외가 사라지고, 공동체 안에서 거룩의 열망이 흐려질 때, 교회는 이미 ‘파선’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경고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디모데에게 단지 교회를 운영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진리를 지키라고, 복음을 선포하라고, 사람들을 진리 가운데로 이끄는 통로가 되라고 권면합니다.

 

결국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힘은 ‘진리를 붙드는 사람들’에 있습니다. 교회는 단순한 모임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입니다(3:15). 이 교회를 지키는 건 시스템이 아니라 성도들의 신앙이고, 프로그램이 아니라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사명을 지켜내는 일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시대의 풍조에 맞서는 결단이 필요하고, 고난과 오해를 감당할 용기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진리가 무너지면, 우리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다시 복음 앞에 서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영적인 분별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남긴 이 서신은 단지 과거의 목회 지침이 아니라, 오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기도 합니다. 진리가 희미해지는 시대에, 더욱 선명한 복음의 사람으로 살아가라는 하나님의 초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길은 분명합니다.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교회를 세우는 것, 그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진리 위에 세워진 교회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말씀을 따라 걷는 교회는 버림받지 않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교회는 결국 승리합니다. 오늘, 우리 안에 다시금 이 확신이 심겨지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그 확신 위에 믿음으로 순종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3장 14절~4장 5절 본문 연구 및 주석]

📖 본문 배경

 

❖ 개요

 

디모데전서 3장 14절부터 4장 5절은 바울의 목회적 권면이 중요한 전환점을 이루는 구간입니다. 본래 3장은 교회 지도자의 자격에 대한 교훈으로 구성되어 있고, 4장은 종말론적 경고와 거짓 가르침에 대한 경계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많은 주석가들과 생명의 삶 본문이 이 두 장의 경계를 넘어 하나의 단락으로 묶는 이유는, 3장 14절부터 바울이 본 서신의 목적을 명확히 밝히며, 교회의 본질과 복음의 핵심, 그리고 그것을 지켜내야 할 경건한 공동체의 태도에 대해 유기적으로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3장 14–15절은 앞서 제시된 교회 직분자의 자격 기준이 단순한 조직적 필요가 아니라, “하나님의 집”으로서의 교회가 지켜야 할 복음적 정체성과 질서에 기반한 것임을 강조합니다. 이어지는 16절은 ‘경건의 비밀’이라는 형식으로 복음의 핵심을 고백하고, 바로 이어지는 4장 1–5절은 이 복음의 진리가 훼손될 수 있는 위험, 즉 거짓 교훈과 종말의 미혹을 경고하며, 교회와 성도들이 어떤 기준 위에서 신앙을 지켜가야 하는지를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단락은 “교회가 무엇이며, 복음을 어떻게 붙들고 지켜야 하는가”라는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교회의 본질(3:14–15), 복음의 내용(3:16), 신앙의 위험(4:1–2), 그리고 성도의 삶의 방식(4:3–5)을 논리적 흐름 속에서 함께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연결성 때문에 본문은 장 구분과 관계없이 한 단위로 다루는 것이 설득력 있는 구조적 접근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역사적 배경

 

1세기 후반, 초대교회는 외부로부터의 박해뿐만 아니라 내부로부터의 혼란에도 직면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에베소 지역은 헬라 철학과 영지주의적 사상이 혼합된 이단 사상들이 교회 안으로 유입되고 있던 중심지 중 하나였습니다. 바울이 ‘미혹하는 영’(πλάνοι)과 ‘귀신의 가르침’(διδασκαλίαις δαιμονίων)을 언급하며 경고한 것은, 단지 상징적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교회 안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영적 혼란의 실상을 반영한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에 남겨진 디모데가 이 거짓된 흐름을 분별하고 교회를 바르게 세우는 책임을 지고 있음을 인식하며, 편지를 통해 강력한 영적 지도와 분별력을 제공하고자 했습니다. 특히 금욕주의(혼인과 음식 금지)와 같은 극단적 율법주의가 교회 안에 영향을 미치던 시기였기에, 하나님의 창조의 선함과 감사의 태도를 강조한 바울의 교훈은 당시 교회를 건강하게 지켜내기 위한 필수적인 처방이었습니다.


❖ 문화적 배경

 

이 시기의 로마 제국 사회는 외면적으로는 화려하고 체계적이었지만, 종교와 철학 면에서는 혼합주의가 만연했습니다. 특히 스토아주의, 플라톤주의와 같은 헬라 철학은 금욕과 이원론 사상을 강조하며, 육체와 물질은 악하고 영혼만이 선하다는 인식을 사회 전반에 퍼뜨렸습니다. 이러한 철학은 교회 안으로도 스며들었고, 그 결과로 혼인을 부정하거나 음식 섭취를 금하는 이단적 흐름이 나타났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사상에 대해 성경적 반론을 제기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본래 선하며(4:4),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진다는 기독교적 관점을 분명히 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단지 철학적 반박을 넘어, 복음 안에서 누리는 자유와 감사, 그리고 신자의 실천적 삶이 세상의 규범과는 다른 가치 기준을 따른다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세상의 종교적 규범을 따라 금욕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따라 거룩해져야 한다는 것이 바울의 일관된 입장입니다.


❖ 신학적 배경

 

이 본문은 크게 두 가지 중요한 신학적 주제를 다룹니다. 하나는 교회론이고, 다른 하나는 기독론입니다.

 

먼저 교회론 측면에서 바울은 교회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집”이라 정의하며, 교회가 단순한 모임이나 제도적 조직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와 진리가 거하는 거룩한 공동체임을 선언합니다(3:15). 이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로서, 세상 속에서 복음을 떠받들고 드러내야 할 사명을 지닌 유일한 기관입니다. 따라서 그 구성원들은 어떻게 행해야 할지 분명히 알아야 하고, 복음의 질서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기독론 측면에서는 3장 16절에 압축된 경건의 비밀 선언이 핵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의롭다 하심, 천사들에게 보이심, 만국에서 전파되심,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심, 그리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심이라는 여섯 개의 진술은 구속사적 사건들을 요약하며,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 고백이 교회의 근간임을 보여줍니다. 이 고백은 단순한 교리 정리가 아니라, 교회의 삶과 실천의 중심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이어지는 4장에서는 종말론적 분별력이 강조됩니다. 마지막 때에 성도들이 미혹의 영과 거짓 가르침에 넘어가는 일이 있을 것이라는 성령의 예언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경고입니다. 바울은 거짓 교사들의 특징을 ‘양심이 화인 맞은 자’, ‘거짓말하는 자’, ‘외식하는 자’로 묘사하며, 성도의 분별과 경건한 삶의 중요성을 역설합니다.

 

결론적으로 이 본문은 교회의 본질과 사명, 복음의 중심이 되는 그리스도, 거짓 가르침에 대한 분별력, 그리고 감사와 기도로 거룩해지는 실천적 신앙생활이라는 네 가지 주제를 유기적으로 연결하며, 디모데에게 목회자로서 교회를 어떻게 세워야 할지에 대한 명확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이는 오늘날의 교회와 성도에게도 동일하게 요구되는 거룩한 정체성과 복음적 삶의 기준이 됩니다.


📖 본문 요약

❖ 단락 구분

 

3:14–15 | 바울의 목적과 교회에 대한 정의

바울은 디모데에게 “속히 네게 가기를 바라나”라는 말로 개인적인 바람을 전하면서도, 혹시 지체될 경우를 대비하여 이 편지를 쓴 목적을 밝힙니다. 그것은 디모데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인 교회 안에서 어떻게 행해야 할지를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교회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공동체이며, 진리의 기둥과 터라는 중요한 신학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3:16 | 경건의 비밀에 대한 신앙 고백

바울은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라고 하며 고백적인 찬송시를 선언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구속 사역, 전파와 믿음, 승천에 이르는 복음의 전 과정을 요약한 것으로, 초기 교회가 함께 선포하던 신앙 고백 혹은 찬송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는 교회의 기초가 되는 복음의 핵심을 요약한 부분입니다.

 

4:1–2 | 성령의 예언과 이단의 출현

성령께서는 마지막 때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게 될 것이라고 밝히셨습니다. 이들은 외식하며 거짓말을 하고, 그들의 양심은 화인을 맞아 무감각해졌습니다. 이는 단순한 도덕적 타락이 아니라, 영적 기만과 진리의 왜곡이라는 점에서 매우 심각한 문제로 지적됩니다.

 

4:3–5 | 거짓 교훈에 대한 반박과 진리의 기준

이단 교사들은 혼인을 금하고, 특정 음식의 섭취를 금지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모든 음식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선한 것이며,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받는 모든 것은 거룩하여지며, 버릴 것이 없다고 선언합니다.


❖ 내용 요약

 

디모데전서 3장 14절부터 4장 5절까지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교회의 본질과 복음의 중심, 그리고 마지막 때에 등장할 거짓 가르침에 대한 경계를 담아 전한 내용입니다. 먼저 바울은 이 편지를 통해 디모데로 하여금 교회에서의 바른 삶의 방식, 즉 하나님의 집에서의 질서와 경건함을 실천할 수 있도록 돕고자 했습니다(3:14–15). 바울은 교회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집”이라 부르며, 그 교회가 진리의 기둥과 터가 되어야 한다는 사명을 강조합니다.

 

이어지는 3장 16절은 신약 성경 중 가장 밀도 높은 기독론적 신앙 고백 중 하나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역, 전파, 믿음, 승천이라는 복음의 전 과정을 한 문장 안에 집약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정보의 전달이 아니라, 교회의 모든 가르침과 사역의 중심이 되어야 할 ‘경건의 비밀’, 즉 예수 그리스도 그 자체를 향한 고백이며, 복음의 정수입니다.

 

4장에 들어서면서 바울은 종말론적 경고를 제시합니다. 성령께서 미리 경고하신 대로, 말세에는 사람들이 믿음을 버리고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4:1). 이는 외적인 교회 구성이나 리더십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로, 복음의 본질이 왜곡되고 신자들의 영적 감각이 마비되는 사태를 말합니다. 바울은 이들이 혼인과 음식에 관한 비성경적 금욕주의를 주장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4:2–3).

 

이에 대한 바울의 답변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피조물은 선하며, 감사함으로 받으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4:4–5). 이것은 단순히 생활의 자유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선하심을 인정하고, 복음이 주는 자유와 은혜를 지키는 방식으로 살아가야 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본문은 교회가 단지 조직적인 안정성이나 직분의 질서만이 아니라, 복음의 본질에 충실한 진리의 공동체로 세워져야 하며,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고, 거짓 가르침과 미혹의 영을 분별하는 영적 성숙함을 지녀야 한다는 교훈을 줍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금지하고 억제하는 것보다, 감사함으로 받고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지는 삶이야말로 참된 경건의 길임을 보여줍니다.

 


📖 붙잡는 말씀

15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 

 

이 구절은 디모데전서 전체의 중심을 꿰뚫는 핵심 선언이며, 오늘날의 교회와 신앙 공동체가 어떤 정체성을 가져야 하는지를 분명히 밝혀주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교회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집’이라 부르며, 단순히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나 종교 기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와 진리가 거하는 살아 있는 공동체임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그 교회를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설명함으로써, 교회가 단지 진리를 받아들이는 수동적 공간이 아니라, 진리를 지탱하고 드러내는 능동적인 존재임을 강조합니다.

 

이 말씀이 제 마음에 깊이 와닿는 이유는, 오늘날 우리가 교회를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대한 반성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교회를 어떤 프로그램이나 조직의 관점에서 보거나, 사역의 효율성과 규모에 초점을 둘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교회를 그렇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교회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집’, 곧 하나님의 생명이 흐르고, 진리가 뿌리를 내리는 영적 터전으로 소개합니다. 교회가 교회다울 수 있는 이유는 건물 때문도, 사람 때문도 아닌, 하나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구절은 개인적인 정체성과 사명에도 연결됩니다. 교회가 진리의 기둥과 터라면, 그 교회를 이루는 한 사람 한 사람 역시 그 진리를 붙들고 살아가야 합니다. 혼란한 시대 속에서 무엇이 옳은지 분간하기 어려울 때, 우리는 진리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말씀이 왜곡되고, 거짓이 진리처럼 포장되는 시대일수록, 교회는 더 분명하게 진리를 붙드는 ‘기둥’이 되어야 하고, 흔들리지 않는 ‘터’가 되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저에게 묻습니다.

“너는 지금 교회를 어떻게 세우고 있는가?”

“너의 삶은 진리를 지탱하고 있는가, 흔들고 있는가?”

 

교회가 살아 있는 하나님의 집이라면, 저는 그 집 안에서 진리를 지키는 한 사람의 기둥으로 서야 합니다. 편안함이 아니라 진리를, 인기보다 거룩함을 붙드는 삶. 세상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중심을 보십니다.

 

그래서 오늘도 저는 이 말씀 앞에 다시 무릎을 꿇습니다.

교회를 사랑하기에, 진리를 지키기 위해 기도하며 살아가기를 결단합니다.

왜냐하면 그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며, 그 집은 무너지지 않는 진리의 터이기 때문입니다.


📖 단어 연구

❖ 경건 (εὐσέβεια / 에우세베이아)

 

뜻과 의미

헬라어 εὐσέβεια(에우세베이아)는 ‘경건함’, ‘하나님께 합당한 태도’, ‘신을 향한 존경’을 뜻합니다. 이 단어는 εὖ(좋게, 바르게)와 σέβομαι(경외하다, 예배하다)의 합성어로, 단순히 도덕적 의무가 아닌 하나님을 향한 전인격적 존경과 삶의 자세를 나타냅니다. 고대 헬라 세계에서는 종교적 충성과 예배자의 진실성을 뜻하는 용어로 쓰였습니다.

 

본문에서의 의미

디모데전서 3장 16절에서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라고 선언할 때 이 단어가 사용되며, 여기서 ‘경건’은 단지 도덕적 혹은 예배적 태도를 넘어, 예수 그리스도 자체의 사역과 복음의 신비를 가리키는 신학적 선언으로 사용됩니다. 즉, ‘경건의 비밀’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구속 사역, 부활과 승천에 이르는 복음의 실체를 의미합니다.

 

신학적 의미

에우세베이아는 바울 서신에서 단순한 의무감이 아닌, 복음에 뿌리내린 삶의 방향성과 태도를 나타냅니다(딤전 4:7–8, 6:6). 믿음은 마음의 고백에만 머무르지 않고 삶 전체에 영향을 미쳐야 하며, 경건은 그런 믿음의 열매로 나타나는 ‘신실한 삶’입니다. 디모데전서는 경건을 반복적으로 강조하며, ‘참된 경건’이란 하나님 앞에서의 진실한 자세이며, 그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있음을 드러냅니다.

 


❖ 진리 (ἀλήθεια / 알레데이아)

 

뜻과 의미

헬라어 ἀλήθεια(알레데이아)는 ‘숨겨지지 않음’, ‘드러난 것’, ‘진실’, ‘사실’을 의미합니다. 어근은 λανθάνω (숨기다, 감추다)의 부정형으로, 숨겨지지 않고 명확하게 드러난 것, 즉 ‘진실됨’ 혹은 ‘진짜임’을 뜻합니다. 단순한 정보나 사실의 나열이 아닌, 존재론적 진리를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본문에서의 의미

3장 15절에서 바울은 교회를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자체를 가리키며, 교회는 그 진리를 떠받들고 세상에 드러내는 기능을 가진 공동체임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즉, 진리는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이자, 교회가 세상 가운데 지켜야 할 본질입니다.

 

신학적 의미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고(요 14:6), 진리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 자체를 가리킵니다. 바울은 교회가 그 진리를 수호하고 전달해야 할 책임을 가진 공동체임을 강조하며, 성도는 ‘진리를 따르는 자’로 살아가야 함을 말합니다(딤후 2:15). 진리는 단순한 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과 복음의 핵심이며, 신자의 모든 삶을 규정하는 기준입니다.

 


❖ 기둥 (στῦλος / 스튤로스)

 

뜻과 의미

헬라어 στῦλος(스튤로스)는 ‘기둥’, ‘기반을 지탱하는 구조물’을 의미합니다. 건축 용어로써 건물의 중심을 세우고 무게를 떠받드는 중요한 구조적 요소입니다. 성경에서 기둥은 종종 존엄, 지지, 중추적 역할을 상징하는 은유로 사용됩니다.

 

본문에서의 의미

3장 15절에서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로 표현됩니다. 여기서 기둥은 복음을 떠받드는 역할로, 교회가 세상에서 복음을 중심으로 서 있어야 하고, 그 복음을 지탱하고 나타내야 할 책임이 있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 기둥은 중심 구조이며, 눈에 잘 보이고, 무너질 경우 전체가 무너지게 되는 본질적 위치를 뜻합니다.

 

신학적 의미

갈라디아서 2:9에서는 야고보, 게바, 요한이 ‘교회의 기둥’으로 불립니다. 이는 그들이 단지 지도자였다는 의미를 넘어서,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붙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했다는 신학적 칭호입니다. 교회가 진리의 기둥이라는 말은, 교회가 진리를 지키고 세상 속에서 그것을 선포할 사명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며, 이는 모든 성도에게 주어진 공동 사명이기도 합니다.

 


❖ 화인 맞은 양심 (καυστῐριάζω / 카우스티리아조)

 

뜻과 의미

헬라어 καυστῐριάζω(카우스티리아조)는 ‘불로 지지다’, ‘태우다’, ‘화인(火印)을 찍다’는 뜻으로, 노예나 범죄자의 표식을 남기기 위해 사용되던 단어입니다. 이 말은 감각이 마비되거나,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굳어진 상태를 비유적으로 나타낼 때 사용됩니다.

 

본문에서의 의미

4장 2절에서 바울은 거짓 교사들을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표현합니다. 이는 그들의 내면이 완전히 굳어져 양심의 기능이 마비된 상태, 즉 죄에 대해 아무런 민감함이나 회개의 여지가 없는 상태를 묘사합니다. 영적 분별력이 사라진 상태이기에 그들은 거짓을 진리처럼 말하고, 외식으로 공동체를 속이게 됩니다.

 

신학적 의미

성경은 양심을 인간 안에 주어진 도덕적 레이더로 묘사합니다(롬 2:15). 그러나 반복된 죄와 고의적 불순종은 양심을 마비시키며, 결국 진리를 왜곡하고 하나님의 음성에 반응하지 않게 됩니다. ‘화인 맞은 양심’은 회개하지 않는 상태의 최종적 비극을 보여주며, 그 끝은 거짓과 파멸로 이끕니다. 이 단어는 영적 지도자나 신자의 삶에서 내면의 민감함과 성령의 인도에 열린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경고하는 신학적 상징어입니다.


❖ 감사함 (εὐχαριστία / 에우카리스티아)

 

뜻과 의미

헬라어 εὐχαριστία(에우카리스티아)는 ‘감사’, ‘감사의 표현’이라는 뜻으로, εὖ (좋게) + χάρις (은혜, 선물)의 합성어입니다. 문자적으로는 “좋은 은혜에 대한 반응”, 즉 은혜에 대한 기쁨의 표현으로서의 감사를 의미합니다. 고대 교회에서는 성찬(Eucharist)의 명칭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본문에서의 의미

4장 3절과 4절에서 바울은 음식과 혼인을 금하는 이단 교사들의 주장에 대해 반박하며, “음식물은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라 밝힙니다. ‘감사함’은 하나님의 창조를 수용하고, 복음 안에서 누리는 자유의 표현이며, 금욕주의에 대한 복음적 반응이 됩니다.

 

신학적 의미

신약 전체에서 감사는 구원의 은혜에 대한 신자의 필연적 응답으로 강조됩니다(골 3:16–17, 살전 5:18). 단순한 예의나 감정이 아닌, 하나님을 창조주요 구속주로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디모데전서 4장에서는 감사가 진리를 아는 자들의 삶의 방식으로 제시되며,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질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즉, 감사는 믿음과 분별, 자유와 거룩함의 실천적 접점입니다.


📖 절별 주해

3장 14절 | 편지를 쓰는 이유

“내가 속히 네게 가기를 바라나 이것을 네게 쓰는 것은”

 

바울은 디모데에게 직접 만나 가르치기를 원했지만, 그것이 지체될 수 있음을 고려하여 편지를 통해 교훈을 전달합니다. 이 절은 디모데전서 전체의 목적 선언문과도 같은 기능을 합니다. 바울은 단지 교리나 교회 제도를 정리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집인 교회가 어떻게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디모데가 알게 하려는 마음에서 이 편지를 씁니다. 사도적 권위와 사랑이 함께 묻어난 절입니다.

 


15절 | 교회의 정체성과 역할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

 

바울은 교회를 ‘하나님의 집’이라 부르며, 하나님이 거하시는 살아 있는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합니다. 또한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로서, 복음의 진리를 지탱하고 세상 가운데 드러내는 책임 있는 공동체입니다. 이 표현은 교회가 단지 신앙 모임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거룩한 사명의 장소임을 선언합니다. 교회 구성원 모두는 이 정체성을 잊지 말아야 하며, ‘어떻게 행할지’를 아는 것이 곧 복음에 합당한 질서와 경건한 삶을 의미합니다.

 


16절 | 경건의 비밀, 예수 그리스도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

 

이 절은 신약 성경 전체 중에서도 가장 밀도 높은 기독론적 신앙 고백으로, 초기 교회에서 사용되던 찬송이나 신앙 고백문으로 여겨집니다.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는 성육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는 부활과 성령의 능력, ‘천사들에게 보이시고’는 영적 세계와의 교통, ‘만국에서 전파되시고’는 선교의 보편성,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는 구속의 실현,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는 승천과 주권을 나타냅니다.

이 모든 진술은 ‘경건의 비밀’, 즉 복음의 핵심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있음을 선포하며, 교회가 지켜야 할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4장 1절 | 성령의 경고- 믿음에서 떠날 자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은 사도적 직관이 아니라, 공적 계시와 예언의 확신에 근거한 말입니다. 바울은 말세에 일어날 배교의 흐름을 경고합니다. ‘믿음에서 떠난다’는 것은 단순한 약화가 아니라, 복음 자체를 거부하는 본질적인 이탈을 의미합니다.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은 이단 사상을 단지 사상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 실체의 공격으로 묘사합니다. 거짓 교훈은 단순한 논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를 대적하는 영적 전쟁의 일부임을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2절 | 거짓 교사의 실체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바울은 거짓 교사들의 내면 상태를 ‘화인 맞은 양심’으로 묘사합니다. 이는 영적으로 무감각해지고, 회개의 가능성조차 거부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외식과 거짓말은 그들의 외형과 실제의 괴리를 보여주며, 공동체를 속이는 파괴적 영향력을 말합니다. 지도자의 가장 큰 타락은 지식의 부족이 아니라, 양심이 무뎌지고 진리를 버리는 것입니다. 이는 현대 교회에도 여전히 유효한 경고입니다.

 


3절 | 거짓된 금욕주의의 경고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이 절은 초기 교회에 스며든 금욕주의적 이단, 즉 혼인과 음식에 대한 금지를 가르치는 교훈을 지적합니다. 이는 헬라 철학과 유대 율법주의가 혼합된 사상으로, 하나님의 창조를 부정하는 태도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은 본래 선하며, 믿는 자들은 그것을 감사함으로 받을 수 있음을 선언합니다. 이는 단지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창조신앙과 복음의 자유를 지키는 문제입니다.

 


4절 |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대한 긍정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창조물은 본래 모두 ‘선하다’는 선언은 창세기의 복음적 해석과 맞닿아 있습니다. 어떤 것도 그 자체로는 부정하거나 금지의 대상이 아닙니다. 단, 감사함으로 받는다는 신자의 태도가 그것을 거룩하게 만듭니다. 복음은 금지보다 감사의 삶, 억제보다 진리 안에서 누리는 자유를 가르칩니다.

 


5절 |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마지막 절은 성도의 삶을 구별되게 하는 두 요소인 하나님의 말씀기도를 제시합니다. 이는 단지 경건 생활의 수단이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인정하고 반응하는 방식입니다. 음식이나 결혼과 같은 일상의 영역조차도 말씀으로 조명되고, 기도로 감사할 때 거룩한 영역으로 회복됩니다. 경건은 특별한 일이 아니라, 말씀과 기도로 매일 살아내는 삶에서 시작된다는 것이 이 절의 핵심입니다.

 


📖 묵상

오늘도 바울은 단호하면서도 따뜻합니다. 그는 디모데에게 곧바로 달려가고 싶지만, 혹여 늦어질 것을 염려하여 이 편지를 남깁니다. 기다림 사이에 복음을 남기고, 부재 가운데 더 깊은 지혜를 전합니다. 그 마음을 따라 본문을 읽다 보면, 단순한 사도와 제자의 대화가 아니라, 교회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전해지는 듯합니다.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

이 한마디 앞에서 마음이 멈춰섭니다. 교회가 무엇인지에 대한, 복음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내 삶이 어디에 닿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말입니다. 교회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집. 살아 계신 하나님. 그분이 지금도 숨 쉬시는 곳, 그분의 마음이 머무는 자리. 우리는 그 자리를 떠받치고 있는 진리의 기둥이어야 한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누가 보지 않아도 무너뜨릴 수 없는 중심, 아무도 듣지 않아도 흔들리지 않는 진심. 그것이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힘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곧바로 경고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에서 떠날 것이고, 거짓된 영을 따를 것입니다. 그들은 외식하며 거짓을 말하고, 양심은 이미 화인을 맞았습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문득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내가 아직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혹시 양심은 조금씩 타협하고 있는 건 아닐까? 겉으로는 괜찮아 보여도, 내 내면은 복음의 무게를 줄이고 있지는 않을까?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은 선하다고 했습니다. 금하는 것이 거룩이 아니라, 감사함으로 받는 것이 거룩입니다. 혼인을 금하고, 음식을 금하는 금욕의 태도보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감사로 반응하는 삶이 더 복음에 합당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어쩌면 우리가 신앙을 무겁게 여길 때, 복음은 오히려 우리에게 더 단순하고 명확하게 다가옵니다.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지는 것—이 얼마나 분명하고 아름다운 진리인지요.

 

오늘 하루, 내 양심이 말씀 앞에서 깨어 있기를 원합니다. 복잡한 논리보다 진리의 기둥으로 서는 단순함을, 거창한 의로움보다 기도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일상의 거룩함을 구합니다. 복음은 나를 짓누르는 요구가 아니라, 나를 일으키는 선물임을 다시 고백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집 안에서 진리를 붙들며 살아가는 한 사람의 기둥이 되고 싶습니다. 세상이 무너져도, 그 기둥만은 흔들리지 않도록. 말씀과 기도로, 다시 서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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