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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Story】/[생명의 삶] 디모데전서ㅣ2025년

[생명의 삶] 디모데전서 1장 12절-20절 _ 2025. 7. 9(수)

by LogosLab Steward 2025. 7. 8.

❖ 이 자료는 개인적인 말씀 묵상과 연구를 바탕으로 [목회자의 설교 준비][성경을 더욱 깊이 알고자 하는 ], 그리고 [말씀묵상에 도움이 필요한 성도]를 돕기 위해 제작되었습니다. 본 자료의 모든 저작권은 작성자인 LogosLab Steward에게 있으며, 자유롭게 사용 및 참고하시되 출처를 밝혀주시고, [무단 복제 배포]를 합니다. 이 자료가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풍성하게 경험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 본문

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13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7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18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교훈으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19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20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탄에게 내준 것은 그들로 훈계를 받아 신성을 모독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 말씀

"은혜 위에 선 사람"

 

서론ㅣ“어떻게 우리가 여기에 서 있을 수 있는가”

 

어느 날 문득 제 마음 한구석을 건드리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나는 정말 복음을 말할 자격이 있는가? 나는 왜 이렇게 말씀 앞에서 자주 무너지고, 삶의 어떤 부분은 아직도 변화되지 않은 채 머물러 있는가?"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하지만, 때로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고, 내가 잘하고 있다는 평가에 집착하거나, 반대로 지쳐버릴 때도 많습니다. 그런 제 모습을 볼 때면 이런 생각이 밀려옵니다. “그래서 나는 과연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어도 되는 사람일까?”

 

이 질문은 단지 저만의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보고 계시는 여러분도, 삶의 어떤 지점에서 같은 질문을 마주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실패와 죄의 기억은 우리의 마음에 깊은 흔적을 남깁니다. 그것이 반복되면, 은혜를 말하는 것조차 조심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점점 작아지고, 무력해지고, 죄의 무게에 눌려 한 걸음도 내딛기 어려운 순간을 맞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사도 바울은 오늘 한마디로 답해줍니다. “나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지만… 도리어 긍휼을 입었다"(13절) 그는 스스로를 ‘죄인 중에 괴수’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런 그가 지금 사도로, 복음을 전하는 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긍휼히 여겨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고백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요. 하나님은 자격을 따지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망가진 자, 실패한 자, 자책하는 자를 찾아와 그 위에 은혜를 입히시고, 다시 세우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세운 자들을 통해 또 다른 누군가를 살리십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너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느냐?”

그리고 동시에 답을 줍니다.

“너는 은혜 위에 서 있다.”

바울이 그랬듯, 우리도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본론ㅣ은혜의 자리에서 싸우라

 

1. 은혜는 과거를 덮지 않고, 회복의 이야기가 되다. (12-14절)

 

12절부터 바울은 자신의 과거를 담담히 이야기합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12절)

여기서 주어는 바울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바울은 스스로 이 직분을 얻은 것이 아니라, 주께서 자신을 충성되이 여겨 맡기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과거에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습니다. 즉, 말로 예수님을 조롱하고, 실제로 믿는 자들을 해치며, 폭력으로 진리를 대적한 자였습니다. 이런 자에게 복음을 맡긴다는 것은 인간의 눈으로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결정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의 논리와 자격 위에 세워지지 않습니다. 복음은 ‘긍휼’에서 시작됩니다. 13절에서 바울은 “도리어 긍휼을 입었다”고 말합니다. ‘도리어’라는 접속사는 은혜의 반전을 상징합니다. 과거가 바뀌지 않았는데도, 미래가 달라지는 은혜의 반전. 하나님은 이러한 방법으로 일하십니다.

 

더 놀라운 건, 이 긍휼이 단지 죄를 덮고 무마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하나님의 은혜는 넘치도록 풍성했습니다. ‘그냥 살게 해주신 것’이 아니라, 믿음과 사랑까지 더하셨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다시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눈이요, 사랑은 과거의 상처에도 불구하고 타인을 품게 해주는 손입니다.

 

바울은 과거를 기억했습니다. 그러나 그 과거가 그의 발목을 잡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오히려 그 기억을 디딤돌 삼아, 은혜를 더 깊이 깨달았고, 그 은혜를 말할 때마다 자신이 받은 용서와 부르심을 증언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지 않으신가요? 우리 각자에게도 ‘숨기고 싶은 과거’가 있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가슴 깊은 곳에서 여전히 상처로 남아 있는 이야기들. 그러나 오늘 바울이 말합니다.

“그것은 은혜의 배경입니다. 회복의 무대입니다.”

하나님은 과거를 지우시는 분이 아니라, 그 위에 새로운 이야기를 쓰시는 분이십니다.

 

 

2. 죄인 중 괴수였던 바울, 은혜의 본이 되다. (15-17절)

 

15절은 바울이 전하고자 했던 복음의 진수를 담고 있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이 말씀은 초대교회 안에서 자주 고백되던 신앙 선언입니다. ‘미쁘다’는 말은 ‘신실하다, 확실하다’는 뜻으로, 이 말이 진리임을 선언합니다. 복음은 단순한 종교적 가르침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세상에 오셨다는 사건입니다.

 

바울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이 고백은 바울의 진심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어두운 자리에 있었는지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자들을 잡아들이고, 고문하고, 죽이는 일에 앞장섰던 과거, 그 모든 기억이 바울에게는 씻을 수 없는 흔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가 그 과거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꺼내어 말하는 이유는, 바로 그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16절은 그 목적을 분명히 밝힙니다.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은 본이 되기 위해 선택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긍휼을 입었고, 그 긍휼이 다른 사람들에게 본이 되도록 사용된 것입니다. 즉, 복음을 전하는 자는 자신의 자격이나 실력으로 서 있는 사람이 아니라, 은혜 받은 자의 삶을 통해 복음의 가능성을 증언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말로 복음을 전하기 전에, 삶으로 그 복음이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나도 은혜 입은 사람이야.”

“나도 망가졌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살아 있어.”

이 고백이 우리 안에 진심으로 있다면, 우리는 누군가의 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고백은 찬송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17절은 예배의 절정입니다.

“영원하신 왕,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토록 있을지어다.”

복음의 진리를 말하고, 그 은혜를 경험한 자는 결국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복음은 나를 높이지 않습니다. 복음은 언제나 하나님을 높입니다. 그분만이 왕이시며, 홀로 영광받으실 분이십니다.

 

 

3) 선한 싸움을 위하여 믿음과 양심을 붙들라 (18-20절)

 

18절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매우 중요한 부탁을 전합니다.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교훈으로 명하노니…”

여기서 ‘교훈’이라는 단어는 단순한 가르침이 아니라, 명령에 가까운 권면입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아들’이라 부르며, 아버지가 자식에게 유언을 남기듯 진심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부탁하는 것은 단순합니다.

‘선한 싸움을 싸우라.’

 

‘선한 싸움’이라는 표현은 신앙 생활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는 말입니다. 믿음은 단순히 편안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우리의 죄성과 싸워야 하고, 세상의 가치관과 충돌해야 하며, 진리를 지키기 위해 오해를 감수해야 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싸움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을 선한 싸움이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이 싸움의 목적은 생명을 세우는 것이고, 이 싸움은 결국 사랑과 진리의 승리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싸움은 혼자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두 가지 무기를 강조합니다. 바로 믿음과 선한 양심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입니다. 세상이 흔들려도, 감정이 무너져도, 상황이 어두워도 ‘하나님이 여전히 선하시다’는 고백을 놓치지 않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양심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안을 지키는 자물쇠입니다. 다른 사람이 몰라도, 나 자신은 아는 죄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는 마음, 그 마음을 지키는 것이 바로 ‘선한 양심’입니다.

 

바울은 19절에서 이 양심을 버린 자들이 어떤 결과를 맞이했는지를 말합니다.

“그중에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탄에게 내어준 것은…”

이 말은 무섭지만, 바울의 깊은 목회적 사랑이 담긴 말이기도 합니다. 그들을 정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다시 돌이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들을 하나님 앞에 맡긴 것입니다. 때로는 단호한 절단이 회복을 위한 마지막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얼마나 자주 이 싸움에서 지쳐합니까? 믿음을 말하지만, 양심은 무뎌지고 양심을 말하지만, 믿음은 흔들리는 이 모순 속에 우리는 매일 넘어지고 또 일어섭니다. 그러나 오늘 바울은 말합니다. “이 싸움은 선한 싸움이다. 지치더라도, 포기하지 말아라. 믿음을 붙들고, 양심을 지켜라. 그 싸움이 너를 지킬 것이고, 결국 그 싸움이 다른 사람을 살릴 것이다.”

 

목회자, 장로, 권사, 집사, 성도든 우리는 모두 이 싸움에 부름받은 자들입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믿음과 양심이 살아 있다면 우리는 오늘도 이 싸움을 싸울 수 있습니다.

 

 

 

결론ㅣ은혜 위에 다시 서는 사람들

 

바울의 고백은 시작부터 끝까지 은혜의 고백입니다. 그는 복음을 말하면서, 그 복음을 자기 삶으로 입증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너희도 은혜 위에 선 사람이다.”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다시 질문하게 됩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실패 위에? 과거의 죄책감 위에? 사람들의 평가 위에? 아니면 정말 하나님의 은혜 위에 서 있는가?

 

‘은혜 위에 선 사람’은 자신의 과거에 눌리지 않습니다. 실수를 숨기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회복을 증언합니다. ‘은혜 위에 선 사람’은 누군가의 본이 됩니다. 완벽해서가 아니라, 용서받은 사람으로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은혜 위에 선 사람’은 믿음과 양심을 지키기 위해 오늘도 싸우는 사람입니다.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주님을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그 은혜의 흔적을 다시 발견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셨고, 나를 사용하셨고, 지금도 내 안에 선한 싸움을 허락하신다는 그 은혜의 흔적.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이 자리에서 다시 고백합시다. “나는 은혜 위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결단합시다. “나는 오늘도, 이 싸움을 싸우겠습니다. 믿음을 지키고, 양심을 따르며, 다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겠습니다.”

 

그 고백을 붙든 자들에게 하나님은 다시 사명의 길을 여실 것입니다. 바울처럼, 디모데처럼, 그리고 우리처럼. 은혜는 끝이 아닙니다. 은혜는 언제나 다시 시작하는 자리입니다.


[1장 12-20절 본문 연구 및 주석]

📖 본문 배경

 

❖ 개요

 

디모데전서 1장 12–20절은 바울이 개인적인 회심의 간증과 복음의 핵심을 통해 디모데에게 신앙의 본을 보이는 장면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하나님의 긍휼로 구원받았음을 고백하며, 이 복음이 모든 죄인을 위한 것이고 자신은 그 중 ‘괴수’였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맡겨진 사도직이 은혜라는 사실을 감사함으로 고백하며, 이를 통해 모든 믿는 자들이 소망을 품게 되기를 원합니다. 이 고백은 단지 바울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교회를 세우고 이끌어가는 디모데에게 복음의 본질과 사역의 방향을 재확인시켜주는 메시지입니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디모데에게 “선한 싸움을 싸우라”는 명령과 함께, 믿음과 선한 양심을 지키는 것이 목회자로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합니다. 후메내오와 알렉산더의 예를 통해, 믿음을 저버릴 경우 어떤 심각한 결과가 따르는지를 경고하며, 디모데가 복음 사역에서 흔들리지 않기를 당부합니다.


 

❖ 역사적 배경

 

바울은 디모데전서를 로마 투옥 이후 풀려난 시기에 기록한 것으로 보이며, 당시 그는 마게도냐 지방에 있었고, 디모데는 에베소 교회의 목회를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에베소는 바울이 3차 선교여행 때 3년간 사역했던 지역으로(행 19:1–20:1), 복음 전파의 중요한 중심지였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교회 내에는 다시 거짓 교사들이 들어와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유대계 율법주의자들과 그리스 철학과 신화의 영향을 받은 자들로서, 율법을 오해하고 ‘교훈’이 아닌 ‘논쟁’을 일으키며, 참된 복음을 흐리게 만들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믿음 안에서 참 아들’이라 부르며, 이 혼탁한 상황 속에서 바른 복음의 정통을 지키고, 사도로서 자신이 받은 소명을 기억하며 복음의 본질을 붙들도록 권면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바울은 자신의 과거와 회심을 예로 들며, 하나님의 자비와 복음의 능력을 다시 강조하고자 했습니다.


 

❖ 문화적 배경

 

에베소는 당대 로마 제국 내에서도 문화·종교적으로 매우 복합적인 도시였습니다. 아르테미스 신전이 있는 이 도시는 상업과 종교, 철학과 정치가 얽힌 곳이었으며, 유대인의 회당도 함께 존재하던 지역입니다. 이런 다원적 문화는 교회 안에도 혼합주의의 문제를 야기했으며, 철학적 사변, 신화적 전통, 유대 율법주의가 교회 지도자들 안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교회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자질로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강조하며, 복음을 단지 지식으로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을 넘어, 삶의 실제로 살아내야 할 책임을 강조합니다. 바울이 말한 ‘파선’은 단지 교리를 잃은 것이 아니라, 복음의 능력에서 멀어진 영적 추락을 의미합니다. 교회가 세상의 논리와 문화에 무분별하게 물들면, 결국 사명과 정체성을 잃게 된다는 경고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 신학적 배경

 

이 본문은 복음의 본질과 은혜의 절정이 무엇인지를 신학적으로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바울은 자신의 회심 이야기를 통해 죄인의 구원은 인간의 자격이 아닌, 오직 그리스도의 긍휼과 오래 참으심 때문임을 선포합니다(16절).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는 고백은 단지 겸손의 표현이 아니라, 은혜의 깊이를 체험한 자의 간증입니다. 또한 바울은 복음이 단지 개인의 회복이 아닌, 다른 이들을 위한 ‘본’이 되는 삶으로 이어져야 함을 강조합니다. 이는 디모데와 같은 젊은 사역자들에게 복음 사역의 모범이 되도록 초대하는 바울의 목회 신학이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17절에서 바울은 찬송의 형태로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선포하며, 복음은 단지 인간의 구원 사건에 그치지 않고, 영원하신 하나님께 모든 존귀와 영광을 돌리는 하나님 중심의 신학임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선한 싸움과 믿음의 파선에 대한 언급은, 목회적 신학이 단지 이론에 그치지 않고 치열한 영적 실천임을 보여줍니다. 바른 교훈은 반드시 삶과 인격, 사역에 실현되어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결국 복음 자체가 훼손된다는 깊은 신학적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 본문 요약

❖ 단락 구분

 

12–14절 | 바울의 회심과 감사의 고백

바울은 자신이 과거에 복음의 적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신을 충성되이 여겨 사도로 세우셨음을 감사함으로 고백합니다. 그의 과거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지만, 무지 중에 행한 일로 인해 긍휼을 입었으며, 그 위에 믿음과 사랑이 더해진 은혜를 풍성히 받았다고 증언합니다.

 

15–17절 | 복음의 핵심과 바울의 간증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는 진리를 모든 사람이 받아들여야 할 복음의 핵심으로 선포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 죄인 중 괴수였다는 고백을 통해 하나님의 긍휼이 얼마나 크신지를 드러냅니다.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오래 참으신 것은 장차 믿고 영생을 얻을 자들에게 본을 보이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모든 은혜에 대한 고백은 영원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찬송으로 이어집니다.

 

18–20절 | 디모데에 대한 명령과 경고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전에 받은 예언을 기억하며 그 믿음 위에서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명령합니다. 그 싸움은 단지 외부의 적에 대한 것이 아니라, 믿음과 선한 양심을 지키는 내적 영적 싸움입니다. 믿음과 양심을 버린 자들은 결국 믿음의 파선에 이르게 되었으며, 그 예로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언급됩니다. 그들은 신성을 모독한 죄로 인해 사탄에게 내어졌으며, 이를 통해 교훈을 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 내용 요약

 

디모데전서 1장 12–20절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바른 교훈을 전수하는 가운데, 자신의 과거와 회심을 예로 들어 복음의 능력과 하나님의 긍휼을 증언하는 부분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이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주어진 것임을 고백하며, 이 은혜가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했음을 강조합니다(12–14절). 이어서 그는 모든 사람이 받아야 할 복음의 핵심, 즉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며, 자신이 그 죄인 중에서도 가장 앞선 자였음을 고백합니다. 이는 단지 개인적 감정이 아닌, 장차 믿고 구원 얻을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점에서, 회심의 간증은 곧 복음의 드라마가 됩니다(15–16절). 이 고백은 영원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으로 연결되며, 바울의 사역이 인간 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임을 선명히 드러냅니다(17절).

 

마지막으로, 바울은 디모데에게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권면하며, 그 싸움의 무기는 ‘믿음과 착한 양심’임을 강조합니다(18–19절). 이는 목회자의 내면적 성결과 분별이 공동체를 살리는 핵심임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려 신앙이 파선되었고, 바울은 그 대표적 인물로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를 언급하며, 그들이 교훈을 받도록 사탄에게 내주었다고 밝힙니다(20절). 이는 교회 공동체의 건강을 위해 반드시 지켜야 할 기준이 ‘믿음’과 ‘양심’이라는 사실을 무겁게 경고하는 대목입니다.

 

디모데전서 1장 12–20절은 복음의 정수가 무엇인지, 그 복음이 어떻게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 복음을 위하여 살아가는 이들의 싸움과 태도를 교훈하는 본문입니다. 복음은 누군가에게 맡겨지는 책임이며, 그 책임은 단지 지식이나 직분이 아닌, 믿음과 양심으로 지켜야 할 영적 소명입니다.


📖 붙잡는 말씀

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이 구절은 바울의 회심 고백이자, 복음의 정수입니다. “미쁘다”는 말로 시작되는 이 선언은, 초대교회 안에서 ‘믿을 만한 말씀’, 즉 성도들이 함께 고백하고 붙들었던 신앙의 핵심 진리를 담고 있는 전례적 표현입니다. 바울은 그 중심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오셨다”는 복음의 진리를 두고, 그것이 ‘모든 사람이 받아들여야 할’ 메시지임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이 고백에서 더 놀라운 것은 바울의 개인적 덧붙임입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이는 단순한 자기비하가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이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던 과거를 기억하며, 그가 복음을 깨닫기 전 얼마나 철저히 하나님의 원수였는지를 직면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는 복음을 설명할 때, ‘죄’라는 현실을 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의 깊이를 정확히 직면함으로써 은혜의 깊이를 증언합니다.

 

이 구절을 붙들며 묵상할 때, 저는 제 삶 속에서 얼마나 쉽게 자기 의로 복음을 가리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주님의 은혜를 말하면서도, 스스로 괜찮은 사람처럼 행동할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요. 하지만 복음은 괜찮은 사람을 더 좋게 만드는 게 아니라, 가장 망가진 사람을 완전히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이 고백은 우리 모두가 드릴 수 있어야 할 은혜의 고백입니다. 그래야만 복음이 진짜 복음으로 다가오고,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내 삶의 이야기로 녹아들게 됩니다. 나 같은 자를 위하여 주께서 오셨다는 이 사실이, 오늘도 제 심령을 무릎 꿇게 합니다.


📖 단어 연구

❖ 충성되이 여기다 (πιστός / 피스토스)

 

✦ 뜻과 의미

헬라어 πιστός(피스토스)는 ‘믿을 만한, 신실한, 충성된’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는 타인의 신뢰를 받을 만한 성품이나 태도를 가리키며, 때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지칭하기도 합니다. 단어의 어근은 πείθω(페이소)로 ‘설득하다, 확신시키다’에서 유래하며, 누군가가 신뢰를 받을 만한 상태로 서 있다는 함의를 포함합니다.

 

✦ 본문에서의 의미

12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충성되이 여김을 받았다’고 고백합니다. 이는 바울이 충성스러워서 사명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바울을 ‘믿을 만한 자’로 여겨주셨다는 수동적 의미를 내포합니다. 예수님의 전적인 신뢰와 위임이 사도직의 기초였다는 고백입니다.

 

✦ 신학적 의미

신약 전체에서 ‘피스토스’는 인간의 믿음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모두 표현할 때 사용됩니다. 이 단어는 복음 사역에서의 위임, 사역자의 자격, 하나님과의 신뢰 관계를 설명하는 데 핵심적입니다. 특히 바울처럼 과거가 악했던 자가 하나님의 은혜로 ‘충성된 자’로 인정받았다는 것은 복음의 회복성과 위임의 능력을 드러내며, 은혜로 부름받은 모든 성도가 동일한 사명에 동참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 긍휼 (ἔλεος / 엘레오스)

 

✦ 뜻과 의미

헬라어 ἔλεος(엘레오스)는 ‘자비, 긍휼, 불쌍히 여김’이라는 뜻으로, 누군가의 비참한 상태를 보고 그를 향해 느끼는 극률한 마음과 실제적인 도움의 행위를 포함합니다. 이는 단순한 동정심이 아니라, 행동으로 옮겨지는 불쌍히 여기는 사랑입니다.

 

✦ 본문에서의 의미

13절과 16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긍휼을 입었다’고 고백합니다. 과거에 자신이 복음을 대적하던 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무지 중에 행한 일로 인해 하나님께서 그를 불쌍히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그 긍휼은 그리스도의 오래 참으심과 함께 나타났으며, 다른 죄인들에게 본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 신학적 의미

‘엘레오스’는 신약에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핵심 감정으로 자주 등장합니다(엡 2:4, 히 4:16). 긍휼은 단지 죄를 덮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다시 일으켜 새 삶을 살도록 이끄는 회복의 힘입니다. 바울의 경우처럼 긍휼은 회심의 기초이며, 구원의 첫 걸음입니다. 교회와 성도 역시 긍휼을 입은 자로서, 타인을 긍휼히 여기는 삶을 살아야 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 괴수 (πρῶτος / 프로토스)

 

✦ 뜻과 의미

헬라어 πρῶτος(프로토스)는 ‘첫째, 으뜸, 최고’라는 뜻으로, 순서나 위치에서 가장 앞서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에서는 때로 명예로운 우선순위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부정적인 의미로 ‘죄인 중 으뜸’처럼 극단적인 상태를 표현할 때도 사용됩니다.

 

✦ 본문에서의 의미

15절에서 바울은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고백합니다. 이는 자신이 단지 죄인 중 하나라는 수준을 넘어, 죄인 중에서 가장 앞선 자, 즉 가장 심각한 자였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고백입니다.

 

✦ 신학적 의미

‘프로토스’는 인간의 상태를 비교하거나 자격을 평가하는 용어가 아닙니다. 오히려 은혜의 깊이를 드러내기 위한 문맥적 표현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가장 심각한 죄인이었기에, 자신에게 임한 은혜야말로 복음의 증거라고 고백합니다. 이는 ‘구원받은 자의 겸손한 정체성’이며, 모든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복음 중심의 자기 인식입니다.

 


❖ 오래 참으심 (μακροθυμία / 마크로쥐미아)

 

✦ 뜻과 의미

헬라어 μακροθυμία(마크로쥐미아)는 ‘오랫동안 분노하지 않음’, 곧 ‘오래 참음, 인내, 관용’을 의미합니다. 이는 상대방의 잘못과 불완전함을 감내하고 기다려주는 태도를 말하며, 하나님의 성품 중 하나로 자주 언급됩니다.

 

✦ 본문에서의 의미

16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회심을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오래 참으심’은 단순히 시간을 끈 인내가 아니라, 죄인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기다리시며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놀라운 성품을 드러냅니다.

 

✦ 신학적 의미

‘마크로쥐미아’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서 핵심적 개념입니다(롬 2:4, 벧후 3:9). 하나님은 진노보다 인내로 역사하시며, 회개하기까지 죄인을 기다리십니다. 바울의 고백은 구원이 인간의 노력이나 자격이 아니라,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긍휼에 의해 이루어진 것임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이는 교회가 복음을 전할 때 마땅히 품어야 할 태도이기도 합니다.

 


❖ 파선하다 (ναυαγέω / 나오게오)

 

✦ 뜻과 의미

헬라어 ναυαγέω(나오게오)는 ‘난파하다, 배가 부서지다’라는 뜻으로, 물리적으로는 배가 침몰하는 것을 가리키지만, 신약에서는 종종 영적 상태의 파멸을 은유적으로 표현할 때 사용됩니다.

 

✦ 본문에서의 의미

19절에서 바울은 어떤 이들이 ‘양심을 버리고 그 믿음에 관하여 파선하였다’고 말합니다. 이는 믿음의 길에서 완전히 길을 잃고 파괴적인 결과에 이른 상태를 의미합니다. 구원 자체를 잃는다는 뜻보다는, 신앙생활이 무너지고 사역의 길이 멈춰지는 비극적 결과를 경고하는 표현입니다.

 

✦ 신학적 의미

‘나오게오’는 신약에서 오직 두 차례(딤전 1:19, 고후 11:25) 사용되며, 고통스럽고 되돌릴 수 없는 실패의 이미지를 갖습니다.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단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삶과 양심, 인격 전체가 하나님 앞에서 유지되어야 함을 뜻합니다. 교회와 성도는 이 ‘파선’의 경고를 늘 기억하며, 믿음과 양심의 조타수를 놓지 않아야 합니다. 이는 목회자뿐 아니라 모든 성도가 붙들어야 할 성숙의 길입니다.

 


📖 절별 주해

12절 | 은혜로 맡겨진 사명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바울은 자신이 사도로서 복음의 사역을 감당하게 된 것이 전적인 주님의 능력과 은혜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과거의 이력으로는 도저히 자격이 없던 자신에게 직분을 맡기신 그리스도 예수께 감사하는 표현입니다. 여기서 “능하게 하신”은 단순한 체력적 힘이 아니라, 복음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내적 능력과 영적 권위를 부여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충성되이 여겨”라는 표현은 바울이 본래 충성스러웠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를 믿어주셨다는 은혜의 선포입니다. 이 말씀은 모든 사역자와 성도에게 부르심과 직분이 은혜임을 상기시켜 줍니다.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긍휼로 택하셨기 때문이며, 그 부르심은 언제나 감사로 반응해야 할 사명입니다.

 

 

13절 | 과거의 어둠, 은혜의 배경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바울은 자신의 과거를 숨기지 않고 드러냅니다. 복음과 교회를 비방하고, 박해하고, 물리적으로 해를 끼치던 자였다고 고백합니다. 세 단어 모두 바울이 스데반의 순교에 동의하고, 초대교회를 잔인하게 핍박하던 시절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이라는 표현에서 복음의 반전이 시작됩니다. 긍휼은 잘해서 주어진 보상이 아니라, 알지 못하고 저질렀던 무지 속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로운 개입입니다. 바울은 자기의 회심을 통해 어떤 죄인이라도 하나님의 긍휼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증언합니다. 이는 복음을 처음 듣는 자뿐 아니라, 과거의 죄에 사로잡혀 괴로워하는 이들에게도 희망이 되는 고백입니다.

 


14절 | 넘치는 은혜와 복음의 능력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베푸신 긍휼은 단지 죄를 덮어주는 차원이 아니라, 넘치도록 풍성한 은혜로 나타났습니다. 여기서 “믿음과 사랑과 함께”라는 구절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바울의 삶에 실제로 일어난 내적 변화의 요소들입니다. 복음은 단지 죄를 사함받는 시작점이 아니라, 믿음으로 새롭게 살게 하고, 사랑으로 열매를 맺게 합니다. 바울은 그 은혜를 ‘넘치도록 풍성하다’고 표현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상상하거나 요청한 범위를 훨씬 초과하는 것임을 증언합니다. 이는 단지 사도 바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믿는 모든 성도에게 주어지는 축복입니다.

 


15절 | 복음의 핵심 선언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이 절은 디모데전서 전체를 통틀어 가장 중심적인 구절 중 하나로, 초대교회에서 전통적으로 회중이 함께 고백하던 ‘신앙 고백문’의 형태를 따릅니다. “미쁘다”는 헬라어 πιστός는 ‘신실하고 확실한’이라는 뜻으로, 이 고백이 모든 믿는 이들이 받아들여야 할 진리임을 선포합니다. 복음의 본질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 구원은 전적인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진리를 설명하면서도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함으로써, 복음의 은혜가 어떤 자에게도 미칠 수 있음을 증거합니다. 이는 모든 성도가 자신의 구원을 대할 때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신앙의 모범입니다.

 


16절 | 본이 되는 구원의 증거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의 회심은 단지 개인적 사건이 아니라, 복음의 능력을 증명하고, 이후 수많은 사람들에게 구원의 모델이 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표현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입니다. 주님은 바울의 죄와 무지 앞에서 진노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회심을 통해, 장차 복음을 믿고 영생을 얻을 모든 자들에게 소망의 본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는 복음이 시간 속에서 개인에게 임하고, 또 다른 이들에게 증거되는 유기적인 성격을 가진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구원받은 자의 삶은 곧 다음 사람을 위한 복음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는 교회의 선교적 사명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17절 | 영원한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이 찬송은 바울의 구원 고백이 단지 감정적인 반응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신학적 고백으로 이어짐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왕”이시며, 썩지 않으시는 불멸의 존재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이시며, 절대 유일하신 분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회심과 사명, 그리고 구원이라는 전 과정을 통해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져야 함을 강조합니다. 이는 복음의 주체가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심을 선포하는 구절로, 디모데에게 주는 모든 교훈과 사명의 궁극적인 방향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어야 함을 밝히는 선언입니다.

 


18절 | 선한 싸움의 명령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교훈으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바울은 다시 한 번 디모데를 ‘아들’이라 부르며 깊은 사랑과 권위를 담아 교훈합니다. ‘이 교훈’은 앞서 말한 복음의 진리를 포함하는 전체 가르침을 의미하며, ‘명하노니’라는 표현은 단순한 조언이 아닌 사도적 명령입니다. ‘예언’은 디모데가 공적으로 사역을 위임받을 때 공동체가 받은 말씀이나 영적 선포를 가리키며, 이는 디모데가 자신의 소명을 잊지 않도록 하는 중요한 근거입니다. ‘선한 싸움’은 단순한 논쟁이나 세속과의 갈등이 아니라, 복음을 지키고 거짓 교훈과 싸우는 영적 전쟁을 말합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도 복음 안에서 싸워야 할 싸움이 있음을 일깨우며, 그 싸움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부르심이 있음을 강조합니다.

 


19절 | 믿음과 양심을 지켜야 할 이유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바울은 디모데에게 복음 사역을 위한 두 가지 중요한 내적 자산을 제시합니다. 첫째는 ‘믿음’이며, 이는 단지 구원받는 믿음을 넘어, 복음의 진리를 지속적으로 붙들고 신뢰하는 영적 토대입니다. 둘째는 ‘착한 양심’인데, 이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정직하게 자신을 비추고 회개하며 살아가는 내면의 성결을 뜻합니다. 이 둘은 반드시 함께 가야 하며, 어느 하나가 무너지면 신앙 전체가 파선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 둘 중 ‘양심’을 먼저 버리면 결국 믿음이 무너지게 된다고 경고합니다. 이는 복음을 아는 지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그 진리를 따라 살아내는 도덕성과 영적 민감함이 반드시 함께 가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20절 | 경고로 제시된 이름들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탄에게 내준 것은 그들로 훈계를 받아 신성을 모독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마지막으로 바울은 믿음과 양심을 저버린 대표적 인물로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를 언급합니다. 이들은 아마도 에베소 교회 안에서 거짓 교훈을 퍼뜨리고 공동체를 해쳤던 자들로 보이며, 바울은 그들을 ‘사탄에게 내주었다’고 표현합니다. 이는 단지 파문 이상의 의미로, 교회 공동체의 보호와 그들 자신의 회개를 위해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두었다는 뜻입니다. ‘훈계를 받게 하려 함’이라는 표현은 최종적 멸망보다는 회복의 가능성을 열어둔 징계의 의미입니다. 이 절은 복음 사역에서의 분별과 영적 권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며, 교회는 때로 사랑 안에서 엄중한 조치를 취해야 할 책임이 있음을 말합니다.


📖 묵상

오늘 본문 속 바울의 고백은 눈물로 써내려간 복음의 이야기입니다. 복음이 사람의 삶을 어떻게 바꾸는지를 증언하는 살아 있는 설교입니다. 그는 자신을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라 고백합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과거, 복음을 짓밟고 사람들을 해쳤던 시간들. 그러나 그 시간 위에 하나님의 긍휼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런 자신의 과거를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어두운 기억들을 고백의 자리로 끌어올립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이 한 문장은 단지 바울의 과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깊은지를 드러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받은 긍휼과 용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와 마주한 후에야 진짜 의미를 가집니다. 그래서 바울은 부끄러움 속에서 은혜를 노래합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아니었다면, 자신은 여전히 파괴자였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지금, 디모데에게 이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에게 건네는 ‘선한 싸움’이라는 말도 단호하지만 애틋합니다. 바울은 알고 있었겠지요. 이 싸움이 얼마나 외롭고도 치열한지를. 외적으로는 거짓 교훈을 분별하고 교회를 지키는 일이겠지만, 내적으로는 믿음과 착한 양심을 지키는 일입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자기 마음의 순전함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은 때때로 타협을 요구하고, 사람들의 말은 예리한 칼처럼 양심을 찌르기도 합니다. 그럴 때 믿음을 붙든다는 건 단순한 확신이 아니라, 상처 입은 심령으로도 하나님 앞에 머무는 용기입니다.

 

하지만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는 양심을 버렸습니다. 믿음의 길에서 결국 방향을 잃고 파선했습니다. 믿음을 무너뜨리는 건 언제나 외부의 공격이 아니라, 내부의 무너짐에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양심’을 말합니다. 그것은 복음을 지키는 성벽이자, 은혜를 지켜내는 마지막 고지입니다.

 

오늘 우리도 같은 싸움을 싸우고 있습니다.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아무도 모를 수 있는 고요한 영혼의 전쟁터에서 말입니다. 기도가 흐려질 때, 말씀이 들리지 않을 때, 유혹과 자책이 밀려올 때, 우리는 무엇으로 그 자리를 지켜낼 수 있을까요?

 

바울의 고백이 그 대답이 됩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께 내가 감사하노니.”

복음은 나를 완전하게 만들기 이전에, 나를 있는 그대로 끌어안아 주시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그 은혜 위에 서 있습니다.
흔들릴지라도 무너지지 않도록, 끝까지 붙드시는 주님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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