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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Story】/[생명의 삶] 디모데전서ㅣ2025년

[생명의 삶] 디모데전서 6장 1절-10절 _ 2025. 7. 16(수)

by LogosLab Steward 2025. 7. 16.

❖ 이 자료는 개인적인 말씀 묵상과 연구를 바탕으로 [목회자의 설교 준비][성경을 더욱 깊이 알고자 하는 ], 그리고 [말씀묵상에 도움이 필요한 성도]를 돕기 위해 제작되었습니다. 본 자료의 모든 저작권은 작성자인 LogosLab Steward에게 있으며, 자유롭게 사용 및 참고하시되 출처를 밝혀주시고, [무단 복제 배포]를 합니다. 이 자료가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풍성하게 경험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 본문

1 무릇 멍에 아래에 있는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2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그 상전을 형제라고 가볍게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게 하라 이는 유익을 받는 자들이 믿는 자요 사랑을 받는 자임이라 너는 이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 
3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4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5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6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7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9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 말씀

"그리스도인의 자족"

 

서론 | 탐욕의 시대, 자족을 묻다

 

우리는 오늘날 역사상 가장 많은 것을 소유하고 누릴 수 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휴대폰 하나로 세계를 연결하고, 클릭 한 번이면 물건이 집 앞에 도착하며, 수많은 정보가 손끝에서 쏟아집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얼굴엔 만족보다는 불안이, 기쁨보다는 피로가 더 가득합니다. 모든 것이 풍요로운데도 우리는 이상할 정도로 늘 목말라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목마름은 단지 외적인 조건의 문제가 아니라, 내면의 결핍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런 시대 속에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나는 정말 만족하며 살고 있는가?”, “나는 왜 끊임없이 더 많은 것을 원하고 있는가?”, “내가 원하는 것은 진정 필요한 것인가, 아니면 단지 남들과 비교해서 결핍이라 여긴 것인가?” 이런 질문들 앞에서 우리는 자주 답을 피하거나, 바쁘다는 이유로 덮어두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회피가 우리를 더 무겁게 만들고, 더 피곤하게 만듭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전혀 다른 방식의 인생 해석을 제시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딤전 6:6). 이 한 구절은 시대의 논리를 완전히 거스르는 역설입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더 벌어야 한다”, “더 올라가야 한다”, “더 많이 가져야 한다.” 그러나 바울은 말합니다. “지금 있는 것으로 만족하라”, “더 가지려는 마음보다 더 하나님을 신뢰하라.”

 

그것도 놀랍게도, 이 메시지를 그는 자유인들에게가 아니라 노예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었던 자가 아니라, 아무것도 소유할 수 없던 자들에게 말입니다. 바울은 단지 현실을 체념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 현실 속에서 복음 안에서 자족하라고, 하나님이 주신 것 안에서 진정한 경건의 이익을 누리라고 외칩니다.

 

이 설교에서 우리는 바울이 보여주는 세 가지 삶의 태도를 묵상해 보려 합니다. 복음을 잊은 자, 복음을 이용하는 자, 그리고 복음으로 살아가는 자. 이 세 갈래의 인생 가운데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 그리고 나는 지금, 무엇으로 만족하고 있는가? 세상의 시끄러운 가치관을 잠시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마음을 비추어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본론 | 복음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어디에 있나

 

1. 복음을 잊은 자 – 관계를 무너뜨리는 무례함

 

본문 1–2절에서 바울은 매우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상황을 다룹니다. 그는 ‘멍에 아래에 있는 종들’, 즉 당시 로마 제국 사회 구조 안에서 노예 신분으로 살아가던 그리스도인들에게 권면합니다.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라.” 당시 노예는 인격이 아니라 재산으로 취급되었고, 기본적인 권리도, 자유도 보장되지 않은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에게 그 억압적 현실을 벗어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구조 안에서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이 모독받지 않도록 삶의 태도를 바로하라고 명합니다.

 

이 말씀은 굉장히 급진적이면서도 역설적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형제요 자유인이라고 가르친 복음이, 오히려 노예들에게 기존의 질서 속에서 순종하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의도는 현실 질서를 인정하거나 순응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복음의 본질과 영광이 드러나도록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외적인 자유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복음을 위한 삶의 자세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는 더 이상 고대 로마의 노예 제도 안에 살고 있지는 않지만, 다른 형태의 구조적 ‘멍에’ 아래 살아가고 있습니다. 직장 내에서의 수직적 관계, 경제적 제약, 사회의 편견과 차별, 문화적 억압 등 현대의 그리스도인들도 여전히 제한된 현실 속에서 신앙을 살아내야 하는 도전 앞에 서 있습니다. 그 상황에서 바울은 오늘도 동일하게 우리에게 말합니다. “네가 속한 자리에서 복음의 이름이 욕되지 않도록 살아가라.”

 

본문 2절은 특별히 믿는 주인을 둔 종들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형제라 하여 가볍게 대하지 말고 오히려 더욱 잘 섬기라고 합니다. 이는 공동체 내 신앙의 평등성이 외적인 무례함으로 왜곡될 수 있는 위험을 경계하는 말씀입니다. 믿는 자는 존중해야 할 존재이지, 무시할 대상이 아닙니다. 특히 신앙 공동체 안에서는 지위보다 사랑과 책임, 공경의 태도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우리는 ‘형제’라는 이름 아래 서로의 직책이나 사역의 질서를 함부로 대할 때가 많습니다. “같은 장로인데 왜 저 사람 말만 따라야 해?”, “집사라고 해서 나보다 낫나?” 혹은 “저 목사님은 형편없는 설교자야”라는 식의 태도는 신앙의 이름으로 포장된 비신앙적 무례일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렇게 생각하는 자들에게 단호히 말합니다. “그는 유익을 받는 자요, 사랑을 받는 자다.” 주인이든 종이든, 목회자든 평신도든, 교회 안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로서 서로를 존귀히 여겨야 합니다.

 

현대 사회는 평등을 이야기하면서도, 무례와 조롱을 일삼는 시대입니다. 리더는 함부로 폄하당하고, 동료는 이용되며, 윗사람은 뒷담화의 대상이 되곤 합니다. 세상의 논리가 그렇다면, 교회는 달라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 복음을 믿는다면, 그 복음은 우리의 관계를 회복시키고, 태도를 변화시켜야 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설교를 듣고, 깊은 기도를 하고, 지식이 풍성해도, 내가 누군가를 무시하거나 가볍게 대한다면, 나는 복음을 잊은 자입니다.

 

특히 직장이나 일터, 가정에서의 관계는 더욱 민감합니다. 믿는 상사에게 더 무례하게 구는 직원, 신앙 있는 부모를 더 쉽게 무시하는 자녀, 같은 공동체라고 해서 도를 넘는 친밀함을 기대하는 태도 등은 모두 복음의 이름을 더럽히는 행위입니다. 오늘 바울의 권면은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네가 믿는다는 그 복음, 그것이 네 삶의 태도에 나타나고 있는가?”

 

2. 복음을 이용한 자 – 경건을 팔아 이익을 얻으려는 사람들

 

디모데전서 6장 3절부터 5절은 복음을 오용하는 자들, 곧 경건을 가장하여 자신들의 유익을 추구하는 자들에 대한 바울의 단호한 경고입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단순한 의견 차이나 가르침의 다양성을 언급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분명히 말합니다.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따르지 아니하면 그는 교만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자다.” (3절) 바울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교만하고 무지한 자’로 단정합니다. 왜일까요?

 

그들은 겉으로는 지식을 말하고, 논리를 동원하여 교리를 설명하지만, 그 중심에는 하나님을 향한 순종과 경외심이 없습니다. 이들은 말다툼을 즐기고 변론과 논쟁에 집착합니다. 실제로 교회 역사를 돌아보면, 교리를 놓고 벌어지는 수많은 논쟁들 중에는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인간의 자존심, 지식 과시, 권력 다툼에서 비롯된 것들이 많았습니다. 바울은 이런 풍토를 ‘병든 태도’라고 지적합니다.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오며…” (4절)

 

무엇보다도 심각한 문제는 5절입니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 여기에서 말하는 ‘이익’은 단순히 물질적 부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인정받고 싶은 욕망, 영향력을 갖고 싶은 욕망, 권위자로 보이고 싶은 욕망 모두를 포함합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도 이런 모습이 얼마나 자주 발견됩니까?

 

설교나 가르침이 은혜롭지만, 그 뒤에는 자기 브랜드를 세우려는 의도가 깔려 있기도 합니다. 사역을 열심히 하지만, 본질은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자리를 확보하려는 탐욕일 수 있습니다. 심지어 기도와 헌신조차도 ‘하나님 이것 해주세요, 내가 이렇게까지 했잖아요’라는 거래의 태도가 되어버리곤 합니다. 바울은 이런 태도를 ‘경건을 이용하는 행위’라 말하며, 이것은 진리를 잃어버린 부패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단언합니다(5절).

 

교회 안에서도, 신앙이라는 옷을 입고 스스로를 높이고자 하는 사람은 항상 존재해왔습니다. 예수님 당대에도 바리새인들이 그러했습니다. 겉으로는 율법에 철저했지만, 속에는 자기 의와 사람들의 인정을 갈망하는 탐욕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런 이들이 결국 ‘다툼’이라는 열매를 맺게 된다고 말합니다. 참된 경건은 화평과 자비, 사랑을 열매로 맺지만, 거짓 경건은 분열과 비방, 경쟁을 낳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정말 두려운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나는 경건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경건을 이용하고 있는가?”

진짜 경건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며, 자기를 부인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경건을 수단 삼는 신앙은 하나님을 자기의 욕망을 이루는 도구로 격하시킵니다. 결국, 그런 신앙은 외적으로는 믿음을 말하지만 내적으로는 탐욕과 자아 중심성으로 가득 찬 종교 활동일 뿐입니다.

 

이런 신앙은 결국 믿음을 병들게 하고 공동체를 해칩니다. 예배는 뜨겁고 기도는 열정적인데, 삶은 탐욕적이고 관계는 무례하며, 결국 교회 안에 경쟁과 분열, 상처만 남게 됩니다. 바울이 말한 “다툼이 일어난다”는 표현은 단지 이견이나 충돌이 아니라, 진리에서 벗어난 신앙이 공동체에 끼치는 파괴력을 경고하는 말입니다.

 

현대 교회도 이 본문 앞에서 깊은 자기 성찰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종종 성장을 말하면서 실은 성과를, 부흥을 말하면서 실은 확장을, 충성을 말하면서 실은 영향력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은 겉이 아닌 중심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잘했는지보다, 왜 그렇게 했는지를 더 중요하게 보십니다.

 

3. 복음으로 살아가는 자 – 자족과 경건의 길

 

바울은 디모데전서 6장에서 왜곡된 경건과 잘못된 욕망에 대해 신랄하게 지적한 후, 이제 참된 경건의 길을 제시합니다. 그는 6절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이것은 복음을 따라 사는 자의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가장 위대한 태도이며, 탐욕의 시대를 거슬러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명확히 보여주는 진술입니다.

 

자족이라는 단어는 오늘날 매우 낯선 개념입니다. 자족(自足, αὐτάρκεια)은 ‘스스로 만족한다’는 뜻이지만, 바울이 말하는 자족은 단지 절제하거나 욕망을 억누르는 금욕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받은 것으로 충분하다는 믿음, 그분의 공급하심과 인도하심이 내 삶에 가장 합당하다는 신뢰에서 비롯된 내면의 평안입니다. 자족은 감정이 아니라 믿음의 열매이며, 선택의 결과입니다. 다시 말해, 자족은 “나는 지금 이 자리, 이 형편, 이 삶 속에서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충분합니다”라고 고백하는 영적 결단입니다.

 

바울은 자족의 이유를 7절에서 설명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며,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이 얼마나 명료하고 강력한 인생 해석입니까? 우리는 태어날 때 맨몸으로 왔고, 죽을 때도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망각한 채 살아갑니다. 더 많이 쌓고,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은 것을 남기기 위해 온 생애를 소진합니다. 그리고 결국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한 채, 허무 속에 사라집니다.

 

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인생의 본질을 다시 보게 만듭니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위해 이렇게 애쓰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지금 내 손에 있는 것들—물질, 명예, 관계, 성과—이 모든 것이 내 존재의 이유가 될 수 있을까요? 바울은 그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그 모든 것들 위에 있는 자족과 경건, 즉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만족하며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가장 유익하고 복된 삶이라는 것입니다.

 

8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덧붙입니다.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라.” 이 말씀은 단순하지만 너무도 급진적인 복음의 선언입니다. 세상은 늘 ‘더’를 외치지만, 복음은 ‘이미 충분하다’고 말합니다. 세상은 소비와 소유를 말하지만, 하나님은 자족과 신뢰를 요구하십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풍요 속에서 오히려 결핍을 느끼는 현대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진리입니다.

 

자족은 우리의 물질이 아닌, 우리가 누구를 믿고 있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주권자이자 공급자, 목자이자 아버지로 믿는다면,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의 것들에 목마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자족은 현실을 체념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담대한 자세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9절과 10절에서, 자족하지 못한 이들의 결말을 경고합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부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그러나 ‘부하려 하는 마음’, ‘돈을 사랑하는 마음’은 곧 우리 영혼을 병들게 합니다. 문제는 돈이 아니라, 그것을 사랑하는 내 마음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돈에 대해, 혹은 더 좋은 환경, 더 높은 위치에 대한 욕망으로 자신을 고통스럽게 합니까? 경쟁, 비교, 불만족, 피로… 이것은 탐욕의 열매들입니다. 바울은 그런 마음들이 결국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찌르게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가끔, ‘내가 가진 문제는 돈만 많아지면 해결될 거야’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더 많은 재물은 더 많은 염려와 근심을 동반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는 전혀 다른 방향입니다.

 

자족하는 자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이며, 하나님 안에서 자족하는 자는 어떤 형편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빌립보서 4장에서 바울은 고백합니다. “나는 어떤 형편이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1–13) 자족은 배워야 하는 신앙의 기술입니다. 저절로 되지 않기에, 반복적인 신뢰의 훈련을 통해 익혀야 하는 태도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자족하지 못해 병들어 있습니다. SNS는 끊임없는 비교를 조장하고, 광고는 늘 지금 가진 것이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모든 유혹과 속삭임을 향해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으로 충분합니다.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만족하며, 살아갑니다.”

 

 

결론 | 자족의 자리로 부르심

 

우리는 오늘 디모데전서 6장 1–10절의 말씀을 통해 세 가지 길을 살펴보았습니다. 복음을 잊고 무례하게 살아가는 자, 복음을 이용하여 이익을 추구하는 자, 그리고 복음 안에서 자족하며 살아가는 자. 이 세 부류는 단지 신앙의 태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방향과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를 드러내는 신앙의 거울입니다.

 

이 본문은 단순한 교훈이나 도덕적 권면이 아닙니다. 바울은 오늘 우리에게 세상을 거슬러 살아가는 복음의 삶, 곧 자족과 경건이라는 내면의 혁명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자족은 지금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그러나 가장 결핍된 영적 자산입니다. 자족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충분하다는 믿음 위에 능동적으로 살아가는 태도입니다. 그것은 소유가 아니라 정체성에서 비롯된 만족입니다.

 

현대 사회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지금 너는 부족해. 더 가져야 돼. 더 성공해야 돼. 남들과 비교해서 밀리지 마.” 이런 메시지는 우리 마음속 탐욕을 부추기고, 자족을 조롱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가진 것으로 족한 줄 알아라. 나는 너를 결코 떠나지도, 버리지도 아니하리라.” (히 13:5)

그렇습니다. 자족은 단순히 삶의 태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신뢰 관계 위에서만 가능한 영적 고백입니다. 그분이 나와 함께 하시기에, 지금 이 삶이 충분하다는 믿음이 바로 자족의 출발입니다.

 

또한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경건을 이익의 수단으로 왜곡했던 이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경건이라는 외적 행위는 가졌지만, 실상은 하나님보다 자신을 사랑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신앙은 있지만 삶이 하나님 중심이 아닌 이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기보다, 그리스도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런 신앙은 반드시 탐욕이라는 열매를 맺고, 결국 파멸로 이끕니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며, 지금 내 삶에서 그분이 하신 일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어떤 환경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는 외적으로는 부족할지 몰라도, 내적으로는 부유합니다. 그는 적게 가져도 불안하지 않고, 높이 오르지 않아도 조급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의 나라를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합니다.

나는 자족하고 있는가? 나는 경건한가? 아니면, 경건을 빌미로 내 욕망을 정당화하고 있는가?

나는 더 가지려는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지금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만족하고 있는가?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하나님’ 그분 자체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통해 얻고 싶은 어떤 것’인가?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자족의 자리로 초대하십니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비로소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불안에서 벗어나고, 경쟁에서 벗어나고, 비교와 시기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이 주신 삶의 소명을 따라 기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6장 1절-10절 본문 연구 및 주석]

📖 본문 배경

 

❖ 개요

 

디모데전서 6장 1–10절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내는 마지막 권면 가운데 일부로, ‘경건과 재물’, ‘지도자와 교인들의 태도’, ‘종의 삶’에 대해 실천적 지침을 주는 내용입니다. 본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1–2절에서는 종(노예)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자세에 대해 말하고 있고, 3–10절에서는 ‘경건을 이익의 수단으로 삼는 자들’에 대한 경고와, 참된 만족의 비밀에 대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당시의 사회 구조를 변화시키기보다는 그 안에서 그리스도인이 취해야 할 태도를 강조했습니다. 종들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성실하게 주인을 섬기고, 특히 믿는 주인을 섬길 때는 형제로서 더욱 존경하고 사랑으로 섬기라고 권면합니다. 이는 당시 에베소 교회 내에 있었던 계층 간 갈등이나, 복음을 오해한 채 경건을 통해 ‘물질적 이익’을 얻고자 했던 이들에 대한 교훈으로 이어집니다.

 

본문은 단순한 생활윤리를 넘어서, 믿음의 사람으로서 이 땅의 구조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특히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6절)는 선언은 진정한 부요함은 외적 재물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만족과 내면의 자유에 있다는 것을 역설합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물질 만능주의와 소비 중심적 가치관이 만연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 역사적 배경

 

디모데전서는 바울이 그의 영적 아들 디모데에게 보낸 목회서신 중 하나로, 주후 63~65년경 로마 제국 치하에서 기록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로마 제국은 철저한 계급사회였고, ‘노예제도’는 그 사회의 근간 중 하나였습니다. 학자들에 따르면 1세기 로마 인구의 약 1/3이 노예였으며, 노예는 법적으로 인간의 권리를 보장받지 못한 채 주인의 재산으로 여겨졌습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이러한 사회 구조 속에서도 노예와 자유인, 남자와 여자,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로 묶는 복음을 선포했습니다(갈 3:28). 하지만 복음이 사회 혁명으로 곧바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바울은 노예 제도의 부당함을 언급하기보다는, 그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강조했습니다. 이것은 노예 제도를 옹호한 것이 아니라, 그 구조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로 살아가는 ‘삶의 전환’을 요청한 것입니다.

 

또한 본문 후반부(3–10절)는 에베소 교회 안에 침투한 거짓 교사들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들은 경건을 수단 삼아 개인적 이익을 취하려 하였고, 논쟁과 분열을 일삼으며 교회를 어지럽혔습니다. 바울은 이런 상황에서 디모데에게 바른 교훈과 신앙의 정통을 지킬 것을 강조하며, 재물에 대한 바른 이해와 만족함의 중요성을 일깨웁니다.


❖ 문화적 배경

 

고대 로마 사회에서의 ‘노예제도’는 단순한 신분이 아닌, 경제적·사회적 구조 전반에 걸친 체계였습니다. 노예는 전쟁 포로나 빚을 갚지 못한 자, 혹은 태생부터 노예인 경우가 많았으며, 노예의 숫자는 가정, 농장, 광산, 정부기관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필수 노동력으로 기능하였습니다. 심지어 지적인 노동이나 교육자 역할을 하는 노예들도 존재했을 만큼, 로마의 일상과 경제는 철저히 노예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기독교가 전파되던 시기, 복음은 이러한 사회 구조 속의 소외된 자들에게 깊은 위로와 희망을 주었고, 노예들 역시 그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초대교회 안에는 자유인과 노예가 함께 예배하고 공동체를 이루는 일이 점차 늘어났고, 이는 기존의 사회 질서에 큰 도전이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주인과 노예 사이의 질서가 깨어질 위험도 존재했기에, 바울은 성경적 질서 안에서의 태도를 교훈한 것입니다.

 

또한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도 율법 아래 일정한 노예 제도가 존재했으나, 안식년이나 희년을 통해 자유를 보장받는 제도적 장치가 있었습니다(레 25장). 이에 비해 로마의 노예 제도는 훨씬 더 억압적이고 강제적인 구조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문화적 현실에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복음으로 그 문화를 뛰어넘는 ‘내면의 자유’를 강조했습니다.


❖ 신학적 배경

 

디모데전서 6장 1–10절은 신학적으로 ‘경건’(εὐσέβεια, 유세베이아)의 본질과 그 왜곡에 대한 경고, 그리고 ‘부’(πλοῦτος, 플루토스)에 대한 성경적 관점을 잘 드러내는 본문입니다. 먼저, 바울은 ‘참된 경건’이 단지 외적인 행위나 형식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나오는 거룩한 삶의 태도임을 전제합니다. 경건은 하나님 앞에서의 ‘내면의 질서’이자,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숙한 삶입니다.

 

그런데 당시 일부 교사들은 이 ‘경건’을 물질적 성공이나 재물 획득의 수단으로 여겼습니다. 이들은 경건한 척하면서 실상은 ‘이익’을 추구했고, 바울은 이것이 곧 교회를 무너뜨리는 독이라 경고합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표현은 단순히 재물 자체가 악하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을 사랑함으로 인해 믿음에서 떠나고 탐욕에 사로잡히게 된다는 신학적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또한 본문은 ‘참된 만족’(αὐτάρκεια, 아우타르케이아)의 신학을 보여줍니다. 바울은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라”고 말하며, 외적인 풍요가 아니라 내적인 자족이 그리스도인의 진짜 부요함임을 강조합니다. 이는 빌립보서 4:11–13의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고백과 일맥상통합니다.

 

결국 이 본문은 ‘경건-탐욕-자족’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통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과 삶의 방향성을 다시금 선명하게 해줍니다. 이 땅에서 종으로 살든 자유인으로 살든,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충성된 종이 되어야 하며, 세상의 이익보다 경건과 자족함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 본문 요약

❖ 단락 구분

 

1–2절 | 종의 자세와 믿는 주인에 대한 태도

바울은 멍에 아래 있는 종들, 곧 노예된 자들이 그들의 주인을 ‘마땅히 온전히 존경할 자’로 여기라고 명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이름과 복음의 가르침이 모욕당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특별히 믿는 주인을 섬기는 경우에도, 형제라고 해서 가볍게 대하지 말고 오히려 더욱 성실히 섬기라고 권면합니다. 이는 신앙 공동체 안의 질서와 경건한 간증을 위한 실천적 교훈입니다.

 

3–5절 | 다른 교훈을 따르는 자에 대한 경고

만일 누군가가 다른 교훈을 하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바른 말씀과 경건에 따른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는 교만하고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자라고 바울은 단언합니다. 이들은 쓸데없는 논쟁, 말다툼, 시기와 분쟁을 일으키고, 끊임없는 의심과 악한 생각에 휘둘리는 자들입니다. 특히 그들은 경건을 ‘이득의 수단’으로 여기는 자들로 묘사됩니다.

 

6–8절 | 참된 경건과 자족함의 가치

바울은 이런 왜곡된 시선에 맞서, 참된 경건은 자족하는 마음과 함께할 때 ‘큰 이익이 된다’고 선언합니다. 인간은 아무 것도 세상에 가지고 온 것이 없고, 아무 것도 가지고 나가지 못하기에,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로 알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금욕이 아니라, 믿음 안에서 오는 깊은 만족과 신뢰를 말합니다.

 

9절 | 부에 대한 욕망의 위험성

부자가 되기를 원하고 탐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 여러 가지 해로운 욕심에 빠져 결국 파멸과 멸망에 이르게 된다고 경고합니다. 이는 물질 그 자체보다 그것을 향한 왜곡된 욕망이 얼마나 영혼을 파괴할 수 있는지를 강조하는 구절입니다.

 

10절 | 돈 사랑의 위험성과 믿음에서의 탈선

마지막으로 바울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경고합니다. 돈을 사랑한 결과, 어떤 이들은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찔렀다고 언급합니다. 이는 단지 물질을 소유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중심에 두는 삶이 얼마나 치명적인 신앙의 위협이 될 수 있는지를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 내용 요약

 

디모데전서 6장 1–10절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전하는 마지막 교훈 중 하나로, 교회 공동체 안팎에서 그리스도인이 취해야 할 삶의 태도와 경건의 본질, 그리고 재물에 대한 바른 관점을 강하게 강조하는 본문입니다. 본문은 먼저 종으로 살아가는 자들, 곧 노예된 그리스도인에게 주는 실천적 지침으로 시작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인을 온전히 존경해야 하며, 믿는 주인을 섬길 때조차도 형제라고 해서 경시하거나 함부로 대해선 안 된다고 바울은 강조합니다. 이는 복음이 오해받지 않도록 하기 위한 지혜로운 권면이며, 복음을 위하는 삶의 태도를 말합니다.

 

이어서 바울은 건강한 교훈을 따르지 않고 경건을 이익의 수단으로 삼는 자들에 대해 강력히 경고합니다. 그들은 진리를 알지 못하고 교만하며, 끊임없는 논쟁과 분쟁을 일으켜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 자들입니다. 바울은 그들의 가르침이 결국 사람들을 파괴적인 길로 이끈다고 단언합니다. 이는 단지 교리적 오류를 넘어서, 공동체 내 분열과 타락으로 이어지는 심각한 영적 문제로 연결됩니다.

 

이에 대한 대조로 바울은 참된 경건이란 자족과 함께할 때 진정한 유익이 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세상에 가지고 오지 않았고, 가지고 나갈 수도 없기에, 삶의 기본적인 필요가 채워졌다면 만족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자족은 단순한 금욕이나 절제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뢰에서 오는 깊은 내면의 평안입니다.

 

바울은 또한 부를 좇는 자들이 얼마나 쉽게 시험과 파멸에 빠지는지를 경고합니다. 부를 사랑하는 마음, 곧 탐심은 사람을 무너뜨리고 결국은 믿음에서 떠나게 합니다. 특히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는 선언은, 단순한 윤리적 충고가 아니라 깊은 신학적 경고입니다. 실제로 어떤 이들은 이 돈에 대한 탐심 때문에 신앙을 저버리고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다고 바울은 지적합니다.

 

결국 본문은 참된 경건의 삶이란 세상의 기준이나 물질적 풍요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충성, 자족함, 그리고 진리 안에 서 있는 바른 교훈을 따르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외적인 조건에 흔들리지 않고, 복음을 위해 스스로를 절제하며 공동체를 세우는 데 헌신해야 한다는 영적 방향성을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 붙잡는 말씀

6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이 구절은 신앙인의 내면 세계를 꿰뚫는 날카로운 통찰이자, 세상 가치관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복음의 역설을 담고 있습니다. 바울은 경건 자체를 이익의 수단으로 삼는 이들을 경계하면서, 참된 경건은 오히려 ‘자족함’과 함께할 때 진정한 유익이 된다고 선언합니다.

 

이 말씀을 대하며 제 마음속엔 문득 오래전 사역 초기에 경험했던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모두가 ‘크게 쓰임받는 삶’, ‘성공하는 목회’,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던 분위기 속에서, 저는 사역이 잘되기를 기도하면서도, 그 마음 깊은 곳엔 ‘비교’와 ‘조급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해도 그 공허는 채워지지 않았고, 어느 날 이 말씀을 다시 묵상하다가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얼마나 커졌는지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그분 안에서 만족하고 있는가, 얼마나 경건함으로 그분을 신뢰하며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가를 보고 계셨다는 사실 말입니다.

 

‘자족’이라는 단어는 현대인에게 매우 낯선 단어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더 높은 자리, 더 많은 소유, 더 화려한 삶을 추구하도록 훈련받은 세대입니다. 심지어 신앙생활조차 그 안에서 성공하거나, 복을 받기 위한 도구처럼 왜곡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지금 이 순간,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 안에서 감사하며 만족하는 것, 그것이 곧 경건의 진짜 유익이라고 말합니다.

 

이 자족은 단순히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무기력이나 체념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 이 자리에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그분이 내 삶에 가장 좋은 것을 아시고 인도하신다는 믿음에서 나오는 담대한 만족입니다. 이것은 재정이나 상황과 무관하게, 오늘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마음으로 서 있는지를 결정짓는 믿음의 태도입니다.

 

오늘 우리는 얼마나 자주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보고 있을까요?

“지금 나는 하나님께 주어진 것으로 만족하고 있는가?”

“내가 더 원하고 있는 것은 정말 하나님 나라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내 자아를 위한 욕심인가?”

 

경건 + 자족 = 큰 이익.

이 단순한 수식은 오늘의 한국 사회를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너무나도 실제적인 메시지를 던집니다. 자족은 경건의 완성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진짜 부요한 인생으로 우리를 이끌어가는 길입니다. 


📖 단어 연구

❖ 종 (δοῦλος / 둘로스)

 

✦ 뜻과 의미

헬라어 δοῦλος (둘로스)는 본래 ‘노예’, ‘종속된 자’를 뜻합니다. 단순히 고용된 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타인의 소유에 속한 자를 지칭합니다. 고대 헬라 문화에서 둘로스는 자유가 없고, 주인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자로서 법적·사회적 권리 없이 살아가는 계층이었습니다.

 

✦ 본문에서의 의미

본문 1절 “멍에 아래에 있는 종들”이라는 표현에서 사용된 이 단어는 당시 로마 사회의 노예 신분에 있던 신자들을 지칭합니다. 바울은 이들이 단순히 인간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할 존재임을 강조하며, 경건한 태도로 주인을 대할 것을 권면합니다.

 

✦ 신학적 의미

신약 성경 전체에서 둘로스는 단지 사회적 신분 이상의 영적 정체성으로 확장됩니다.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롬 1:1)이라 부르며,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뜻이 아닌 주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복음의 종’임을 선언합니다. 이는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발견한 자의 자발적인 헌신을 의미합니다. 종의 정체성은 복음의 겸손과 순종의 본질을 드러냅니다.


❖ 경건 (εὐσέβεια / 유세베이아)

 

✦ 뜻과 의미

헬라어 εὐσέβεια (유세베이아)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 ‘거룩한 삶’, 또는 ‘신앙적 경건’을 뜻합니다. 문자적으로는 ‘좋은 경배’(eu = good, sebomai = 경배하다)라는 뜻에서 비롯되어, 신을 향한 올바른 태도와 경외의 마음을 표현합니다.

 

✦ 본문에서의 의미

본문 3절과 6절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되며, 참된 교훈과 연결된 ‘삶의 태도’로 등장합니다. 특히 6절에서는 자족과 함께할 때 ‘큰 유익’이 되는 것으로 설명되며, 경건이 외적 형식이나 교리 암기에 머무르지 않고,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태도로 확장됨을 보여줍니다.

 

✦ 신학적 의미

경건은 단순히 외적인 종교 행위가 아닌, 하나님 앞에서의 일관된 삶의 태도입니다. 신약에서는 경건이 곧 믿음의 열매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행하는 생활양식으로 나타납니다(딤전 4:8). 특히 디모데전서에서는 거짓 교사들이 이 경건을 ‘이익의 수단’으로 왜곡하는 문제를 지적하며, 경건의 참 본질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나오는 ‘신뢰와 자족’임을 강조합니다.


❖ 자족 (αὐτάρκεια / 아우타르케이아)

 

✦ 뜻과 의미

헬라어 αὐτάρκεια (아우타르케이아)는 ‘스스로 충분함’, ‘자신 안에서 만족함’을 의미합니다. 철학적으로는 스토아학파에서 외부의 조건에 의존하지 않는 내면의 자율성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 본문에서의 의미

본문 6절에서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유익이 된다”고 하며, 자족은 경건과 결합될 때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갖습니다. 단순한 절제나 무욕(無慾)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오는 내적 만족과 신뢰로서 이해해야 합니다.

 

✦ 신학적 의미

바울은 빌립보서 4:11–13에서 자신이 어떤 형편에서도 자족할 수 있는 비결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라고 고백합니다. 자족은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내면의 자유이며, 세상의 소유와 조건에 흔들리지 않는 영적 평안의 상태입니다. 디모데전서에서의 자족은 경건과 결합되어, 성숙한 신앙인의 핵심 덕목으로 자리매김됩니다.


❖ 탐하는 자 (βουλόμενοι πλουτεῖν / 불로메노이 플루테인)

 

✦ 뜻과 의미

헬라어 βουλόμενοι (불로메노이)는 ‘원하다, 바란다’는 의미이고, πλουτεῖν (플루테인)은 ‘부자가 되다’, ‘재물을 얻다’는 뜻입니다. 이 둘이 합쳐져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자들”을 지칭합니다.

 

✦ 본문에서의 의미

9절에 등장하며, 단순히 돈을 갖고 싶은 마음을 넘어 돈을 삶의 목적과 추구 대상으로 삼는 태도를 말합니다. 이들은 해로운 욕심에 빠져 시험과 올무, 결국 멸망에 이르게 된다고 경고됩니다.

 

✦ 신학적 의미

이 표현은 단지 부의 축적이 아닌, 물질에 대한 왜곡된 욕망을 문제 삼습니다. 성경은 자원함과 정직함 가운데서의 물질 축복을 부정하지 않지만, 그것을 우상처럼 추구할 때 영혼의 파괴와 믿음의 탈선이 초래된다고 경고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마 6:33)을 살아야 하며, 부 자체보다 하나님 중심의 가치관을 세워야 함을 본문은 강조합니다.


❖ 돈을 사랑함 (φιλαργυρία / 필라르귀리아)

 

✦ 뜻과 의미

헬라어 φιλαργυρία (필라르귀리아)는 필레오 (사랑하다)와 아르귀리온 (은화, 돈)에서 유래한 합성어로, ‘돈을 사랑하는 마음’, ‘탐욕’을 뜻합니다. 단순한 필요가 아닌, 돈에 대한 집착과 정서적 집착을 포함한 강한 욕망을 표현합니다.

 

✦ 본문에서의 의미

10절에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명시되며, 믿음에서 떠나는 이들의 원인이 되었다고 설명됩니다. 여기서 ‘돈을 사랑함’은 탐욕의 중심이며, 스스로를 많은 근심으로 찌르는 파괴적 태도입니다.

 

✦ 신학적 의미

‘돈을 사랑함’은 단지 도덕적 잘못을 넘어서,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하는 우상숭배의 형태로 규정됩니다. 예수님께서도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고 하신 것처럼, 신앙인은 돈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의 주권 사이에서 분명한 결단을 요구받습니다. 본문의 강조점은 돈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사랑하고 의지하려는 마음의 상태에 있습니다. 탐욕은 신앙을 타락시키고, 공동체를 병들게 하며,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합니다.


📖 절별 주해

1절 | 종들의 존경과 복음의 명예

“무릇 멍에 아래에 있는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모독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이 절은 당시 노예로 살아가던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실제적이고 급진적인 권면입니다. “멍에 아래에 있는 종들”이란 표현은 인간적으로는 속박되어 있으나, 복음 안에서 자유함을 얻은 자들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이들에게 ‘범사에 주인을 공경하라’고 명합니다. 이는 단순한 예의가 아니라, 복음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전략적 태도입니다. 당시 교회는 사회적 약자와 소외계층이 많은 공동체였기에, 그리스도인의 행실이 곧 복음의 진실성을 평가받는 기준이었습니다. 이 구절은 단순히 도덕적 권면이 아니라, 복음을 위한 삶의 자세를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2절 | 믿는 주인을 더욱 섬기라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그가 형제라고 가볍게 대하지 말고 더욱 잘 섬기라. 이는 유익을 받는 자들이 믿는 자요 사랑을 받는 자임이라. 너는 이것을 가르치고 권하라”

 

믿는 주인을 형제라 하여 가볍게 대하지 말라는 이 말씀은 공동체 내의 평등과 질서 사이의 균형을 다룹니다. 같은 믿음을 가졌다고 해서 권위를 무시하거나 경계를 흐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믿는 주인이기 때문에 더욱 존중하며 성실하게 섬겨야 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사랑을 받는 자’, ‘유익을 받는 자’라는 표현을 통해, 주인과 종이 단지 계약적 관계가 아닌 신앙 공동체 안에서 서로의 유익을 추구하는 관계임을 드러냅니다. 교회는 그 안의 신분 차이를 넘어서되, 그로 인해 질서를 무시하지 않는 경건한 공동체여야 함을 강조합니다.


 

3절 | 다른 교훈을 따르는 자에 대한 경고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따르지 아니하면”

 

여기서 바울은 교회의 건강성을 해치는 핵심 요소로 ‘다른 교훈’을 지목합니다. 바른 말,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경건의 진리로부터 벗어난 가르침은 교회를 분열시키고 혼란케 합니다. 이 절은 초대교회 당시 다양한 이단 사상과 왜곡된 복음 이해가 침투했던 상황을 반영합니다. 바울은 단순한 사상 차이를 용납하지 않고, 진리에서 벗어난 교훈을 ‘반(反)복음적’이며, ‘파괴적’인 것으로 간주합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교회가 진리의 복음 위에 견고히 서야 함을 상기시켜주는 경고입니다.


 

4절 | 교만과 무지, 다툼의 뿌리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잘못된 교훈을 따르는 자의 영적 상태를 묘사한 이 구절은 매우 강한 어조를 띱니다. 바울은 이들을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자”라고 단정하며, 진리에서 떠난 자들이 오히려 ‘지식’과 ‘논리’의 탈을 쓰고 다툼을 즐긴다고 지적합니다. 이는 단지 성격적 특성이 아니라, 교만과 무지의 결과로 나타나는 병적인 영적 태도입니다. 그 결과는 분열, 시기, 비방, 의심 등 공동체를 해치는 열매들로 나타납니다. 이 말씀은 교리는 곧 삶의 열매로 드러나며, 거짓 교훈은 반드시 파괴적인 결과를 낳는다는 성경의 원칙을 확인시켜 줍니다.


 

5절 | 경건을 이익의 수단으로 삼는 자들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이 절은 앞절에서 이어진 논리의 정점입니다. 경건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물질적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 현실을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마음이 부패하고 진리를 잃어버렸다’는 표현은 그들의 신앙이 이미 외식과 위선에 찌들어 있음을 드러냅니다. ‘이익의 방도’라는 표현은 복음의 타락을 의미하며, 종교적 가면을 쓴 탐욕을 가리킵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유사하게 나타나는 ‘번영복음’이나 ‘성공 중심의 신앙’에 대한 분별력을 요구합니다. 진정한 경건은 이익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목적 그 자체여야 합니다.


 

6절 | 자족과 경건, 참된 유익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이 절은 앞의 왜곡된 신앙과 대비되는, 참된 경건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자족은 외부 조건이 아닌, 하나님 안에서 만족하는 내면의 상태이며, 경건과 함께할 때 큰 유익이 된다고 말합니다. 이는 신앙의 유익이 물질적 풍요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신뢰와 평안에 있다는 선포입니다. 이 말씀은 바울의 신앙 고백과도 일치하며(빌 4:11–13),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향성이 ‘더 가지는 것’이 아니라 ‘더 만족하는 것’임을 일깨워 줍니다.


 

7절 | 인생의 덧없음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바울은 자족의 이유를 인생의 유한성에서 찾습니다. 이 구절은 욥기의 고백(욥 1:21)을 연상시키며, 사람이 태어날 때도 빈손이었고, 죽을 때도 빈손임을 상기시킵니다. 재물과 소유는 영원하지 않으며, 그 어떤 것도 죽음 이후로 가져갈 수 없기에, 그것을 인생의 목적처럼 여기는 태도는 어리석습니다. 이 말씀은 세상의 가치를 상대화하고, 영원의 시각으로 현실을 바라보는 지혜를 제공합니다.


 

8절 | 기본적인 삶에 만족하라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이 절은 실천적 자족의 기준을 제시합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 즉 기본적인 필요만 충족되어도 감사할 수 있는 태도가 경건한 삶의 출발점임을 말합니다. 현대인의 소비주의와 비교하면, 이는 매우 급진적인 선언입니다. 바울은 신앙인은 풍요 속에 만족하는 사람이 아니라, 필요 속에서 감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자유입니다.


 

9절 | 부욕의 유혹과 멸망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이 절은 부 자체가 아니라, 부를 ‘추구하는 욕망’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경고합니다. 돈을 사랑하면 시험과 올무에 빠지며, 결국은 자신을 멸망으로 이끌게 됩니다. 여기서 ‘파멸’과 ‘멸망’은 단지 경제적 실패가 아니라, 영적 타락과 심판의 결과를 가리킵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금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의 방향이 생명인지 파멸인지를 분별하라는 교훈입니다.


 

10절 | 돈 사랑의 파괴력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본문의 클라이맥스는 이 구절입니다. ‘돈을 사랑함’(필라르귀리아)은 모든 악의 근원이며, 신앙의 탈선을 일으키는 강력한 유혹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돈 자체를 악이라 하지 않고, 그것을 사랑하는 마음이 신앙을 왜곡시킨다고 진단합니다. 돈을 사랑하는 마음은 결국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의지하게 만들고, 그 결과는 믿음의 상실과 깊은 고통입니다. 이 구절은 오늘날 소비 중심의 문화와 재물 중심의 복음 해석에 대한 날카로운 반성의 거울이 됩니다.


📖 묵상

디모데전서 6장 1–10절 말씀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삶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깊이 되묻게 합니다. 당시 종으로 살아가던 그리스도인들에게 바울은 ‘자유’가 아닌 ‘공경’을 강조했고, 믿는 주인조차 ‘더욱 잘 섬기라’고 말했습니다. 그 당시의 사회구조 안에서 노예는 자신의 인생을 선택할 수 없었고, 경제적 자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들은 그들은, 그 억압적인 구조 속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말씀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삶의 구조와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돈’이라는 강력한 구조 안에서 살아갑니다. 학벌과 취업, 부동산, 연봉, 성공… 이 모든 구조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하다 하면서도 ‘실제론 종처럼 살아가게 하는’ 무형의 멍에가 되곤 합니다. 바울은 그런 우리에게 말합니다.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유익이 된다.”

 

이 자족은 포기나 체념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금 내게 주신 것 안에서 만족하며 살아가는 용기입니다. 사람들은 더 가지려 애쓰지만, 하나님은 더 감사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더 높이 오르려 하고, 하나님은 더 낮은 자리를 보게 하십니다. 탐심은 언제나 우리를 파멸로 이끌지만, 자족은 오늘을 살게 하는 믿음의 뿌리입니다.

 

본문 속 경건을 돈벌이의 수단으로 바꿔버린 사람들처럼, 오늘날에도 신앙을 성공의 도구로 이용하려는 유혹은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예배는 무언가 얻기 위한 수단이 되어버리고, 기도는 축복의 주문처럼 변질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

 

오늘, 나는 어떤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까요?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은 하나님 자체인지, 아니면 하나님을 통해 얻고 싶은 무언가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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