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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Story】/[생명의 삶] 디모데전서ㅣ2025년

[생명의 삶] 디모데전서 1장 1절-11절 _ 2025. 7. 8(화)

by LogosLab Steward 2025. 7. 7.

❖ 이 자료는 개인적인 말씀 묵상과 연구를 바탕으로 [목회자의 설교 준비][성경을 더욱 깊이 알고자 하는 ], 그리고 [말씀묵상에 도움이 필요한 성도]를 돕기 위해 제작되었습니다. 본 자료의 모든 저작권은 작성자인 LogosLab Steward에게 있으며, 자유롭게 사용 및 참고하시되 출처를 밝혀주시고, [무단 복제 배포]를 합니다. 이 자료가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풍성하게 경험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ㅣ설교ㅣ

📖 본문

1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2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3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4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5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6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7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자기가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8 그러나 율법은 사람이 그것을 적법하게만 쓰면 선한 것임을 우리는 아노라 
9 알 것은 이것이니 율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와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과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와 아버지를 죽이는 자와 어머니를 죽이는 자와 살인하는 자며 
10 음행하는 자와 남색하는 자와 인신 매매를 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거짓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를 위함이니 
11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름이니라 

📖 "사랑으로 말하십시오"

서론ㅣ말이 많아질수록, 본질은 멀어진다

 

우리는 매일 너무 많은 말들을 듣고, 말합니다.

뉴스에서, SNS에서,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도무지 줄어들지 않는 이야기들 속에서 때로는 지치고, 때로는 무뎌집니다.

 

무엇이 옳은지보다, 누가 더 강하게 말하는지가 중요해진 시대.

논리보다 인상이, 진실보다 분위기가 더 힘을 발휘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과연 이 시대 속에서 교회는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할까요?

 

사도 바울은 오늘 영적인 아들 디모데에게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못하게 하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하지만 그의 목적은 단순히 잘못된 논쟁을 막는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에베소에 남아 감당해야 할 사명이 ‘진리의 본질’을 지키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그 진리의 핵심을 단 한마디로 정리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교훈의 목적이 지식도, 정보도 아닌 ‘사랑’이라고 외치는 바울의 목소리는
오늘 이 시대의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과도 같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지금, 복음의 가장 처음으로 돌아가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우리는 왜 말하는가? 왜 가르치는가? 왜 믿는가?

 

이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이 오직 사랑이어야 한다는 진리 앞에서,

우리의 입술과 태도를 다시금 겸손히 점검해 보아야 할 때입니다.

 

 

 

본론ㅣ사랑이 이끄는 참된 교훈

 

1. 다른 교훈이 들어설 때, 사랑은 사라집니다. (1–4절)

 

바울은 에베소에 머무는 디모데에게 ‘다른 교훈’을 막으라고 명령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다른 교훈’(ἑτεροδιδασκαλέω)은 단지 틀린 교리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본질에서 벗어난 모든 가르침을 뜻합니다.

당시 에베소 교회 안에는 ‘족보 이야기’와 ‘끝없는 논쟁’이 가득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말과 지식을 뽐내기 위해 율법과 계보를 끌어와 불필요한 논쟁을 벌였고,
그 결과 공동체 안에는 분열과 영적인 피로만이 남고 쌓여갔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러한 현상에 대해 정확하게 지적하며 말합니다.

“이런 것들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4절)

이 말씀은 복음의 목적이 단순히 머리로 아는 지식이 아니라,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임을 강력하게 상기시킵니다.
하나님의 경륜, 곧 구원의 섭리는 인간의 논리 싸움이나 지적 유희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 안에서 살아내는 순종으로 비로소 열매 맺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쉽게 ‘말’이 많아집니다.

성경 지식, 신학적 논리, 사역 경험… 이 모든 것이 귀하고 중요하지만,

만약 그것이 사람을 살리고 사랑으로 변화시키는 힘을 잃어버린다면, 그것은 결국 ‘다른 교훈’이 됩니다.

사랑이 없는 교훈은 결국 아무도 이기지 못하는 영적 전쟁을 만들어낼 뿐입니다.

 

 

 

2. 교훈의 목적은 지식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5–7절)

 

바울은 복음의 본질은 담은 결정적인 선언을 합니다.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5절)

그는 교훈의 궁극적인 목적이 바로 ‘사랑’임을 명확히 밝힙니다.

 

그리고 바울은 사랑이 피어날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의 세 가지 요소를 언급합니다.

‘청결한 마음’은 하나님 앞에서 숨김없는 내면을 의미하고,

‘선한 양심’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 거리낌 없이 살아가는 태도이며,

‘거짓 없는 믿음’은 형식이 아니라 진정한 신뢰를 뜻합니다.

결국, 참된 사랑은 이 세 가지 토양 위에 아름답게 피어나는 귀한 꽃과 같습니다.

 

그러나 당시 어떤 이들은 이러한 본질적인 목적을 잊고, 스스로 "율법의 선생"이 되기를 자처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무엇을 주장하는지도 알지 못한 채 그저 말만 많았습니다.

 

지금 우리 시대의 신앙인들도 이와 같은 유혹 속에 놓여 있습니다.

'내가 옳다'는 강한 확신이 종종 '당신은 틀렸다'는 섣부른 판단으로 이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랑은 우리 공동체 안에서 사라지고, 교회는 따뜻한 가르침보다 차가운 상처로 채워지게 됩니다.

복음을 맡은 자라면, 우리는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나는 지금, 사랑으로 말하고 있는가?" 그리고 때로는 말하기보다, 사랑의 마음으로 침묵할 줄 아는 용기 또한 필요합니다.

 

 

 

3. 복음은 ‘맡겨진 것’이며, 우리는 그 전달자입니다. (8–11절)

 

바울은 율법의 본래 목적에 대해 이야기하며 논의를 확장합니다.

율법은 본래 '선을 위한 도구'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드러내고, 무엇이 죄인지 분명히 알려줍니다.

그러나 죄 많은 인간에게 율법은 아이러니하게도 '정죄의 도구'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은 의인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율법을 폐기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율법은 죄인에게 자신들의 죄를 깨닫게 하고, 그로 인해 복음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하게 인식시키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복음은 바울에게 '맡겨진'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맡기다'는 헬라어 단어 '파라티테미'(παρατίθημι)는

마치 가장 귀하고 소중한 보물을 신뢰할 만한 자에게 조심스럽게 맡기는 장면을 연상시킵니다.

 

바울은 자신이 탁월하거나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그 복음을 맡은 자라고 겸손히 고백합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은 결코 우리 자신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이 귀한 진리를 잠시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이자, 그것을 세상에 전하는 전달자일 뿐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복음을 대할 때 지극한 경외심을 가져야 하며, 동시에 사랑의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그 진리를 전해야 합니다.

지식을 과시하거나 상대를 가르치려 드는 태도가 아니라, 단 한 사람이라도 살리려는 간절한 마음으로 복음을 말해야 합니다.

 

 

 

결론ㅣ다시, 사랑으로 돌아가야 할 때입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말하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말이 많아질수록, 정작 진짜 중요한 것은 오히려 더 희미해지는 역설적인 상황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교회를 지키라고 강력하게 권면합니다.

단순히 이단을 막는 것을 넘어, 복음의 본질, 곧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사랑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에서 샘솟듯 흘러나옵니다.

그리고 이 사랑이야말로 교회가 이 어둡고 혼란스러운 세상을 향해 내뿜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하고 아름다운 복음의 향기입니다.

 

오늘 우리도 디모데처럼, 이 시대를 살아가는 동안 '복음을 지키는 자'로 부름받았습니다.

우리가 말할 때마다, 가르칠 때마다, 그리고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사랑할 때마다,

주님의 복음은 우리를 통해 다시 살아 움직이며 능력을 발휘할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하루, 이렇게 결심해보면 어떨까요?

“나는 사랑으로 말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말이, 메마른 영혼들에게 생명의 복음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기도합니다.

 


ㅣ본문 연구 및 주석ㅣ

📖 본문 배경

 

❖ 개요

 

디모데전서 1장 1–11절은 바울이 영적 아들 디모데에게 보내는 개인적 편지의 서두로, 서신 전체의 목적과 중심 주제를 요약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의 정당성과 소명을 밝히며 시작하고, 곧바로 디모데가 맡은 사역지인 에베소에서 감당해야 할 중요한 사명에 대해 권면합니다. 그것은 곧 잘못된 교훈을 가르치는 자들을 경계하고 바른 복음을 지키는 일입니다. 바울은 ‘다른 교훈’(ἑτεροδιδασκαλέω)과 끝없는 족보, 신화 등을 언급하며 당시 초대교회 안에 침투한 거짓 가르침헛된 논쟁의 실태를 지적합니다. 동시에 율법의 오용에 대해서도 언급하며, 율법은 죄인을 위해 주어진 것임을 설명하고, 바른 교훈은 결국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르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 역사적 배경

 

디모데전서는 바울이 마게도냐 지방에 있었을 때 디모데를 에베소에 남겨두고 그에게 목회적 지침을 전한 서신으로 여겨집니다. 바울의 1차 로마 투옥 이후(사도행전 28장 이후), 다시 자유를 얻은 시기에 쓰인 것으로 보며, 사도행전의 기록 이후의 사역을 반영합니다. 당시 에베소 교회는 바울이 오랜 시간 세웠던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점점 혼합주의적 신앙, 율법주의와 영지주의적 요소, 그리고 기독교와 유대교의 경계 모호화로 인해 교리적 혼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이 교회의 대표자로 세워, 건강한 교리, 바른 신앙, 영적 질서를 다시 확립하도록 위임합니다. 디모데는 아직 젊은 지도자로서 그 사명은 무겁고 어려웠지만, 바울은 그를 “믿음 안에서 참 아들”이라 부르며 전적인 신뢰를 보냅니다.


❖ 문화적 배경

 

당시 소아시아 지역, 특히 에베소는 로마 제국 하의 대표적 다신교 도시 중 하나로, 아르테미스 신전으로 유명했습니다. 이러한 문화적 배경은 유대-기독교적 가르침과의 충돌을 필연적으로 낳았으며, 특히 ‘족보’나 ‘신화’에 대한 집착은 당시 유대계 신자들 안에서 율법적 우월성이나 계보 중심의 영적 권위 주장으로 연결되곤 했습니다. 이는 신화적 이야기나 철학적 사변과 결합되어 교회 안에 많은 혼란을 초래했고, 그로 인해 본질에서 벗어난 논쟁과 분열이 잦았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러한 세속적·유대적 요소를 경계하고, 복음 중심의 사역, 사랑으로 나타나는 교훈, 그리고 순결한 신앙양심을 붙들라고 당부한 것입니다.


❖ 신학적 배경

 

디모데전서 1장 초반은 목회서신 전체를 아우르는 신학적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바른 교훈’과 ‘사랑’의 관계입니다. 바울은 교훈의 목적이 단순한 지식전달이나 논쟁의 승리가 아닌,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라고 밝힙니다(5절). 이는 바울이 이해한 복음의 실천적 목적, 즉 교리와 삶이 분리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율법에 대한 해석도 바울의 신학을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율법은 의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죄인에게 자신을 깨닫게 하고 복음의 필요성을 인식시키기 위한 도구입니다(9–10절). 바울은 복음의 본질을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11절)이라고 부르며, 이 복음이 자기에게 ‘맡겨진 것’이라는 사도적 자의식을 드러냅니다. 이는 목회자 디모데에게도 같은 부르심과 사명이 전수되었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신학적 선포입니다.

 


📖 본문 요약

❖ 단락구분

 

1–2절 | 인사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에 따라 사도로 부름받은 자신을 소개하고,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은혜와 긍휼과 평강을 기원합니다. 이는 단순한 인사를 넘어 복음의 권위와 사역의 정체성을 선언하는 신학적 인사입니다.

 

3–11절 | 바른 교훈과 거짓 가르침에 대한 경고

바울은 디모데에게 에베소에 머물며 ‘다른 교훈’을 가르치는 자들을 막을 것을 명령합니다. 신화와 족보에 대한 헛된 논쟁, 율법의 오용을 비판하며, 율법의 본래 목적과 복음의 핵심을 되새깁니다. 이 구절은 디모데전서 전체의 핵심 주제인 바른 교훈의 수호복음의 본질을 선언합니다.


 

❖ 내용요약

 

디모데전서 1장 1–11절은 바울이 목회자 디모데에게 전하는 첫 번째 권면으로, ‘바른 교훈을 지키는 사명’이 이 서신의 핵심임을 선포하는 구절입니다. 서신의 첫 머리인 1–2절은 사도 바울의 자기소개와 더불어 디모데에 대한 신뢰와 축복으로 시작되고, 3절부터는 본격적으로 에베소 교회 안에서 디모데가 수행해야 할 사역, 즉 다른 교훈을 막고 복음을 수호하는 일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이 이어집니다. 바울은 당시 교회 안에 퍼진 신화, 족보, 율법 오용의 문제를 지적하며, 율법의 본래 목적은 죄를 밝히는 도구이지, 자기 의를 세우는 수단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교훈의 목적은 ‘사랑’이며, 그 기준은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에 있음을 선언함으로써, 교회 안의 모든 가르침은 복음에 기초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웁니다.

 

1–2절 | 복음 안에서 아들 된 디모데에게

바울은 이 편지를 자신이 단순히 사역자로서가 아닌, ‘명령에 따라 사도 된’ 자로서 쓰고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 그 사도직은 인간의 선택이나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절대적 부르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믿음 안에서 참 아들’이라 부르며 깊은 사랑과 신뢰의 관계를 드러냅니다. 이어서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로부터 오는 은혜, 긍휼, 평강을 구하는 기도로 인사를 마칩니다. 이 인사는 이후 전개될 바른 교훈과 복음에 대한 강조의 서론이기도 합니다.

 

3–4절 | 다른 교훈과 헛된 족보에 대한 경고

바울은 디모데에게 에베소에 머물게 한 이유를 밝힙니다. 그것은 곧 ‘다른 교훈’을 퍼뜨리는 이들을 막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다른 교훈’은 복음의 본질을 흐리고,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게 하는 가르침입니다. 이는 유대인의 전통적 계보 중심 사유와 혼합주의적 사변을 의미하며, 교회 공동체를 논쟁과 분열로 이끄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런 가르침들이 하나님의 경륜(계획)을 이루는 대신, 오히려 끝없는 변론만 낳는다고 단언합니다.

 

5절 | 바른 교훈의 목적: 사랑

바울은 바른 교훈의 목적을 명확하게 밝힙니다. 그것은 단지 지식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낳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무조건적 감정이 아니라, 청결한 마음, 선한 양심, 거짓 없는 믿음이라는 영적 토양 위에서 자라는 것입니다. 이는 곧 복음은 교리나 규범을 넘어서, 실제적인 삶의 열매로 이어져야 한다는 바울 신학의 핵심을 보여줍니다.

 

6–7절 | 진리를 떠난 자들의 헛된 열심

바울은 복음의 핵심에서 벗어난 자들이 헛된 말, 곧 쓸모없는 교훈과 논쟁에 빠졌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스스로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지만, 자신이 말하는 것도 확신하는 것도 모른 채 무지함 속에 있습니다. 이는 율법을 도구로 삼아 자기를 높이고, 공동체를 혼란스럽게 하는 자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입니다.

 

8–10절 | 율법의 본래 목적

바울은 율법 자체는 선하다고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올바르게 사용될 때에만 그 효용이 있다고 말합니다. 율법은 의로운 자가 아닌, 불법한 자와 죄인들을 위한 경계로 주어진 것입니다. 바울은 구체적으로 다양한 죄 목록을 나열하면서, 율법이 바로 이런 죄의 실체를 드러내기 위한 수단임을 밝힙니다. 여기에는 성적 타락(음행, 남색), 가족에 대한 폭력, 거짓말과 맹세 위반, 인간 생명에 대한 폭행 등 사회윤리와 도덕을 무너뜨리는 자들이 포함됩니다.

 

11절 | 복음의 본질: 하나님의 영광

바울은 결국, 이 모든 교훈의 기준이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에 있다는 것을 밝히며 단락을 마무리합니다. 그는 이 복음이 자신에게 ‘맡겨진 것’임을 강조하며, 단순히 인간의 도덕 교훈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복음임을 천명합니다. 이는 디모데가 지켜야 할 교훈 역시 이 복음에 근거해야 하며, 사람의 의견이나 문화가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분명히 하는 선언입니다.

 

디모데전서 1장 1–11절은 교회의 건강한 교훈이 무엇을 중심으로 세워져야 하는가를 분명히 밝히는 선언입니다. 사랑 없는 교훈은 지식이 아닌 소음이 되고, 복음 없는 열심은 교회를 해치는 율법주의로 전락합니다. 바울은 교회 안에서 바른 교훈은 결국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 복음에 뿌리내려야 하며, 그 복음은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통로여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디모데에게 맡겨진 사명은 단지 오류를 고치는 기술이 아니라, 복음의 진리를 따라 사랑과 진실로 교회를 세우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 기준이 요청됩니다. 무엇을 가르치는가 이전에, 우리는 어떤 복음 위에 서 있는가를 먼저 물어야 할 것입니다.

 


📖 붙잡는 말씀

5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바울은 이 짧은 한 구절 안에 복음 교훈의 본질과 목적, 그리고 교회의 존재 이유를 담아냈습니다. “교훈”은 지식이 아니라 사랑을 낳아야 하며, 그 사랑은 마음과 양심과 믿음이라는 내면의 질서에서 비롯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말하자면, 바른 교훈이란 단지 ‘바른 내용’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사람’을 세우는 일입니다.

 

‘청결한 마음’은 오염되지 않은 동기를 말합니다. 자기의 의나 명예를 구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순전함을 잃지 않으려는 마음입니다. ‘선한 양심’은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 양심의 민감함이며, ‘거짓 없는 믿음’은 위선 없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내면의 정직함입니다. 이 세 가지가 있을 때, 그 사람의 가르침은 반드시 ‘사랑’을 낳게 됩니다. 바울은 사랑이란 감정이 아니라, 복음이 빚어내는 인격의 열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종종 ‘무엇을 가르치느냐’에 집착하지만, 정작 ‘그 교훈이 어떤 사람을 세우는가’는 간과합니다. 지식은 쌓이는데, 사랑은 메말라가고 있다면, 이미 복음에서 어긋난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의 가르침이든, 가정 안에서의 양육이든, 우리가 전하는 모든 말과 행동은 결국 하나님의 사랑을 흘려보내는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이 말씀은 저 자신에게 늘 되묻는 질문이 됩니다.

“나는 지금 사랑을 낳고 있는가?”

“내 설교와 가르침이 사람의 마음을 더 맑게 하고 있는가?”

“내 믿음은 진짜인가, 위선인가?”

 

디모데전서 1장 5절은 복음의 교훈이 반드시 인격적 변화공동체적 사랑으로 열매 맺어야 한다는 기준을 제시합니다. 이 말씀은 복음을 전하는 우리 모두가 다시금 초심으로 돌아가, 사랑을 목적으로 삼는 삶을 살아가도록 이끌어주는 거울과도 같습니다.

 


📖 단어 연구

❖ 교훈 (διδασκαλία / 디다스칼리아)

 

✦ 뜻과 의미

헬라어 디다스칼리아(διδασκαλία)는 ‘가르침, 교육, 교리’를 뜻하는 단어로, 단순한 지식 전달을 넘어 삶과 신앙 전반을 형성하는 지속적인 훈련과 체계를 내포합니다. 초기 교회에서는 주로 사도적 전승과 진리의 말씀을 따르는 바른 가르침을 지칭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 본문에서의 의미

3절과 5절에 등장하는 ‘교훈’은 대조적으로 사용됩니다. ‘다른 교훈’은 복음에서 벗어난 왜곡된 가르침을 의미하고, ‘이 교훈’은 복음을 기반으로 한 진리의 교육을 뜻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참된 교훈을 수호하고, 복음적 기준에 맞지 않는 가르침을 분별하여 막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 신학적 의미

교훈은 교회의 교리와 윤리를 세우는 중요한 기초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바른 교훈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순종으로 이어지며, 교회의 건강한 성장을 이끕니다. 잘못된 교훈은 혼란과 분열을 야기하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흐리게 만듭니다. 따라서 참된 교훈은 단지 정답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삶과 공동체적 사랑을 낳는 진리여야 합니다.

 


❖ 사랑 (ἀγάπη / 아가페)

 

✦ 뜻과 의미

헬라어 아가페(ἀγάπη)는 무조건적이며 희생적인 사랑을 뜻합니다. 이는 인간적 감정이나 친밀감에서 비롯된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성과 구속적 행위에서 비롯된 신적 사랑입니다.

 

✦ 본문에서의 의미

5절에서 바울은 “이 교훈의 목적은 사랑”이라고 말하며, 사랑이야말로 참된 교훈이 추구해야 할 열매임을 명확히 합니다. 이 사랑은 단순한 도덕적 선행이나 인간적 호의가 아니라, 청결한 마음, 선한 양심, 거짓 없는 믿음이라는 복음적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 신학적 의미

아가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절정에 이르며, 성도의 삶 속에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타인을 섬기는 실천으로 드러납니다(요 13:34–35).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이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 했고, 갈라디아서 5:6에서는 믿음이 사랑으로 역사하는 것이 전부라고 말합니다. 사랑은 복음의 본질이며, 교훈과 진리의 최종 목적입니다.

 


❖ 양심 (συνείδησις / 쉬네이데시스)

 

✦ 뜻과 의미

헬라어 쉬네이데시스(συνείδησις)는 ‘공동 인식’을 뜻하는 합성어로, ‘자기 내면의 도덕적 판단 기능’, 곧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자기 자신을 평가하는 영적 감각을 의미합니다.

 

✦ 본문에서의 의미

5절에서 바울은 바른 교훈의 열매로 ‘선한 양심’을 언급합니다. 이는 단지 윤리적 판단력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을 비추어 볼 수 있는 정직하고 민감한 심령을 가리킵니다. 선한 양심은 죄를 인식하고 회개로 나아가게 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복하게 만듭니다.

 

✦ 신학적 의미

양심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창조 때부터 심어주신 도덕적 기능이지만, 죄로 인해 더러워지고 무디어질 수 있습니다(딛 1:15, 딤전 4:2). 그러나 복음은 이 양심을 정결하게 하여(히 9:14),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 안에서 살아가게 합니다. 선한 양심은 신앙의 본질이며, 성화의 핵심 조건입니다. 이는 단지 윤리적 성실함을 넘어서, 복음에 반응하는 살아있는 믿음의 신호입니다.


❖ 율법 (νόμος / 노모스)

 

✦ 뜻과 의미

헬라어 노모스(νόμος)는 ‘율법, 법규, 규범’을 의미하는 일반 명사로, 구약 성경의 율법(특히 모세오경)을 가리키며, 신적 계시로서 하나님의 의와 거룩을 드러내는 기준으로 사용됩니다.

 

✦ 본문에서의 의미

8절 이하에서 바울은 율법이 본래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위해 주어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당시 에베소 교회 안에는 율법을 자신을 정당화하거나 권위를 세우는 수단으로 남용하는 자들이 있었고, 바울은 이러한 율법의 오용을 강하게 경고합니다.

 

✦ 신학적 의미

율법은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을 나타내는 기준이지만, 인간의 죄로 인해 구원의 길이 될 수 없습니다(롬 3:20). 바울은 율법이 죄를 드러내고 인간으로 하여금 복음의 은혜를 사모하게 만드는 기능을 한다고 설명합니다(갈 3:24). 율법을 적법하게 사용하는 것은 복음을 더욱 선명하게 하며, 복음은 율법의 완성(롬 10:4)입니다. 교회는 율법을 존중하되, 그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복음의 중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복음 (εὐαγγέλιον / 유앙겔리온)

 

✦ 뜻과 의미

헬라어 유앙겔리온(εὐαγγέλιον)은 ‘좋은 소식’을 뜻하며,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그로 인한 죄 사함과 구원의 메시지를 가리킵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는 기쁨의 소식입니다.

 

✦ 본문에서의 의미

11절에서 바울은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이라 표현하며, 복음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강조합니다. 이 복음은 바울에게 맡겨진 사명이며, 디모데가 수호해야 할 진리의 중심입니다. 복음은 단순한 메시지가 아니라, 교회의 모든 교훈과 사역의 기준이 됩니다.

 

✦ 신학적 의미

복음은 인간의 자격과 조건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언입니다. 이는 단지 죄 사함만이 아니라, 새로운 삶과 공동체의 시작이며, 그리스도 중심적 세계관의 핵심입니다. 복음이 교회의 중심에서 벗어날 때, 교회는 기능적으로는 남지만 영적으로는 무너집니다. 바울은 복음 자체가 교훈이며, 복음이 교회의 윤리와 리더십을 모두 규정한다고 강조합니다.

 


📖 절별 주해

1절 | 사도직의 정당성과 신적 소명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바울은 이 편지의 서두에서 자신의 사도직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명령과 소명에 따라 세워졌음을 강조합니다. ‘우리 구주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하나님 아버지의 구속적 속성을 부각시키는 동시에, 복음의 시작이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환기시킵니다. 동시에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는 표현은 당시 박해와 세속문화 속에 있던 교회에게, 신앙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분 안에 모든 영원한 소망이 있음을 선포합니다. 이는 단지 바울 개인의 신앙고백이 아니라, 편지를 받는 디모데와 에베소 공동체 전체가 붙들어야 할 신앙의 기준을 설정하는 선언입니다. 바울이 스스로를 ‘사도’라 칭하는 이유는 자격이나 능력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과 부르심에 의해 보냄받은 자임을 밝히기 위함이며, 이는 교회의 가르침이 인간의 권위가 아닌 하나님의 권위에 기초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기 위한 서술입니다.

 


2절 | 영적 아들 디모데를 향한 축복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바울은 디모데를 ‘믿음 안에서 참 아들’이라 부릅니다. 이는 단순히 복음 전도의 열매라는 차원을 넘어, 깊은 영적 동행과 제자됨의 관계를 보여주는 말입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처음 만나 데려갈 때부터(행 16:1-3), 그의 삶을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에 헌신하도록 인도했고, 이제는 자신이 감당했던 목회적 책임을 이어받게 한 후계자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축복, 즉 ‘은혜와 긍휼과 평강’은 단지 형식적인 인사가 아니라, 디모데가 감당해야 할 사역의 무게를 고려한 실제적 축복입니다. ‘은혜’는 사명을 감당케 하는 하나님의 공급이며, ‘긍휼’은 약함과 실수 속에서도 베푸시는 하나님의 용납, ‘평강’은 외적 갈등과 내적 두려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중심입니다. 이는 오늘날 사역자나 신자 모두가 날마다 받아야 할 삼중적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3절 | 에베소에 머무는 목적: 다른 교훈을 막기 위해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이 절은 바울이 디모데를 에베소에 남겨둔 사역적 배경을 밝히는 대목입니다. 에베소는 바울이 3차 선교여행 동안 가장 오랫동안 머물며 목회적 기반을 세운 도시였으나(행 19장), 시간이 흐르며 교회 안에 이상한 가르침들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다른 교훈’은 헬라어로 ἑτεροδιδασκαλεῖν인데, 이는 ‘이질적인 가르침’, 즉 복음의 핵심에서 벗어난 왜곡된 교훈을 뜻합니다. 이는 단순한 차이 정도가 아니라, 공동체를 병들게 하고 신앙을 오도하는 위험한 내용들이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이 거짓 교훈을 분별하고 차단하는 일에 집중하길 원했습니다. 이는 오늘날 교회가 바른 교리의 정립과 말씀 중심의 사역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고 지켜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본문입니다.

 


4절 | 헛된 신화와 족보의 위험성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바울은 당시 교회 안에서 통용되던 두 가지 문제적 가르침을 지적합니다. 첫째는 ‘신화’이며, 이는 유대 전통 안에 혼합된 민간 이야기나 유사 종교 전승으로, 실체 없는 상상과 억측을 정통 교리처럼 퍼뜨리던 내용입니다. 둘째는 ‘끝없는 족보’인데, 이는 아브라함부터 시작되는 혈통 중심의 정체성을 강조하며, 신앙적 우열을 족보를 통해 증명하려는 시도였습니다. 이런 요소들은 결국 구속사 중심의 복음 이해를 흐리게 만들고, 불필요한 논쟁과 파벌을 조장하였습니다. 바울은 이런 교훈들이 하나님의 경륜, 즉 ‘믿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의 계획’을 이루기보다, 오히려 공동체 내에 분열과 혼란을 일으킨다고 경고합니다. 오늘날에도 비본질적인 문제에 몰두하며 본질을 놓치는 신앙의 유혹은 여전합니다.


5절 | 교훈의 참된 목적은 사랑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바울은 복음 교훈의 궁극적 목적이 사랑임을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이는 당시 교회 안에서 오용되던 율법주의적 교훈이나 지식 자랑, 족보 논쟁과는 전혀 다른 본질을 강조하는 것으로, 교훈의 결과는 반드시 사람을 살리고 공동체를 세우는 사랑의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신학적 기준을 제시합니다.

하지만 이 사랑은 감정적 호의나 인본주의적 친절이 아닙니다. 바울은 세 가지 조건을 제시합니다. ‘청결한 마음’은 정결함과 순수한 동기를 의미하며, 외식이 없는 내면의 순전함입니다. ‘선한 양심’은 진리를 따라 살아가려는 실천적 내면의 기준이며, 도덕적 감각뿐 아니라 복음으로 새로워진 성도의 심령을 뜻합니다. ‘거짓 없는 믿음’은 위선 없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신뢰하는 신앙의 본질을 나타냅니다.

결국 이 모든 것이 만들어내는 열매는 사랑이며, 이 사랑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중심이자 교회의 사명입니다. 교훈은 단지 뇌의 정보가 아니라, 심장을 변화시키는 힘이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전하고 배우는 모든 말씀의 목적이 이 사랑에 도달하고 있는지를 깊이 돌아봐야 합니다.

 


6절 | 진리에서 벗어난 자들의 헛된 열심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바울은 앞서 말한 교훈의 본질에서 벗어난 사람들에 대해 경고합니다. 그들은 청결한 마음도, 선한 양심도, 진실한 믿음도 없이 겉모양만 남은 말장난과 언변에 사로잡힌 자들이었습니다. ‘헛된 말’(ματαιολογία)은 신약 성경에서 매우 부정적인 어휘로, 실체 없는 교훈, 공허한 논쟁, 교만한 말장난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진리의 중심인 사랑을 잃어버리고, 말로만 가르치고 지적으로만 논쟁하는 신앙의 외형을 쫓았습니다. 교회 안에서 참된 교훈은 반드시 삶과 실천으로 연결되어야 하지만, 이들은 말에 치우치며 오히려 공동체를 혼란에 빠뜨리는 자들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진리의 길에서 ‘벗어나’(ἀστοχέω, 과녁을 빗맞히다) 다른 길로 갔음을 지적합니다. 이는 단순한 무지의 문제가 아니라, 방향 자체를 상실한 신앙의 비극을 보여줍니다.

오늘날에도 실천 없는 지식, 사랑 없는 정의, 복음 없는 교리는 쉽게 ‘헛된 말’이 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아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사랑으로 살아내는 것이 복음적 제자의 모습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7절 | 율법의 선생이 되려는 자들의 무지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자기가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이 절은 바울의 냉철하고 단호한 진단이 담긴 구절입니다. 율법의 선생이 되려는 자들은 자신이 율법에 능하다고 자처하지만, 정작 자신이 말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그 확신의 근거가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율법의 선생’이라는 표현은 원래 존중받는 영적 권위를 지닌 위치였으나, 바울은 이들이 진정한 율법의 정신을 이해하지 못한 채, 외형적인 조항만 붙들고 사람을 판단하는 모습으로 전락했다고 고발합니다. 율법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두 계명을 중심으로 모든 규례가 해석되어야 했지만(마 22:37–40), 이들은 조문과 지식을 수단 삼아 자신을 높이고 타인을 판단하는 교만한 자들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잘못된 교사들은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 있을 수 있습니다. 많은 지식과 화려한 언변이 있을지라도, 그 안에 그리스도의 마음과 복음의 본질이 없다면, 그 가르침은 사람을 죽이는 율법이 되고 맙니다. 바울은 그 뿌리를 ‘무지함’에 있다고 진단합니다. 이는 단순히 정보를 몰라서가 아니라, 복음을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영적 무지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요청하는 것은, 이러한 자칭 ‘교사’들과 진정한 복음의 선생을 분별하고 교회가 바른 길로 가도록 붙드는 사명입니다.

 


8절 | 율법의 올바른 용도

“그러나 율법은 사람이 그것을 적법하게만 쓰면 선한 것임을 우리는 아노라”

 

바울은 율법 자체가 본질적으로 선하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율법은 하나님의 의와 거룩을 드러내는 귀한 도구이며, 인간이 그것을 ‘적법하게’, 즉 올바른 용도와 목적에 맞게 사용할 때 그 가치는 온전히 드러난다고 강조합니다.

율법은 죄를 밝히고, 인간의 불의를 드러내며, 하나님의 기준 앞에서 자신을 낮추게 하는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롬 7:7). 그러나 율법을 자기 의를 세우는 수단으로 삼거나,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잣대로 사용하는 것은 그 선한 율법을 왜곡시키는 일입니다. ‘적법하게 쓴다’는 것은 율법이 복음을 준비시키는 기능으로, 인간을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사모하게 만드는 목적에 부합할 때를 말합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도덕과 윤리를 강조하는 많은 교훈이 있지만, 그것이 복음으로 연결되지 않을 때 오히려 사람을 정죄하고 묶는 율법주의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율법은 복음을 향한 이정표이지, 구원의 도착지는 아닙니다. 바울은 이 균형을 분명히 하며, 디모데에게도 그 분별력을 가지도록 권면합니다.

 


9–10절 | 율법이 겨냥하는 죄의 목록

"알 것은 이것이니 율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와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과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와 아버지를 죽이는 자와 어머니를 죽이는 자와 살인하는 자며 음행하는 자와 남색하는 자와 인신 매매를 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거짓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를 위함이니"

 

바울은 이제 율법이 실제로 겨냥하고 있는 죄의 목록을 구체적으로 열거합니다. 이는 당시 율법의 오용을 반박하는 차원에서, 율법이 ‘의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죄인’을 위한 것이라는 성경적 정의를 다시 세우는 작업입니다. 나열된 죄들은 단지 개인의 윤리적 실수가 아니라, 공동체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는 구조적이며 근본적인 죄입니다.

여기에는 불법한 자,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 경건하지 않은 자, 살인자, 음행하는 자, 동성 간 성행위를 행하는 자(‘남색하는 자’), 인신매매자, 거짓말하는 자, 거짓 맹세자 등 사회적, 윤리적, 성적 죄악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목록은 율법이 필요로 하는 대상이 누구이며, 율법의 기능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바울의 관점에서 율법은 죄를 고발하고 정죄하지만, 결국 복음을 통해서만 구원의 길이 열린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라는 표현은 이 죄악들이 단지 사회적 윤리를 위반하는 차원이 아니라, 복음의 진리와 하나님의 뜻 자체를 정면으로 대적하는 것임을 나타냅니다. 복음은 우리의 죄를 덮는 것이 아니라, 그 죄를 드러낸 후 은혜로 끌어안아 회복시키는 능력입니다.

 


11절 | 복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진리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름이니라”

 

바울은 이제 본문의 핵심을 ‘복음’으로 정리합니다. 모든 교훈과 율법 해석, 교회 지도자의 사명은 결국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르는 것에 있습니다. 여기서 ‘복되신’(μακάριος)은 하나님 자신이 본질적으로 복의 근원이시며, 그분의 복음 자체가 영광의 통로임을 강조합니다.

복음은 죄인을 부르고, 무지한 자를 깨우치며, 공동체를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구속의 메시지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이 복음을 ‘맡은 자’로서 살아간다는 사실에 깊은 책임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디모데 역시 이 복음의 수호자이자 전달자임을 자각해야 했습니다. 이 복음은 인간 중심적 도덕도 아니고, 율법적 계율도 아닌, 하나님 중심의 은혜의 메시지이며, 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있습니다.

복음이 모든 교훈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선언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 울림을 줍니다. 무엇을 가르치느냐보다, 그 가르침이 복음에 기초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는가를 점검하는 것이야말로 진리의 핵심입니다.


📖 묵상

바울의 편지는 언제나 시작부터 '진중함'과 ‘무게감’이 느껴집니다.
디모데를 향한 사랑 어린 부름 속에서도, 바울은 그가 감당해야 할 사명의 엄중함을 숨기지 않습니다.

“에베소에 머물라.”

이 말 한마디 안에 담긴 마음의 깊이를, 오늘 저는 조용히 떠올려봅니다.

 

당시 에베소는 진리의 중심이 되어야 할 교회 안에서조차, 복음의 본질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교훈’에 몰두했고, 율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가르치려 들었습니다.
바울은 그런 상황 속에 젊은 디모데를 남겨두며 말합니다.

“사람을 세우는 것은 사랑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청결한 마음, 선한 양심, 거짓 없는 믿음에서 온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 앞에서 문득 제 안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내가 말하는 이 교훈은, 정말 사랑으로 향하고 있는가?

내 목소리는 사람의 마음을 맑게 하고 있는가?

아니면… 조용히 누군가의 마음에 무게를 더하고 있는 건 아닐까?

 

바울이 본문 후반에서 율법을 말할 때, 그는 무겁고 엄격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율법은 ‘의인을 위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그 안에서 우리 모두가 죄인임을 인정하게 만듭니다.
복음은 이처럼, 사람을 판단하게 하지 않고, 사랑으로 품게 합니다.
사람을 살게 하는 진리는 언제나 ‘사랑’의 모습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맡은 사람은, 지식보다 더 큰 것을 품고 있어야 합니다.

바로, 사랑으로 말하려는 용기,

진실함으로 사람을 바라보는 눈,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이 나를 먼저 품어주셨다는 기억입니다.

 

바울과 디모데는 그 길 위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도 그 길 위에 서 있습니다.

누구에게 말할 때든, 무엇을 가르칠 때든, 내 마음 안에 ‘사랑’이 있는지.

그 물음 앞에 오늘도 조용히 멈추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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