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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1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1 My voice rises to God, and I will cry aloud; My voice rises to God, and He will hear me.
2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나니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2 In the day of my trouble I sought the Lord; In the night my hand was stretched out without weariness; My soul refused to be comforted.
3 내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심령이 상하도다 (셀라)
3 When I remember God, then I am disturbed; When I sigh, then my spirit grows faint. Selah.
4 주께서 내가 눈을 붙이지 못하게 하시니 내가 괴로워 말할 수 없나이다
4 You have held my eyelids open; I am so troubled that I cannot speak.
5 내가 옛날 곧 지나간 세월을 생각하였사오며
5 I have considered the days of old, The years of long ago.
6 밤에 부른 노래를 내가 기억하여 내 심령으로, 내가 내 마음으로 간구하기를
6 I will remember my song in the night; I will meditate with my heart, And my spirit ponders:
7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7 Will the Lord reject forever? And will He never be favorable again?
8 그의 인자하심은 영원히 끝났는가, 그의 약속하심도 영구히 폐하였는가,
8 Has His lovingkindness ceased forever? Has His bpromise come to an end forever?
9 하나님이 그가 베푸실 은혜를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가 베푸실 긍휼을 그치셨는가 하였나이다 (셀라)
9 Has God forgotten to be gracious, Or has He in anger withdrawn His compassion? Selah.
📖 본문 배경
❖ 개요
시편 77편은 깊은 고난과 신앙의 혼란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는 아삽의 시입니다. 표제에 따르면 이 시는 “여두둔”이라는 곡조로 부를 수 있도록 성가대 지휘자를 위한 찬양시로 기록되었습니다. 아삽은 다윗 시대의 찬양 인도자이자 시인으로, 그의 이름으로 된 시들은 주로 공동체의 고난, 신앙적 혼란,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회고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77편 전체 구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1–9절은 시인의 탄식과 내면의 절망, 10–20절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기억하며 희망을 되찾는 회복의 흐름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인 1–9절은 시인이 하나님의 응답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불면의 밤과 끊임없는 기도, 하나님에 대한 질문들을 통해 신앙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는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이 시편은 단순한 개인의 감정 표현을 넘어, 오늘날에도 반복되는 신자의 영적 침묵기, 신앙의 시험기 속에서 위로와 공감을 제공하는 말씀입니다.
❖ 역사적 배경
시편 77편은 구체적인 시대적 배경이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시 전체의 분위기와 신학적 질문의 성격상 바벨론 포로기 혹은 예루살렘 멸망 이후의 절망적인 상황과 맞닿아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 “그의 인자하심은 영원히 끝났는가?”, “그의 약속하심도 영구히 폐하였는가?”(8절)라는 신학적 절망의 질문을 던지며, 이스라엘 역사에서의 하나님의 신실하심조차 의심받는 상황을 보여줍니다.
이는 개인의 슬픔을 넘어 공동체 전체의 신앙적 위기를 대변하는 탄식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당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부재와 구원의 지연 앞에서 느낀 무력함과 당혹감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 문화적 배경
이 시편의 배경에는 고대 이스라엘 예배의 정서와 표현 방식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나니’(2절)라는 표현은 히브리 전통에서 밤중 기도를 드리는 관습과 관련되며, 전인격적 기도의 모습을 나타냅니다.
‘셀라’(3, 9절)는 음악적 멈춤을 뜻하는 용어로, 시편의 독자나 찬양하는 이들이 의미를 깊이 묵상하도록 초대하는 도구입니다.
5–6절에 등장하는 ‘지나간 세월’과 ‘밤의 노래’는 고대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행적을 회상하며 노래로 기억하는 전통을 보여주며, 이는 이후 10절 이하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기억하는 전환점으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표현들은 단순한 시적 장치가 아닌, 영적 기억과 신앙 회복의 통로로서의 예배를 드러냅니다.
❖ 신학적 배경
시편 77편 1–9절은 성경 속에서 영적 침묵기 속 신자의 고백과 질문을 매우 사실적으로 드러내는 시편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귀를 향해 간절히 부르짖지만, 하나님의 침묵과 자신의 불안, 위로받기를 거절하는 내면의 상처 앞에서 절망에 빠집니다. 그러나 이 모든 질문들은 신앙의 포기나 이탈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던지는 신자의 신앙적 몸부림입니다.
7–9절에 나타난 여섯 가지 질문은 ‘하나님의 버리심, 은혜의 중단, 인자하심의 종료, 약속의 폐지, 은혜의 망각, 긍휼의 중단’이라는 극단적인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시인이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얼마나 절박하게 원하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러한 질문들은 구약에서만이 아니라, 신약에서도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라고 고백하신 장면과도 상응합니다. 이는 시편 77편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깊은 고난과 중보의 예표로도 이해될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따라서 본 시편은 고통과 침묵 속에서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기억함으로 다시 일어서려는 신자의 신앙 여정을 말해주는 귀중한 말씀입니다. 오늘날 믿는 자가 겪는 영적 침체, 불면의 고통, 믿음의 흔들림 속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찾을 수 있도록 이끌어 줍니다.
📖 본문 요약
시편 77편의 전반부(1–9절)는 깊은 고통 가운데 하나님께 부르짖는 시인의 탄식으로 가득합니다. 시인은 자신의 음성으로 하나님께 절박하게 부르짖으며, 그분이 귀를 기울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기도나 형식적인 예배가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고통의 외침입니다. 그는 환난 날에 하나님을 찾았고, 밤새도록 손을 들고 기도했지만, 그의 영혼은 위로받기를 거절합니다. 고통이 너무 크고 현실이 너무 냉혹하여, 어떤 위로도 그의 마음에 닿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기억해 보지만, 그 기억조차 불안과 근심을 더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지만, 지금의 현실은 도무지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없게 만듭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그는 잠조차 이루지 못하고, 말문이 막히며 괴로움으로 몸부림칩니다. 이처럼 시인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긴 듯한 깊은 영적 침체 속에서 괴로워하고 있으며, 그 절망의 무게는 심령 전체를 압도합니다.
이런 고통 속에서 시인은 기억이라는 통로를 붙듭니다. 그는 지나간 세월, 곧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구원을 베풀어주셨던 날들을 되새깁니다. 밤의 고요 속에서 과거의 찬송과 노래를 떠올리며, 자신의 마음과 영혼을 향해 질문을 던집니다. 그 질문은 단지 회상을 넘어, 현재의 고통을 해석하려는 신앙적 씨름입니다.
결국 시인은 하나님께 여섯 가지의 신학적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이 영원히 버리셨는가?”,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않으시는가?”, “그분의 인자하심은 끝났는가?”, “약속은 무효가 되었는가?”, “은혜를 잊으셨는가?”, “긍휼을 거두셨는가?” 이 질문들은 하나님에 대한 절망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붙드는 절규입니다. 응답이 없고 상황은 변하지 않지만, 여전히 하나님께 말하고, 묻고, 울부짖는 이 시인의 태도는 신앙의 깊이를 보여줍니다.
시편 77편 1–9절은 신앙의 길에서 누구나 맞닥뜨릴 수 있는 영적 침묵의 시간을 정직하게 드러냅니다. 하나님이 멀리 계신 것 같고, 기도는 허공에 흩어지는 듯할 때, 우리는 이 시편을 통해 우리의 고통과 질문도 말씀 안에서 충분히 담아낼 수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런 절규조차 외면하지 않으시는 분이며, 때로 응답보다 중요한 것은 그분 앞에 계속 서 있으려는 믿음의 자세임을 시인은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 붙잡는 말씀
2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나니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이 구절은 고통과 어둠 속에서 하나님을 찾는 자의 절박한 몸부림과 영혼의 내밀한 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시인은 ‘환난 날’에 하나님을 찾습니다. 위기를 맞이한 그의 반응은 회피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정직한 간구입니다. 이는 우리 신앙의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고통 속에서 등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이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것. 시인은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아도, 응답이 없어도, 밤새도록 손을 들고 거두지 않습니다. 기도의 지속성, 그것이 믿음의 언어입니다.
하지만 이 구절의 중심은 아이러니하게도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라는 표현에 있습니다. 이 말은 단순히 위로가 되지 않았다는 뜻을 넘어, 상처받은 심령이 어떤 위로도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닫혀 있는 상태를 묘사합니다. 시인의 내면은 너무 아프고 메말라, 말씀이 들리지 않고 사람의 말도 통하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은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 모두가 언젠가 마주하게 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손을 들고 있지만, 위로는 요원한 시간. 그 시간이 지나가지 않을 것처럼 느껴질 때, 우리는 종종 이 구절 앞에서 멈추게 됩니다.
그러나 시인은 바로 그 자리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는 이 상태를 있는 그대로 하나님 앞에 드러내며, 거절된 위로의 자리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붙듭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위로받지 못했지만, 위로하실 수 있는 분께 여전히 손을 들고 있는 것. 해답을 얻지 못했지만, 해답이신 분 앞에 머물러 있는 것.
우리의 삶에도 종종 그런 밤이 찾아옵니다. 설명할 수 없는 고통, 침묵하시는 하나님, 터져 나오는 질문들. 그럴 때 우리는 시편 77편 2절 앞에 멈춰서야 합니다. 그리고 시인처럼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지만, 나는 여전히 주를 찾습니다. 나는 아직도 손을 들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오늘 우리의 신앙을 향해 질문합니다.
“너는 고통의 밤에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위로받지 못해도 여전히 하나님을 붙들고 있는가?”
믿음은 감정의 안정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손이 느껴지지 않아도 그 손을 찾는 지속적인 신뢰의 행위입니다. 오늘 그 믿음의 자리로, 다시 손을 들고 나아가야 할 때입니다.
📖 단어 연구
❖ 부르짖다 (צָעַק / 차아크)
✦ 뜻과 의미
차아크는 ‘크게 외치다’, ‘울부짖다’, ‘도움을 요청하다’는 의미를 가진 동사입니다. 단순한 음성의 고조가 아니라, 내면의 절박함이 폭발하듯 드러나는 외침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감정의 격렬함과 고통의 깊이를 표현할 때 자주 사용됩니다.
✦ 본문에서의 의미
시편 77:1에서 시인은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라고 선언하며, 하나님을 향한 의도적이며 공개적인 절규를 드러냅니다. 이 부르짖음은 침묵이 아닌 반응을 기대하며, 신앙의 행위로서의 울부짖음입니다. 시인은 말로 기도할 수 없을 만큼 괴로워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께 자신의 상태를 토로합니다.
✦ 신학적 의미
성경 전체에서 ‘부르짖다’는 표현은 종종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는 전환점으로 등장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이 들으셨고(출 2:23–25), 시편에서는 반복적으로 ‘하나님은 부르짖는 자의 음성을 들으신다’는 확신이 강조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부르짖으심으로써 인간의 고통을 온전히 짊어지신 절규를 드러내셨습니다(마 27:46). 부르짖음은 절망이 아니라, 은혜를 기대하는 신앙의 언어입니다.
❖ 위로하다 (נֶחָם / 네함)
✦ 뜻과 의미
네함은 ‘위로하다’, ‘유화하다’, 때로는 ‘마음을 돌이키다’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이 단어는 종종 감정적 안정을 주는 행위, 혹은 사람의 절망을 다독이는 하나님의 자비 행위를 뜻합니다.
✦ 본문에서의 의미
시인은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2절)라고 고백하며, 위로의 가능성 자체를 닫아버린 영혼의 상태를 드러냅니다. 이는 단순히 위로가 오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너무 상해서 어떤 위로도 받아들일 수 없는 정서적 마비를 나타냅니다.
✦ 신학적 의미
하나님은 자주 ‘위로의 하나님’으로 묘사됩니다(사 40:1, 고후 1:3). 하지만 시편 77편처럼 위로가 더디게 느껴질 때, 하나님과의 관계는 긴장 속으로 들어갑니다. 신앙의 여정에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위로를 느끼지 못하는 시간, 혹은 위로를 거부하게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이때 ‘네함’은 단지 감정 회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시 마음을 움직여 주시는 은혜를 기다리는 자세로 연결됩니다.
❖ 기억하다 (זָכַר / 자카르)
✦ 뜻과 의미
자카르는 ‘기억하다’, ‘상기하다’, ‘언급하다’는 뜻을 가진 동사로, 단순한 기억 이상의 의식적 회상과 신앙적 되새김을 포함합니다.
✦ 본문에서의 의미
시인은 “내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3절)라고 말하며, 기억이 위로가 아니라 오히려 불안을 야기하는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이는 과거의 은혜를 떠올리지만, 현재와의 괴리로 인해 더욱 큰 상실감을 느끼는 모습입니다.
✦ 신학적 의미
성경에서 ‘기억하다’는 단순히 과거를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언약에 충실한 하나님의 행동을 다시 부르는 행위입니다. 하나님도 그분의 언약을 기억하시며 행동하십니다(창 9:15, 출 2:24). 따라서 시편 77편의 ‘기억’은 하나님께로 다시 나아가는 신앙적 출발점입니다. 이후 10절 이하에서 시인은 기억을 통해 믿음을 회복하게 됩니다.
❖ 인자하심 (חֶסֶד / 헤세드)
✦ 뜻과 의미
헤세드는 구약에서 가장 중요한 언약적 단어 중 하나로, ‘변하지 않는 사랑’, ‘신실한 자비’, ‘언약에 근거한 선하심’을 의미합니다. 일반적인 자비나 호의가 아닌,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함이 내포된 단어입니다.
✦ 본문에서의 의미
시인은 8절에서 “그의 인자하심은 영원히 끝났는가”라고 묻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본래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근원적 질문이며, 동시에 그분의 성품이 현실 속 고통과 충돌할 때 발생하는 영적 딜레마를 나타냅니다.
✦ 신학적 의미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의미하며, 이는 신약의 ‘아가페’와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때로 침묵하시지만, 그분의 본질은 인자하심이시며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시인의 질문은 결국 이 진리를 재확인하기 위한 씨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헤세드’가 사라진 것처럼 느낄 수 있으나, 그 체험의 부재가 곧 진리의 부재는 아님을 이 시편은 가르칩니다.
❖ 긍휼 (רַחַם / 라함)
✦ 뜻과 의미
라함은 ‘불쌍히 여기다’, ‘자비를 베풀다’, ‘부드럽게 품다’는 뜻을 가진 단어로, 어원상 모태(자궁)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는 깊은 본능적 연민과 보호의 감정을 동반하는 단어입니다.
✦ 본문에서의 의미
시인은 9절에서 “노하심으로 그가 베푸실 긍휼을 그치셨는가?”라고 묻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이제 더는 자비를 베풀지 않으시는 것 아닌가 하는 절망의 물음이며, 하나님의 감정이 진리보다 우선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흔들림을 드러냅니다.
✦ 신학적 의미
하나님의 긍휼은 단지 감정이 아니라, 그분의 본질에서 흘러나오는 성품의 표현입니다. 신약에서 예수님은 자주 사람들을 보시고 ‘긍휼히 여기셨다’고 기록되어 있으며(마 9:36), 이는 하나님의 마음이 가장 명확히 드러나는 장면입니다. 시편 77편의 이 질문은 긍휼을 믿으면서도 경험하지 못하는 자의 내면 갈등을 대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은 결코 멈추지 않으며, 그 침묵조차도 결국은 회복을 위한 준비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 절별 주해
❖ 1절 │ 하나님을 향한 반복된 외침, 응답을 구하는 믿음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라는 반복적 표현은 시인의 내면에 일어난 절박함을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부르짖다’는 히브리어 차아크는 단순히 소리 내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건 외침, 존재 전체를 걸고 하나님께 기댐을 표현하는 강렬한 언어입니다. 시인은 여전히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신앙적 확신을 간직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도 응답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부르짖습니다. 이는 고통 중에도 여전히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려는 믿음의 본능적인 방향성을 보여줍니다.
❖ 2절 │ 멈추지 않는 손, 그러나 닫힌 위로
시인은 고난의 날에 주를 찾았고, 밤새도록 손을 들고 기도했지만, 그 영혼은 위로 받기를 거절했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거두지 아니하였다’는 표현은 기도의 지속성과 끈질김을,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다’는 고백은 상처가 너무 깊어 어떤 위로도 받아들일 수 없는 폐쇄된 심령의 상태를 보여줍니다. 이는 종교적 외면이 아닌, 절박하지만 마비된 영혼의 정직한 자화상이며, 우리가 신앙 안에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어두운 밤의 모습입니다.
❖ 3절 │ 기억이 가져온 불안, 신앙과 현실의 충돌
“내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라는 고백은 아이러니를 담고 있습니다. 기억은 통상 희망을 주는 통로이지만, 여기서는 과거의 은혜가 현재의 침묵과 충돌하며 더 큰 정서적 동요를 일으킵니다. ‘심령이 상하도다’는 표현은 이 내면의 갈등이 단순한 감정의 문제가 아닌, 존재의 기반이 흔들리는 깊은 신앙적 고뇌임을 보여줍니다. ‘셀라’는 이 절에서 한숨처럼 멈춰 선 시인의 마음을 독자에게도 전달하며, 믿음의 깊은 시름을 함께 숙고하게 만드는 음악적 쉼표입니다.
❖ 4절 │ 잠을 앗아가신 하나님, 말문이 막힌 영혼
‘눈을 붙이지 못하게 하시니’라는 고백은 불면증을 넘어,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시인을 깨우셨다는 인식을 드러냅니다. 이는 불평이 아니라, 자신이 온전히 하나님께 붙들려 있음을 인식한 표현입니다. ‘말할 수 없나이다’는 구절은 기도가 중단된 것이 아니라, 말보다 큰 괴로움이 내면을 점령한 상태를 보여주며, 고통의 절정에서 말보다 깊은 침묵이 흘러나오는 영적 순간을 형상화합니다.
❖ 5절 │ 지나간 날들 속에서 찾는 흔적
‘옛날’, ‘지나간 세월’은 하나님과의 동행의 기억을 가리킵니다. 시인은 지금의 현실이 너무 낯설고 암담하여 과거의 확실했던 은혜를 의도적으로 소환합니다. 그러나 이 회상은 아직은 희망이 아닌, 상실의 실감입니다. 이 구절은 과거를 돌아보는 것이 항상 현재를 회복시키지는 않는다는 신앙 여정의 현실적 면모를 보여주며,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준비 단계로 기능합니다.
❖ 6절 │ 마음의 깊은 곳에서의 씨름
시인은 밤의 노래를 기억하며 자신의 심령과 마음을 향해 간구합니다. ‘심령으로’, ‘마음으로’라는 반복은 단순한 감정 표현이 아닌, 존재 전체로 하나님을 향해 질문하고 씨름하는 모습입니다. 이 구절은 외면적인 기도가 아닌 내면의 깊은 내적 탐색과 신앙적 자기 성찰의 시작을 나타냅니다. 동시에 이 간구는 아직 해답이 없는 상태에서 ‘왜 응답하지 않으시는가’라는 내면의 물음으로 이어지는 전환점이 됩니다.
❖ 7–9절 │ 여섯 번의 질문, 믿음을 붙드는 절망의 기도
세 절에 걸쳐 시인은 총 여섯 가지의 질문을 쏟아냅니다. 이 질문들은 모두 하나님의 성품과 언약에 대한 깊은 의문을 담고 있으며, 하나님이 여전히 신실하신 분인가라는 질문으로 모입니다. ‘버리셨는가’, ‘은혜를 거두셨는가’, ‘인자하심이 끝났는가’와 같은 질문은 불신앙의 도전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간절한 발버둥입니다. 고통이 클수록 시인은 그만큼 더 하나님께 붙들려 있으며, 그 안에서 실낱같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 애씁니다. 마지막의 ‘셀라’는 이 모든 신앙적 갈등과 질문 앞에, 기억과 신뢰의 회복을 위한 정지와 묵상의 시점을 제시합니다.
📖 묵상
어느 날 밤, 불을 끄고 누웠는데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몸은 지쳐 있었지만, 마음이 고요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음속엔 끝없는 질문들이 솟아올랐고, 하나님께 드린 기도는 메아리 없이 허공에 머무는 듯했습니다. 손을 들어 기도해도, 위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말도, 익숙한 찬양도 위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위로받기를 거절한 것처럼, 내 마음은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시편 77편의 시인은 바로 그런 밤을 지났습니다. 환난의 날, 밤새 손을 들고 기도했지만 응답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기억했지만, 그 기억은 오히려 근심이 되었습니다. 지나간 은혜가 현재의 고통을 가늠하게 만들고, 내면은 깊어지는 혼란으로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리고 시인은 질문합니다. 하나님이 영원히 우리를 버리신 것은 아닐까? 이제는 은혜도, 인자하심도, 긍휼도 멈추신 것일까?
이러한 질문은 믿음이 없는 자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성품을 신뢰했던 자이기에 던질 수 있는 질문입니다. 여섯 번의 신학적 물음은 모두 “하나님이 이런 분이시라면, 지금은 왜 이러실까?”라는 깊은 내적 고뇌입니다. 하나님께 실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기에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시간을 지나갑니다. 기도해도 상황은 바뀌지 않고, 기억조차 위로가 되지 않는 밤. 그 밤에 우리는 부르짖는 법을 배우고,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여전히 손을 들고 있는 법을 배웁니다. 시인은 결국 10절 이후에 하나님의 옛날 행적을 다시 회상하며 믿음을 회복합니다. 하지만 그 회복은, 오늘의 본문인 1–9절이라는 깊은 영적 터널을 통과한 이후에야 가능했습니다.
믿음은 늘 강하고 확신에 찬 것이 아닙니다. 때론 무너질 듯 흔들리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향해 질문을 던지는 그 태도 속에 믿음이 자라납니다. 오늘, 우리 안에 그런 묵상이 필요합니다. 침묵의 밤에도 기도의 손을 거두지 않고, 위로가 되지 않아도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놓지 않는 것. 그것이 우리가 배워야 할 믿음의 깊이입니다.
📖 말씀 _ "침묵의 밤을 지날 때"
서론 │ 말씀은 들리지 않고, 마음은 더 깊이 가라앉을 때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뜻하지 않은 ‘고요한 밤’을 마주하게 됩니다. 이 밤은 단순한 정적이나 일상의 피곤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고, 기도의 입술은 닫히고, 찬송도, 말씀도 내 마음에 하나도 와닿지 않는 영혼이 잠긴 듯한 밤입니다. 찬양 소리가 울려 퍼지지만 내 안의 회중은 침묵하고, 기도 시간에 흘러나오는 다른 이의 눈물 속에서조차 위로를 느끼지 못하는 시간. 바로 그런 밤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생각합니다. “내가 이상한 건가?”, “내가 하나님과 멀어진 걸까?”, “혹시 하나님이 나를 벌하시는 걸까?” 그리곤 스스로를 자책하거나, 불안해하며 소리 없는 불신의 늪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시편 77편은, 그런 밤을 지나고 있는 이들의 손을 조용히 붙들며 속삭입니다. “너만 그런 게 아니야. 그 밤을 지나고 있는 거야. 믿음은 바로 그런 밤을 통과하는 거야.”
시편 77편은 아삽의 시입니다. 그는 다윗 시대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온 생애를 바친 성전의 찬양 인도자였습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역사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성전 예배를 인도하며 수많은 회중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했던 자였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가 지금, 하나님의 응답이 들리지 않는 밤을 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부르짖고, 밤새 손을 들며 기도했지만, 마음은 위로받기를 거절합니다. 기억은 불안을 부르고, 과거의 은혜는 현재의 침묵 앞에서 더 큰 괴리로 다가옵니다.
이 시는 신앙의 회의나 불신을 노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믿음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 신앙의 진실한 싸움을 노래하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종종 기도에 즉각적인 응답을 기대합니다. 말씀 한 구절에 감동이 오고, 찬양 한 곡에 눈물이 흐르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믿음은 그런 감정의 흐름보다 훨씬 더 깊은 자리에서, 하나님을 향한 태도와 방향을 지키는 싸움입니다. 감정이 식었어도,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아도, 그분을 향해 손을 드는 것. 그 어두운 밤을 포기하지 않고 통과하는 것. 그것이 오늘 이 시편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신앙의 본질입니다.
오늘 이 말씀 앞에 선 우리 역시, 어쩌면 그런 밤을 지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기도해도 상황은 바뀌지 않고, 말씀을 붙들고 있지만 오히려 더 외로워질 때. 그러나 그 어둠은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일하고 계시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더 깊이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때로 우리의 고통 속에 침묵하시지만, 그 침묵은 우리를 외면함이 아니라, 우리 안에 더 깊은 믿음을 빚어가시는 작업이 될 수 있습니다.
본론 │ 믿음은 고요한 평안이 아니라, 밤의 부르짖음입니다.
1. 기도는 감정이 아니라 방향입니다.
시편 77편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시인은 ‘하나님께 부르짖는다’는 말을 반복하여 사용하며, 지금 자신의 기도가 얼마나 절박하고 일방적이며, 감정이 아닌 의지의 표현인지를 분명히 밝힙니다. 이 구절에서 중요한 것은, 시인이 자신의 감정 상태에 상관없이 여전히 하나님을 향해 기도의 방향을 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신앙의 길을 오래 걷다 보면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기도는 감정의 고조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감정이 복받쳐 오를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기도하게 됩니다. 감사하거나, 감격스럽거나, 절박할 때 우리의 마음은 쉽게 하나님을 향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와는 다른 종류의 기도, 하나님의 응답이 들리지 않고, 감정도 느껴지지 않을 때 드리는 기도는 또 다른 차원의 신앙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방향의 문제입니다.
기도는 감정이 충만할 때만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감정이 메말랐을 때, 상황이 무너졌을 때, 아무 느낌도 없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향해 마음의 방향을 고정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기도입니다. 기도는 늘 ‘기도 같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울고, 떨고, 무언가 느껴야만 기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눈물이 없어도, 확신이 없어도, 응답이 없어도 우리는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시인은 지금 그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는 여전히 “하나님께 귀를 기울여 주시리라”는 고백을 하면서도, 정작 이후의 절에서는 ‘위로받기를 거절’했다고 고백합니다. 이는 감정과 믿음이 동시에 엇갈리는 순간입니다. 신자는 그런 모순 속에서 살아갑니다. 마음은 낙심하고, 몸은 지쳐 있지만, 영혼은 여전히 하나님을 바라보는 방향을 유지하려는 싸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예수님의 기도에서도 발견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은 피 땀을 흘리며 기도하십니다. 그 밤, 예수님도 인간적인 두려움과 고통을 느끼셨습니다. 그러나 그 기도의 핵심은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가 아니라,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였습니다. 방향이 하나님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마음이 낙심되어 있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더라도 괜찮습니다. 중요한 것은 방향입니다. 나의 영혼이 여전히 하나님을 향하고 있다면, 내 음성이 메마른 들판처럼 허공을 맴돌고 있어도, 하나님은 그것을 기도로 받으십니다. 감정이 기도의 본질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방향을 잡고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가장 귀하게 들으시는 기도입니다.
2. 기억은 때로 위로가 아니라 고통이 됩니다.
시편 77편 2절과 3절에서 시인은 고백합니다.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내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심령이 상하도다.” 고통 중에 하나님을 기억했지만, 그 기억은 오히려 위로가 아니라 불안을 일으킵니다. 보통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힘을 얻습니다. 과거의 간증을 되새기며 용기를 내기도 하고, 이전에 인도하셨던 손길을 기억하며 다시 일어서곤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시인은 역설적인 고백을 합니다. 기억이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상한 심령에 더 큰 무게가 됩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신앙적 체험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을 기억하면 다 괜찮아진다”고 쉽게 말하지만, 실제의 삶은 그렇지 않습니다. 때로는 그 기억이 지금의 현실과 너무나도 큰 차이를 드러내며, 마음을 더욱 무겁게 만듭니다. ‘그때는 그렇게 역사하셨는데, 지금은 왜 아무 말씀도 없으신가요?’
시인은 이러한 신앙의 괴리 앞에서 혼란을 겪습니다. 그는 기억의 열쇠를 붙들고 있지만, 그 문이 당장 열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기억은 하나님의 침묵을 더욱 뚜렷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이 경험은 믿음이 흔들리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정한 신앙은 이런 과정을 통해 더욱 단단해집니다. 왜냐하면 기억은 질문을 낳고, 질문은 대화를 낳으며, 대화는 결국 관계를 지속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성경 속 인물들도 동일한 경험을 합니다. 욥은 모든 것을 잃고 “주께서 나의 숨결을 거두셨다”라고까지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도 여전히 하나님을 기억하는 싸움이 있었습니다. 예레미야도 “여호와께서 나를 원수처럼 대하신다”고 고백했지만, 바로 이어 “주의 인자하심과 긍휼은 아침마다 새롭습니다”라고 노래했습니다. 이 두 감정이 충돌할 때, 신앙은 더 깊은 뿌리를 내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기억은 단순한 회상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비록 지금은 불안을 일으키는 요소일지라도, 그 기억은 머지않아 새로운 전환점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시인은 10절 이후부터 다시 그 기억을 통해 하나님의 행적을 회상하며 회복의 여정을 시작합니다. 지금 우리의 기억이 아직 위로가 되지 않는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그 기억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 회복시키실 때를 준비하는 씨앗이 될 것입니다.
3. 질문은 불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애착입니다.
시편 77편 7절부터 9절은 여섯 개의 질문으로 가득합니다.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그의 인자하심은 끝났는가?”, “그의 약속하심도 영구히 폐하였는가?”, “하나님이 그가 베푸실 은혜를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가 베푸실 긍휼을 그치셨는가?” 이 질문들은 표면적으로 보면 하나님을 향한 의심 같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하나님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애착의 표현입니다.
질문을 던진다는 것은, 여전히 하나님께 말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관계가 완전히 단절되었다면 질문조차 하지 않을 것입니다. 시인은 여전히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끝나지 않아야 하며, 약속이 폐기되지 않아야 하며, 긍휼이 지속되어야 마땅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것과 정반대처럼 느껴지기에, 그 모순 앞에서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질문들은 불신앙이 아닙니다. 오히려 깊은 신앙의 언어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으셨습니다. 하나님을 모르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포기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하신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깊이는 질문을 피하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께 정직하게 질문하는 데 있습니다.
현대 신앙인들은 너무 자주 ‘신앙은 확신이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립니다. 모든 기도에 자신 있게 “아멘” 할 수 있어야 하고,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확언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수없이 질문했습니다. 아브라함도, 모세도, 욥도, 엘리야도 질문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질문을 책망하시기보다 응답의 방식으로 다가오셨습니다.
시편 77편의 이 여섯 가지 질문은 결국 시인이 하나님을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는 가장 명확한 증거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계속 묻고, 싸우며, 기다리는 것. 이것이야말로 신앙의 언어이자, 진짜 기도의 깊이입니다.
결론 │ 침묵의 밤을 통과하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의 새벽을 맞이합니다.
시편 77편은 1–9절에서 깊은 탄식과 의심의 밤을 묘사합니다. 기도해도 응답이 없고, 기억해도 위로가 되지 않으며, 질문을 던져도 대답은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시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10절 이후 시인은 다시금 하나님의 과거 행적을 회상하며 믿음을 회복해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다시 노래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믿음은 어두운 밤을 통과하지 않고는 자라날 수 없습니다. 누구나 낮에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잘 풀릴 때는 누구든 “하나님은 선하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얼굴이 가려진 밤, 기도해도 닿지 않는 것 같고, 고요한 침묵만이 맴도는 그 시간에조차 하나님을 붙드는 것, 그것이야말로 성숙한 믿음의 시작입니다.
우리는 침묵의 밤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밤을 피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밤 속에서 더 깊은 일들을 행하십니다. 농부가 씨를 뿌린 후에는 조용히 기다리듯, 하나님은 우리의 침묵의 계절에도 일하고 계십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의 은혜는 뿌리처럼 자라나고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삶 속에 그런 시간이 있다면, 포기하지 마십시오. 기도는 여전히 기도입니다. 아무 감정이 없어도, 하나님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은 여러분의 부르짖음을 듣고 계십니다. 그분은 침묵 속에서도 일하시며, 침묵이 끝나는 날,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시인은 결국 새벽을 맞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 새벽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지금이 영혼의 가장 어두운 밤처럼 느껴진다면, 그 어둠은 하나님이 곧 다가오신다는 징조일 수 있습니다. 밤이 깊을수록 새벽은 가까워지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그 밤에 여전히 하나님을 향해 손을 드는 것. 아무 느낌이 없어도 말씀을 펼치고, 기도하며, 기억하며, 질문하며, 끝까지 하나님께 머무는 것입니다. 오늘 그 믿음의 자리에 우리 모두가 서기를 원합니다. 그 밤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밤을 통과한 자들에게 반드시 새벽을 주십니다.
📖 올려드리는 기도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시편 77편을 통해 제 마음 깊은 곳의 이야기를 듣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부르짖고 또 부르짖지만, 위로받지 못한 채 밤을 지새우는 장면은,
바로 지금 제 마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기도해도 응답이 없고, 말씀을 펼쳐도 공허하고,
과거의 은혜를 떠올려도 오히려 더 슬퍼질 때,
저는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은 아닐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않으시는 것일까?”
그러나 주님, 오늘 깨달았습니다.
그 질문조차 하나님을 향하고 있기에,
이 절망이 믿음을 잃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요.
포기하지 않고 주님께 묻는 그 순간에도,
저는 여전히 주님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비록 지금은 위로가 느껴지지 않고,
제 영혼은 여전히 밤 가운데 있지만,
그럼에도 저는 오늘도 주님을 향해 손을 듭니다.
기도의 응답이 없더라도,
주님이 여전히 저를 바라보고 계심을 믿습니다.
주님, 이 밤을 통과할 수 있는 힘을 주시고,
이 기억이 언젠가 다시 믿음의 회복으로 이어지게 하소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긍휼이
결코 끊어지지 않았음을 다시 고백하게 하소서.
제가 드리는 이 조용한 기도,
눈물 없는 부르짖음조차도
주님께서 귀 기울여 들으시는 줄 믿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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