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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Story】/[생명의 삶] 시편ㅣ2025년

[생명의 삶] 시편 84편 1절-12절 _ 2025. 6. 30(월)

by LogosLab Steward 2025. 6. 30.

❖ 이 자료는 개인적인 말씀 묵상과 연구를 바탕으로 [목회자의 설교 준비][성경을 더욱 깊이 알고자 하는 ], 그리고 [말씀묵상에 도움이 필요한 성도]를 돕기 위해 제작되었습니다. 본 자료의 모든 저작권은 작성자인 LogosLab Steward에게 있으며, 자유롭게 사용 및 참고하시되 출처를 밝혀주시고, [무단 복제 배포]를 합니다. 이 자료가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풍성하게 경험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 본문

1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2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3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4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셀라)
5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6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7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8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 (셀라)
9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께서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 보옵소서 
10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11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12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 본문 배경

❖ 개요

 

시편 84편은 고라 자손의 시로,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그분의 임재 가운데 거하는 복됨을 노래하는 찬양시입니다. 시인은 여호와의 집을 사모하며, 그곳에 거하는 것이 자신의 삶에서 가장 큰 기쁨과 복임을 고백합니다. 이 시편은 단순히 성전을 향한 공간적 열망을 넘어, 하나님의 임재와 교제를 갈망하는 영적 열정이 담긴 시로,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이야말로 참된 안식과 은혜의 자리임을 선포합니다.


❖ 역사적 배경

 

시편 84편은 고라 자손의 시로 알려져 있으며,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예배 공동체의 신앙을 반영합니다. 성전은 이스라엘 신앙의 중심지로, 순례자들은 절기 때마다 시온으로 올라가 하나님께 경배했습니다. 이 시편은 성전을 향해 나아가는 순례자의 마음을 담아, 그 길이 아무리 힘들고 험해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확신 속에 복됨을 노래합니다. 역사적으로 바벨론 포로 이전 시기의 시편으로 보기도 하며, 일부 학자들은 성전 사역자들이 성소에 들어가 봉사할 수 있는 특권을 기뻐하며 부른 찬양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 문화적 배경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성전은 단순한 예배 공간을 넘어 하나님과의 만남, 속죄, 공동체 결속의 중심이었습니다.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나이다(3절)’라는 구절은 성전 주변에 둥지를 트는 새들을 비유하며, 성전에서 하나님 곁에 머물며 안식하는 복을 묘사합니다. 순례자들은 먼 길을 걸어 성전을 향해 나아가며, 그 과정 자체를 거룩한 여정으로 여겼고, 이는 오늘날 우리의 신앙 여정과도 연결되는 은유적 상징으로 자리잡았습니다.


❖ 신학적 배경

 

시편 84편은 하나님 임재의 공간으로서 성전의 신학적 의미를 깊이 드러냅니다. 시인은 성전 뜰에 하루를 머무는 것이 다른 곳에서 천 날을 사는 것보다 낫다고 고백하며(10절), 진정한 복과 힘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서 나온다고 선포합니다. 이는 외적인 축복이나 형통함보다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누리는 은혜와 안식이 참된 행복임을 강조하는 고백입니다. 시인은 성전을 향한 그리움을 통해, 궁극적으로 하나님 자신이 성전이시며, 그분의 임재가 있는 곳이 곧 삶의 진정한 복의 자리라는 신앙의 중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 본문 요약

시편 84편은 고라 자손의 시로, 시인은 하나님의 장막을 향한 깊은 사랑과 그곳에 거하며 예배드리는 복됨을 노래하며 시작합니다(1절). 그는 자신의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할 정도라고 고백하며,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신 하나님께 부르짖는다고 토로합니다(2절). 시인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성전 곁에서도 참새와 제비가 보금자리를 얻듯이, 하나님의 제단 가까이 거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노래합니다(3절).

 

하나님의 집에 거하며 그분을 찬송하는 자들이 복이 있음을 선언하며(4절), 주께 힘을 얻고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들도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5절). 시인은 순례의 여정을 묘사하며, 눈물 골짜기를 지나가더라도 그 길에 많은 샘과 이른 비의 복이 채워짐을 이야기합니다(6절). 결국 그들은 더욱 힘을 얻어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됩니다(7절).

 

시인은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며, 만군의 하나님께 귀를 기울여 주시길 구합니다(8절). 그리고 주께서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 주시길 간구합니다(9절). 그는 여호와의 궁정에서의 하루가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낫고, 악인의 장막에 거하는 것보다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더 복되다고 고백합니다(10절).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않으심을 선포하고(11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가 복이 있음을 다시금 고백하며 시를 마칩니다(12절).

 

이 시편은 단순히 성전을 향한 갈망을 넘어, 하나님 임재 안에 거하며 그분과 동행하는 삶이야말로 진정한 행복과 은혜의 자리임을 선포하는 믿음의 노래입니다.

 


📖 붙잡는 말씀

10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이 말씀은 시편 84편의 중심 고백이자,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살아가는 성도의 진정한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를 깨닫게 하는 귀한 선언입니다. 시인은 세상의 수많은 날들, 풍요로움과 권세가 주어지는 자리보다도 하나님의 집에서의 단 하루가 더 낫다고 고백합니다.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라는 표현은 세상이 주는 유혹과 번영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 모든 것을 등지고,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서 있는 것이 더 복되다고 확신합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의 임재 자체가 우리 삶의 가장 큰 가치요 기쁨이라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는 고백에는 섬김과 겸손, 그리고 하나님 앞에 단 한 순간이라도 머물 수 있다면 그것이 인생의 가장 큰 복이라는 확신이 담겨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이 진짜 바라는 복은 무엇인가?” 눈에 보이는 풍요가 아닌, 하나님의 집 문지기라도 좋으니 그분의 임재 안에 거하기를 선택하는 자가 진정 복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의 소망이 이 시인의 고백처럼 하나님 한 분 안에 있길 기도합니다. 이 말씀이 우리의 중심이 되길 간구합니다.

 


📖 단어 연구

❖ 장막 (מִשְׁכָּן / 미쉬칸)

 

✦ 뜻과 의미

‘미쉬칸’은 히브리어로 ‘거처’, ‘장막’, ‘거하는 곳’을 뜻하며, 구약 성경에서 특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임재하시는 성막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자주 사용됩니다. 광야 시대 이스라엘 백성은 이동할 때마다 성막(장막)을 세웠고, 그곳에서 하나님께 제사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했습니다. 이 단어는 단순히 천막 구조물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와 함께 하심이 머무는 거룩한 공간을 상징합니다.

 

✦ 본문에서의 의미

시인은 1절에서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라고 고백하며, 하나님 임재가 머무는 그 공간을 사모함으로 표현합니다. 여기서 ‘장막’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그분과 교제하며 은혜를 누릴 수 있는 자리, 곧 영혼의 안식처를 의미합니다. 시편 기자는 세상의 어떤 장소보다도 하나님의 장막에 머무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며 축복이라고 확신합니다.

 

✦ 신학적 의미

‘미쉬칸’은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구속사를 드러내는 중요한 신학적 상징입니다. 구약 시대 성막이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했다면, 신약 시대에는 그리스도가 친히 성전이 되셔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가 되셨습니다(요 2:19–21). 또한, 신자들의 몸이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고전 6:19)이라고 선언됨으로써, 오늘날 우리 각자의 삶과 공동체가 하나님의 장막, 임재의 장소로 확장됩니다. 결국 하나님의 ‘장막’은 구속사 전반에 걸쳐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 가운데 거하시며, 그분의 영광과 임재로 그들을 보호하고 인도하신다는 약속의 상징입니다.


 

❖ 궁정 (חֲצֵרוֹת / 하체롯)

 

✦ 뜻과 의미

‘하체롯’은 ‘마당’, ‘뜰’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로, 왕궁이나 성전 주위에 마련된 넓은 공간을 가리킵니다. 고대 사회에서 ‘궁정’은 백성들이 왕을 알현하거나 제사장이 제사를 준비하고 예배자들이 모여 함께 예배하는 공적 공간으로 기능했습니다.

 

✦ 본문에서의 의미

시인은 2절에서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자신의 영혼이 쇠약할 정도라고 고백합니다. ‘궁정’은 그저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아가 만나는 은혜의 현장이며, 하나님의 통치와 임재를 경험할 수 있는 거룩한 장소로 묘사됩니다. 시인은 그곳을 향한 갈망으로 심령과 육체까지도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음을 고백하며, 자신의 전 존재가 하나님을 갈망함을 드러냅니다.

 

✦ 신학적 의미

궁정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 예배하는 ‘공적 자리’이자,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모여 거룩한 공동체를 이루는 상징적 장소입니다. 오늘날 이 궁정은 단순히 교회의 건물을 넘어, 신앙 공동체가 모여 하나님께 예배하며 그분을 만나는 모든 영적 현장을 가리킵니다. 또한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영원히 모일 ‘새 예루살렘’의 예표로 이해되기도 합니다(계 21장). 성도는 이 땅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궁정을 사모하며 살아가며, 장차 그분 앞에서 영원한 잔치와 교제를 누리게 될 것을 소망합니다.

 


❖ 시온 (צִיּוֹן / 치욘)

 

✦ 뜻과 의미

‘치욘’은 구약 성경에서 예루살렘 성 혹은 그 성이 위치한 산을 가리키며,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의 중심지, 이스라엘의 영적 심장을 상징하는 말로 사용됩니다. 시온은 단순한 지리적 명칭을 넘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다스리심이 이루어지는 거룩한 장소를 상징하는 신학적 용어로 자리잡았습니다.

 

✦ 본문에서의 의미

5절에서 시인은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다”고 고백하며, 이는 시온을 향해 나아가는 순례자의 길, 곧 하나님의 임재와 성전을 향해 향하는 믿음의 여정을 의미합니다. 시온은 하나님의 집이 있는 곳이며, 그곳을 향해 걸어가는 자는 고난과 눈물의 길을 지나도 결국 복된 자리,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게 된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 신학적 의미

시온은 구약에서는 예루살렘의 실제 지명과 함께 하나님의 통치와 임재를 상징했지만, 신약에서는 장차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비전과도 연결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시온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 하늘의 예루살렘’(히 12:22)으로 언급하며, 장차 성도들이 영원히 거할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바라보게 합니다. 따라서 시온은 하나님 나라의 비전과 순례자의 길을 모두 포함하는 풍부한 영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 해 (שֶׁמֶשׁ / 셰메쉬)

 

✦ 뜻과 의미

‘셰메쉬’는 태양을 의미하며, 고대 근동 사회에서 빛과 생명의 근원, 풍요와 회복의 상징으로 여겨졌습니다. 태양은 농경 사회에서 생존에 필수적인 존재였으며, 그 빛은 안전과 따뜻함, 성장의 힘을 제공하는 생명의 원천으로 인식되었습니다.

 

✦ 본문에서의 의미

11절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는 선언은, 하나님께서 어둠을 몰아내고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신앙 고백입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의 따뜻한 은혜와 전능하신 공급하심, 인도하심을 상징하며, 성도들의 길을 비추어 주시는 분으로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고백입니다.

 

✦ 신학적 의미

성경은 하나님을 ‘빛’으로 묘사하며(요일 1:5), 말라기 선지자는 메시아를 ‘공의로운 해’(말 4:2)로 묘사합니다. 하나님이 해이시라는 것은 단순히 물리적 생명 공급자라는 의미를 넘어, 성도의 삶 속 어둠을 몰아내고 구원의 빛을 비추시는 분이라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성도가 하나님 안에서만 참 생명과 빛을 발견할 수 있다는 신앙 고백과 연결되며, 오늘 우리 삶 속에서도 주님의 빛을 구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영적 교훈을 줍니다.

 


❖ 방패 (מָגֵן / 마겐)

 

✦ 뜻과 의미

‘마겐’은 고대 전투에서 적의 창이나 화살, 칼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방어 무기를 뜻합니다. 물리적 전쟁의 도구였지만,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보호와 구원을 상징하는 중요한 단어로도 사용되었습니다.

 

✦ 본문에서의 의미

11절에서 하나님은 방패로 묘사되며,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과 성도들의 삶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피난처가 되심을 노래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없이는 세상과 악의 공격 앞에 결코 안전할 수 없음을 인정하며, 오직 하나님께 자신을 의탁합니다.

 

✦ 신학적 의미

하나님을 방패로 묘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신실하심, 그리고 그분이 자신을 신뢰하는 자들을 반드시 지키신다는 약속을 상징합니다. 이는 단지 외적 공격으로부터의 안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전투 속에서 믿음을 지키고 끝까지 걸어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선언하는 신앙의 고백이 됩니다. 성도는 자신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방패되심 안에서 담대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

 


📖 절별 주해

❖ 1절 | 주의 장막을 사랑합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시인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소, 곧 장막을 바라보며 감탄하며 시를 시작합니다. 이 ‘장막’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단순한 예배 장소를 넘어서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의 상징이었습니다. 시인은 성전이라는 물리적 공간의 아름다움을 넘어, 그곳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 자신을 가장 사랑스럽고 귀히 여긴다고 고백합니다. 이는 우리의 신앙이 외적 형식보다 하나님과의 관계, 그분의 임재를 향한 갈망에서 시작되어야 함을 일깨웁니다. 하나님이 계신 그곳이야말로 우리의 참된 기쁨과 쉼이 되는 자리입니다. 세상 어떤 화려함도 하나님의 집의 영광과 평안함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 2절 |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사모함입니다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시인은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너무 깊어 영혼이 쇠약해진다고 토로합니다. 마음만이 아니라 몸까지도 하나님께 부르짖고 탄식하는 이 모습은, 단순한 신앙의 감정이 아니라 생존의 이유가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보여줍니다. 시인은 삶의 가장 본질적인 필요가 하나님 자신임을 고백하며, 하나님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절박함을 드러냅니다. 이는 모든 신앙인이 배워야 할 영적 갈급함의 전형이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생명의 근원이라는 신앙적 진리를 증언합니다.


❖ 3절 | 주의 제단에서 안식하는 작은 생명들도 복됩니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시인은 성전 주변에서 작은 새들이 안전하게 보금자리를 틀고 새끼를 기르는 광경을 보며 하나님의 집이 얼마나 자비롭고 포근한지 깨닫습니다. 참새나 제비 같은 작은 피조물도 하나님의 집에서 안식하며 생명을 잇는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우리야말로 그 은혜의 공간에서 더욱 풍성한 복을 누릴 자격이 있음을 노래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창조세계 전체를 품으시며, 그 안에서 작은 생명들조차 평안을 누리게 하신다는 신앙의 시적 고백이기도 합니다.


❖ 4절 |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의 복입니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셀라)”

 

성전에서 하나님을 늘 찬송하며 거하는 자들은 가장 복된 사람이라고 시인은 선포합니다. 이들은 세상 걱정과 염려로부터 벗어나 하나님만을 경외하며, 예배와 찬송 속에서 거룩한 기쁨을 누립니다. ‘셀라’라는 멈춤의 표시는 이 축복을 묵상하며, 우리 삶에서 진정한 복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깨닫도록 초대합니다. 하나님 곁에 거하며 늘 찬송하는 삶이야말로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참된 복입니다.


❖ 5절 | 시온을 향해 나아가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여기서 시인은 하나님께 힘을 공급받아 시온으로 향하는 길을 마음속에 두고 사는 사람이 복되다고 말합니다. 시온으로 가는 길은 단순한 여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향해 나아가는 믿음의 여정입니다. 이 길에는 장애물과 어려움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힘으로 인해 결국 그 길은 축복의 길이 됩니다. 이 구절은 우리의 인생 여정이 순례자의 길이며, 그 끝이 하나님과의 만남이라는 신앙적 진리를 가르쳐 줍니다.


❖ 6절 | 눈물 골짜기를 샘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눈물 골짜기는 고난과 시련의 상징입니다. 하지만 시인은 그 골짜기조차 하나님께서 샘으로 바꿔 주시고, 이른 비로 축복을 채워 주신다고 고백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고통의 자리조차 생명과 소망의 자리로 변하게 하신다는 믿음의 선언입니다.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야 하는 우리의 삶에서, 이 말씀은 하나님의 회복과 은혜를 신뢰하라는 강력한 초대입니다.


❖ 7절 | 하나님 앞에 힘을 더해 나아갑니다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순례자들은 여정 중에 점점 더 힘을 얻으며 마침내 하나님의 얼굴 앞에 설 것입니다. 이는 믿음의 길이 단순한 인내의 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정 중에 새로운 힘과 은혜를 더해 주시는 성장과 성숙의 길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향한 여정이 결코 헛되지 않고, 결국 하나님 앞에서 모든 눈물이 씻겨지고 기쁨으로 바뀌게 된다는 복음적 약속을 담고 있습니다.


❖ 8절 |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 (셀라)”

 

시인은 하나님께 자신의 기도를 들어 달라고 간구합니다.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언약을 신실히 지키시는 하나님을 향한 깊은 신뢰의 고백입니다. ‘셀라’는 이 기도를 잠시 멈춰 묵상하며, 우리의 삶 속에서도 같은 간구를 하나님께 드리라는 권면으로도 읽힙니다.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시기에, 반드시 우리의 간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 9절 | 기름 부으신 자를 돌아보소서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께서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 보옵소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자, 곧 왕을 돌보아 주시길 간구합니다. 왕은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여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이며, 왕의 안전과 보호는 곧 백성들의 안정과 복된 삶과 연결됩니다. 하나님을 ‘방패’라 부르며, 보호자 되시는 그분의 역할과 은혜를 신뢰하며 중보하는 이 기도는 공동체적 믿음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 10절 |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가장 복됩니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시인은 하나님의 궁정에서의 단 하루가 세상 어디에서의 천 날보다 더 낫다고 고백합니다. 이는 하나님 임재 안에서 누리는 기쁨과 만족이 세상의 어떤 풍요도 결코 대신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심지어 성전 문지기로라도 그곳에 머물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큰 영광이고 기쁨이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곧 인생의 최고 가치라는 고백입니다.


❖ 11절 | 은혜와 영화를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하나님은 해처럼 우리의 어두운 삶을 비추어 주시고, 방패처럼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또한 정직하게 사는 자들에게 은혜와 영화, 즉 영광스러운 축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않으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성품이 얼마나 자비롭고 풍성한지, 그리고 그의 백성을 향해 끝없이 인자하심을 드러냅니다.


❖ 12절 |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마지막 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의 복됨을 다시 선포하며 시를 마칩니다. 세상 권세나 인간적 지혜가 아닌, 오직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이 진정한 복의 길임을 확증합니다. 하나님께 의지하는 자는 결국 그의 신실하신 사랑 안에서 안전하고 영원히 복된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 묵상

시편 84편의 시인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을 향해 참을 수 없이 간절한 그리움을 토해내듯 고백하고 있습니다. 세상 그 어떤 화려한 궁전도, 권력의 자리도, 풍요로운 삶도 하나님의 집에서 보내는 단 하루의 은혜와 비교할 수 없다고, 시인은 노래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장소에 대한 동경이 아니라, 그곳에 임재하시는 하나님 자신을 향한 사랑의 고백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더 높은 자리, 더 많은 성취를 향해 달려가라 부추기고, 나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그 길 끝에서 만나는 것은 때로 허무와 공허함뿐입니다. 하나님 없이 누리는 성공은 잠시 찰나의 빛처럼 스러지고 맙니다. 반면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 그 임재를 향한 여정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영혼의 참된 평안과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시인은 고백합니다.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우리의 영혼이 진정 사모해야 할 것은 하나님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발걸음만이, 이 거친 세상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소망의 닻이 됩니다.

 

또한 시인은 눈물 골짜기를 지나가는 이들에게 약속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골짜기를 샘이 넘치는 복의 자리로 바꾸어 주신다고 말입니다. 고난과 아픔의 자리조차, 하나님은 은혜의 통로로 만드십니다. 우리의 눈물은 결코 헛되지 않고, 하나님 앞에 흘리는 눈물은 기도와 소망의 씨앗이 되어 반드시 새로운 생명을 틔울 것입니다.

 

하나님께 부르짖는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은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하나님은 성실하시고 신실하신 분이시기에, 반드시 우리에게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않으십니다.

 

오늘도 우리가 걷는 이 길 위에 하나님이 빛이 되어 주시길 구합니다. 삶의 골짜기에서, 한 줄기 빛조차 보이지 않는 어두움 속에서라도, 하나님께 부르짖는 이 고백이 우리의 길이 되고 힘이 되길 바랍니다.

 

시온의 대로를 마음에 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발걸음이 멈추지 않는다면, 언젠가 우리는 그분 앞에서 눈물 없는 기쁨으로 노래하게 될 것입니다. 그날까지 주님만을 사모하며 걸어가는 인생이 되기를, 그 사랑이 오늘 우리 영혼 깊숙이 새겨지길 소망합니다.

 


📖 말씀 _ "하나님의 집을 사모하는 자의 노래"

서론|마음 깊은 그리움, 하나님의 집을 향한 갈망과 사모함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인생길을 살아가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은 마음이 공허해지고 어디에도 기대어 쉴 수 없는 깊은 고독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 속에 있어도 외롭고, 분주한 일상 속에 있어도 영혼이 메마른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특히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끊임없는 경쟁과 성과를 요구받는 사회 속에서 마음의 평안을 잃고 방황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찾습니다. 더 나은 환경, 더 좋은 관계, 더 많은 성취와 인정, 더 안정된 미래를 갈망합니다. 때로는 여행을 떠나고, 새로운 취미를 찾고, 더 높은 지위를 추구하며 마음의 공허함을 채우려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결국 우리의 목마름을 근본적으로 해갈하지 못합니다. 마치 사막에서 신기루를 보고 달려가는 나그네처럼, 잠시 위로를 주는 듯하지만 곧 다시 갈증이 찾아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았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했듯이 "하나님이여, 당신께서 우리를 당신을 위해 만드셨으므로,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 쉴 때까지는 불안합니다." 우리의 영혼은 오직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만 참된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시편 84편의 시인은 바로 그 영혼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갈망을 노래합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1절). 이것은 단순한 감탄이 아닙니다. 이것은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것처럼, 메마른 땅이 단비를 기다리는 것처럼, 영혼 깊은 곳에서 울어나오는 간절한 부르짖음입니다.

 

그 사랑스러움은 단지 아름다운 건축물에 대한 감탄이 아닙니다. 성전의 화려한 장식이나 웅장한 구조에 매혹된 것이 아닙니다. 그곳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함, 그리고 그 하나님을 가까이 만나는 기쁨이 그리운 것입니다. 시인에게 하나님의 집은 단순한 예배 장소가 아니라, 생명의 근원이며, 영혼의 안식처이며, 존재의 목적지였습니다.

 

현대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교회당 건물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만나는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함께 모여 드리는 예배 속에서, 말씀을 듣는 순간에서, 찬양하며 기도하는 시간에서 경험하는 하나님의 만지심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심령도 이 시인의 고백처럼, 세상 그 어떤 곳도 주님의 집만큼 소중하고 복된 곳이 없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고, 주님의 임재 앞으로 나아가는 갈망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의 마음이 지치고 무너져 내릴 때, 세상의 염려와 근심이 물밀듯이 밀려올 때, 이 시편의 고백이 우리를 일으켜 세웁니다. 우리가 진정 바라보고 달려가야 할 곳, 참된 기쁨과 평안이 있는 곳은 바로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분의 임재를 사모하고, 그분의 얼굴을 구하며 나아가는 그 걸음이야말로 세상 어떤 보물보다 값지고 복된 길입니다.


본론|하나님의 집에서 누리는 참된 행복과 은혜

 

1. 하나님 임재의 공간을 향한 깊은 그리움과 사모함 (1–4절)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해지고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1-2절).

 

시편 기자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그의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해졌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과장된 표현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너무나 깊고 간절해서 몸과 마음이 지칠 정도로 사모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마치 연인을 그리워하는 마음처럼, 고향을 떠나 타국에서 살며 고국을 그리워하는 마음처럼, 그의 전 존재가 하나님의 임재를 향해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무엇을 이토록 간절히 사모할까요? 성공입니까? 명예입니까? 재물입니까? 건강입니까? 이런 것들도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다 얻었다 해도 영혼의 깊은 갈증은 해결되지 않습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던 것처럼,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는 하나님만이 채우실 수 있는 공간이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3절의 고백입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나이다." 시인은 하나님의 집을 향한 자신의 갈망을 노래하면서, 그곳에 거하는 작은 참새와 제비까지도 부러워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깊은 갈망인지 이해하려면, 당시의 상황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시인은 아마도 바벨론 포로기나 어떤 이유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곳에서 고국의 성전을 그리워하며, 성전 기둥 사이에 둥지를 틀고 새끼를 기르는 작은 새들조차 부러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언제 그곳에 가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을까? 저 작은 새들은 매일 하나님의 제단 가까이에서 살고 있는데, 나는 왜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하는가?" 이런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작은 새들도 하나님의 성전 기둥 사이에 둥지를 틀고 새끼를 기릅니다. 그것조차 큰 축복이고 은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에 거하는 것이 얼마나 복되고 귀한 일인지, 그는 자신의 모든 존재와 마음을 다해 노래하고 있습니다.

 

4절에서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의 집에 거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이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하나님의 집에 거하는 것은 단순히 물리적인 거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살아가는 삶,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지 않는 삶, 언제나 하나님을 찬송하며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우리 또한 이 땅에서 수많은 둥지를 틀고 살아갑니다. 직장의 자리, 가정의 울타리, 친구 관계 속에서 안정과 위로를 찾습니다. 학교에서, 사회에서 우리의 자리를 만들어가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이 진정 안식할 수 있는 집은 오직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을 때뿐입니다.

 

우리가 예배드리러 교회에 올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펼쳐놓고 묵상할 때마다, 기도의 자리에 나아갈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집에 거하는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시인은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고, 성전의 기둥과 문지방조차 가장 사랑스러운 보금자리로 여겼습니다. 주님 안에서 거하며 예배하고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영혼 깊은 곳까지 충만해지는 삶임을 다시금 기억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집을 향한 순례자의 여정 속에서 받는 은혜 (5–7절)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5절).

 

이 구절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시온의 대로'라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길이 그 사람의 마음 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이 그 사람의 인생의 방향이며, 삶의 목표라는 의미입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들의 마음에는 어떤 '대로'가 있습니까? 성공의 대로입니까? 출세의 대로입니까? 부의 대로입니까? 아니면 시온의 대로, 곧 하나님께로 향하는 길이 우리 마음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습니까?

 

시인은 아직 성전 문턱에도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는 여전히 길 위에 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가 그 길 위에서 이미 은혜를 체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눈물 골짜기로 지날 때에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복을 입히나이다."

 

'눈물 골짜기'는 히브리어로 '바카 골짜기'라고 합니다. 이것은 실제 지명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생의 고난과 아픔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인생길에는 반드시 눈물 골짜기가 있습니다. 질병의 골짜기, 가난의 골짜기, 외로움의 골짜기, 실패의 골짜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에게는 그 눈물 골짜기가 '많은 샘의 곳'이 된다는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힘겨운 걸음을 옮겨도, 하나님을 향한 발걸음에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곳이 오히려 생명의 샘이 터지고, 가을비가 내려 은혜가 가득 찬 골짜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그저 고통스러운 고난일 뿐인 것이, 하나님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에게는 은혜의 통로가 됩니다. 욥이 고난 중에서도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의뢰하리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도, 바울이 감옥에서도 찬송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7절은 더욱 놀라운 약속을 담고 있습니다. "저희가 힘을 얻고 더 얻어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힘을 얻고 더 얻어'라는 표현은 계속해서 힘이 더해진다는 뜻입니다. 일반적으로 긴 여행을 하면 갈수록 지치고 힘이 빠지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향한 순례의 길에서는 반대의 일이 일어납니다. 갈수록 더 힘이 나고, 더 용기가 나며, 더 소망이 커집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신비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믿음의 연륜이 쌓일수록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더욱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게 됩니다. 젊을 때는 육체의 힘으로 달려갔지만, 나이가 들수록 하나님의 힘으로 달려가게 됩니다. 이사야 40장 31절의 약속처럼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우리의 신앙 여정도 이와 같습니다. 삶의 광야에서 눈물을 흘리며 걸어가는 순간에도, 하나님을 향한 길 위에 있을 때 주님은 우리의 눈물 골짜기를 축복의 샘으로 변화시키십니다. 하나님의 집을 향한 걸음, 주님을 향한 그 발걸음 자체가 이미 복된 인생의 길이며, 매일의 믿음의 순례가 우리를 성숙하게 하고 은혜로 채워줍니다.

 

 

3. 주님만이 방패이시며 참된 축복의 근원이심 (8–12절)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

 

8절에서 시인은 간절한 기도를 드립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시인이 하나님을 부르는 방식입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와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만군의 하나님'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주권을 강조하는 호칭입니다. 하늘의 군대를 거느리시고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절대적 권능의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반면 '야곱의 하나님'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언약적 사랑을 강조하는 호칭입니다. 연약하고 부족한 야곱을 붙들어 주시고 끝까지 사랑하신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두 호칭은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우주보다 크신 분이시지만, 동시에 우리 각자의 마음속까지 들어오셀 수 있는 분이십니다. 너무 높아서 가까이 할 수 없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9절에서 시인은 계속해서 기도합니다.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의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보옵소서." 여기서 '우리 방패'라는 표현에 주목해야 합니다. 방패는 적의 공격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주는 도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방패가 되신다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위험과 공격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위험에 노출됩니다. 질병의 위험, 사고의 위험, 경제적 위험, 인간관계의 위험 등등.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의 방패가 되어 주실 때,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시편 91편 4절처럼 "그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나니."

 

10절은 이 시편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 중 하나입니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이것은 놀라운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집에서의 하루가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낫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과장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누리는 기쁨과 평안은 세상의 그 어떤 즐거움과도 비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다"는 고백입니다. 당시 '문지기'는 가장 낮은 직책 중 하나였습니다. 아무런 권력도 없고, 큰 존경도 받지 못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악인의 장막에서 높은 자리에 있는 것보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것이 더 좋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가치관의 전환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높은 자리, 권력 있는 자리, 부유한 자리를 추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리가 가장 복된 자리임을 압니다. 설령 그것이 세상 기준으로는 낮은 자리일지라도 말입니다.

11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고백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광을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심이니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해'가 되십니다. 해는 빛과 온기를 주어 생명을 살리는 존재입니다. 하나님도 우리 삶에 빛을 비춰주시고 따뜻한 사랑으로 우리를 살리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의 '방패'가 되십니다. 앞서 9절에서도 언급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모든 위험으로부터 보호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은혜와 영광을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십니다." 여기서 '은혜'는 우리가 받을 자격이 없는데도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선하심을 의미하고, '영광'은 하나님이 주시는 존귀와 명예를 의미합니다.

 

특히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신다"는 약속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때로는 정직하게 살면 손해를 보는 것 같고, 바르게 살면 어리석은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정직히 행하는 자를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좋은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방패가 되어 주십니다. 세상의 어떤 힘도, 재물도, 인간적 권세도 우리를 끝까지 지켜줄 수 없습니다. 경제 상황이 바뀔 수 있고, 건강이 악화될 수 있고, 인간관계가 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 삶의 영원한 방패가 되시며, 은혜와 영광으로 우리를 덮어 주십니다. 그분은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이보다 더 확실하고 든든한 약속이 어디 있겠습니까?

 

마지막 12절에서 시인은 이 시편을 아름다운 축복의 선언으로 마무리합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이것은 단순한 소망의 표현이 아니라 확신에 찬 선언입니다. 하나님께 의지하는 자는 반드시 복을 받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복'은 단순히 물질적인 풍요나 육체적인 건강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누리는 총체적인 행복과 평안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집을 사모하며 살아가는 자는 결코 부끄러움이 없을 것입니다. 비록 이 땅에서는 고난을 당할 수 있고, 어려움을 겪을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결론|하나님의 집으로 향하는 삶이 진정한 복의 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편 84편은 우리에게 인생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과연 우리의 삶에서 가장 큰 복은 무엇인가? 무엇이 우리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만드는가?

 

혹시 우리는 더 큰 성공을 위해 달려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더 안정된 삶을 위해 애쓰고 있지는 않습니까? 더 넓은 세상에서의 영향력을 갈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런 것들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이 땅에서 열심히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시인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것들이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입니다. 진정한 복은 하나님의 집에서 그분의 임재를 누리고, 주님과 동행하며 사는 삶 그 자체입니다.

 

현대 사회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더 많이, 더 높이, 더 빨리'를 요구합니다.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하고, 더 높은 지위에 올라야 하고, 더 빨리 성공해야 한다고 속삭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쫓기듯 살아갑니다. 잠시도 멈춰서 생각할 여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삶 속에서 우리의 영혼은 점점 메말라갑니다.

 

하지만 시편 84편의 시인은 전혀 다른 가치관을 제시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집 문지기가 되는 것을 악인의 장막에서 높은 자리에 있는 것보다 낫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어리석은 선택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가장 지혜로운 선택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만이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가지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성공하고 높은 자리에 앉아 있어도, 하나님 없는 삶은 결국 공허하고 허무할 뿐입니다. 반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은 비록 세상 기준으로는 보잘것없어 보일지라도, 영원한 의미와 가치를 가집니다.

 

특히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적 상황을 생각해보면, 이 시편의 메시지가 더욱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으면서 우리는 인간의 한계를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고 의학이 발전해도 우리는 여전히 연약한 존재임을 깨달았습니다. 경제적 불안정, 사회적 갈등, 환경 파괴 등 우리를 둘러싼 문제들은 인간의 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참된 평안을 찾고, 그분의 말씀 안에서 진정한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세상의 소음과 혼란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길이 오늘도 눈물 골짜기 같을지라도, 그 길 위에 하나님의 은혜의 샘이 터져나오기를 기도합니다. 혹시 지금 질병으로 고생하고 계십니까? 경제적 어려움으로 힘들어하고 계십니까? 가족 문제로 마음이 아프십니까? 직장에서의 스트레스로 지쳐있으십니까? 자녀 문제로 근심하고 계십니까?

 

이 모든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을 향해 한 발 한 발 걸어갈 때, 그 걸음 위에 하나님은 새로운 길을 여시고, 은혜와 축복으로 가득 채워 주실 것입니다. 눈물 골짜기가 샘물 터지는 곳이 되고, 메마른 광야가 옥토가 되는 기적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 끝에서, 우리는 분명히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12절). 이것은 먼 미래의 일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하나님의 집을 단순히 개인적인 위로의 장소로만 여겨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집은 세상을 향한 사랑의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 자는 그 사랑을 세상에 흘려보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은 자는 상처받은 이웃을 위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자는 그 은혜를 나누어야 합니다.

 

시편 84편의 시인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집을 향한 깊은 사모함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오늘도 주님과 함께 하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며 시작해야 합니다. 직장에서 일할 때도, 가정에서 가족들과 함께 할 때도, 친구들과 만날 때도, 항상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씩 하나님의 집에 모여 예배드리는 것을 최고의 특권으로 여겨야 합니다. 예배는 의무가 아니라 특권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축복입니다. 함께 모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시간이야말로 일주일 중 가장 소중한 시간이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개인적인 경건의 시간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시간, 기도하는 시간, 찬양하는 시간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해야 합니다. 이런 시간들이 우리의 영혼을 살찌우고, 세상의 유혹과 시험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의 집을 향해 우리의 마음과 시선을 두고 살아갑시다. 세상의 가치관에 휩쓸리지 말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인생을 바라봅시다. 주님의 임재가 우리의 가장 큰 기쁨이며, 우리의 유일한 소망임을 믿고 고백하며, 그 길을 걸어갑시다.

 

비록 이 세상에서는 고난이 있을지라도, 하나님과 함께 하는 그 길이야말로 가장 복된 길, 가장 은혜로운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집을 사모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인생길을 걸어가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이 복된 길을 걸어가는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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