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자료는 개인적인 말씀 묵상과 연구를 바탕으로 [목회자의 설교 준비], [성경을 더욱 깊이 알고자 하는 분], 그리고 [말씀묵상에 도움이 필요한 성도]를 돕기 위해 제작되었습니다. 본 자료의 모든 저작권은 작성자인 〈LogosLab Steward〉에게 있으며, 자유롭게 사용 및 참고하시되 출처를 밝혀주시고, [무단 복제 및 배포]를 금합니다. 이 자료가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풍성하게 경험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 본문
1 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야로 주 앞에서 부르짖었사오니
2 나의 기도가 주 앞에 이르게 하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기울여 주소서
3 무릇 나의 영혼에는 재난이 가득하며 나의 생명은 스올에 가까웠사오니
4 나는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이 인정되고 힘없는 용사와 같으며
5 죽은 자 중에 던져진 바 되었으며 죽임을 당하여 무덤에 누운 자 같으니이다 주께서 그들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시니 그들은 주의 손에서 끊어진 자니이다
6 주께서 나를 깊은 웅덩이와 어둡고 음침한 곳에 두셨사오며
7 주의 노가 나를 심히 누르시고 주의 모든 파도가 나를 괴롭게 하셨나이다 (셀라)
8 주께서 내가 아는 자를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고 나를 그들에게 가증한 것이 되게 하셨사오니 나는 갇혀서 나갈 수 없게 되었나이다
9 곤란으로 말미암아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매일 주를 부르며 주를 향하여 나의 두 손을 들었나이다
10 주께서 죽은 자에게 기이한 일을 보이시겠나이까 유령들이 일어나 주를 찬송하리이까 (셀라)
11 주의 인자하심을 무덤에서, 주의 성실하심을 멸망 중에서 선포할 수 있으리이까
12 흑암 중에서 주의 기적과 잊음의 땅에서 주의 공의를 알 수 있으리이까
13 여호와여 오직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
14 여호와여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시나이까
15 내가 어릴 적부터 고난을 당하여 죽게 되었사오며 주께서 두렵게 하실 때에 당황하였나이다
16 주의 진노가 내게 넘치고 주의 두려움이 나를 끊었나이다
17 이런 일이 물 같이 종일 나를 에우며 함께 나를 둘러쌌나이다
18 주는 내게서 사랑하는 자와 친구를 멀리 떠나게 하시며 내가 아는 자를 흑암에 두셨나이다
📖 말씀
"괜찮지 않아도 괜찮은 기도"
서론 | 괜찮지 않아도 괜찮은 기도
사랑하는 여러분, 살다 보면 정말 힘든 순간들이 찾아옵니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을 지날 때가 있죠.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하나님, 괜찮아요. 다 잘 될 거예요"라고 억지로 밝은 모습을 보여야 할까요? 아니면 솔직하게 우리의 고통을 다 털어놓아야 할까요?
오늘 우리가 묵상할 시편 88편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어둡고 절망적인 시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른 탄식 시편들은 보통 고통으로 시작하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의 응답이나 찬양, 혹은 소망의 고백으로 끝을 맺습니다. 그러나 시편 88편은 마지막 절까지도 회복의 빛 한 줄기 없이, 철저한 어둠과 고통 속에서 마무리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시편을 읽으며 불편함을 느끼거나, 심지어 피하고 싶어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이 시편의 진정한 의미와 은혜가 시작됩니다. 시편 88편은 우리에게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며, 가장 솔직하고 날것 그대로의 기도가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이 시편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모든 고통, 절망, 심지어 하나님을 향한 의문과 불평까지도 숨김없이 아뢸 수 있는 믿음의 자유와 용기를 가르쳐 줍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 삶의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정직한 기도의 힘을 발견하고, 우리의 고통이 하나님 앞에서 예배가 될 수 있다는 은혜로운 진리를 함께 나누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본론 |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첫째, 생명의 끝자락에서 드리는 부르짖음 (1–6절)
"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야로 주 앞에서 부르짖었사오니" (1절)
시편 기자는 숨 쉬듯 고백합니다. 그가 주님을 "내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놀라운 신앙 고백입니다. 극한의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그는 여전히 하나님만이 자신의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인정하고 붙들고 있습니다. 그의 부르짖음은 '주야로' (day and night) 계속됩니다. 이는 그의 고통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만성적이고 강렬하여 잠시도 쉴 틈 없이 그를 짓누르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그는 마치 욥이 그러했듯이, 진정한 믿음이 고통 앞에서 무관심하게 수긍하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기도로 주님과 씨름하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의 영혼은 "재난으로 가득 차" 삶의 의욕조차 사라진 듯하며, "나의 생명은 스올에 가까웠다"고 고백합니다(3절). '스올'은 구약에서 죽은 자들의 세계를 의미하는 곳으로, 시인은 자신이 이미 죽음의 경계에 서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는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이 인정되고 힘없는 용사"처럼 느껴집니다(4절). 사회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이미 죽은 사람 취급을 받고 있으며, 과거의 강인함과 존엄성이 완전히 무너진 상태입니다.
더 나아가 그는 "죽은 자 중에 던져진 바 되었으며... 그들은 주의 손에서 끊어진 자니이다"라고 탄식합니다(5절). 이는 단순히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것을 넘어, 하나님의 기억에서조차 지워지고 버려진 듯한(abandoned) 절망감을 표현합니다. 구약 사상에서 주님은 죽은 자들과 관계하지 않으시기에, '주의 손에서 끊어졌다'는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 즉 영적인 돌봄에서 완전히 단절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것이 그에게는 가장 큰 고통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 모든 고통이 마치 하나님께서 자신을 "깊은 웅덩이와 어둡고 음침한 곳에 두셨사오며" (6절) 일어난 일이라고 고백하며, 고난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로 인해 괴로워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던지는 질문 (7–12절)
"주의 노가 나를 심히 누르시고 주의 모든 파도가 나를 괴롭게 하셨나이다 (셀라)" (7절)
시인은 자신의 고통이 단순한 불운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의 진노'가 자신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고 느낍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마치 거대한 파도처럼 그를 덮쳐 위험과 절망감에 빠뜨립니다. 여기서 '셀라'는 이 극심한 고통과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묵상을 깊이 하도록 우리를 잠시 멈춰 세웁니다.
그는 인간적인 지지도 완전히 상실했습니다. "주께서 내가 아는 자를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고" (8절) 그의 친구들은 단순히 부재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자신을 철저히 혐오하게 만드셨기 때문에 그에게 적대적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는 사회적으로 철저히 고립되어 "갇혀서 나갈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그는 지쳐 울어서 눈이 쇠약해질 지경이지만(9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를 멈추지 않고 하루 종일 주님께 손을 듭니다.
이런 상황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침묵에 대한 수사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주께서 죽은 자에게 기이한 일을 보이시겠나이까? 죽은 영들이 일어나 주를 찬양하리이까?" (10절) 이것은 사실상 "주님, 제가 죽으면 어떻게 주님을 찬양하겠습니까? 지금, 살아있는 저를 구원해 주십시오!"라는 간절한 호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인자하심(헷세드)과 성실하심(에무나), 그리고 공의가 죽음의 영역인 무덤, 흑암, 망각의 땅에서 선포되거나 알려질 수 있는지 연달아 질문합니다(11-12절). 구약의 제한된 계시 속에서, 그는 죽음이 모든 인간의 희망을 끝낸다고 보았기에, 이 질문들은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기이한 일과 사랑을 경험하고 싶다는 간절한 외침인 것입니다.
셋째, 절망 속에서도 놓지 않는 신앙의 끈기 (13–18절)
"여호와여 오직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 (13절)
이 구절은 앞선 절망적인 질문들과 강력한 대조를 이룹니다. 시인은 자신이 여전히 살아있고, '오직' 주님께만 도움을 부르짖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그는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부터 기도를 멈추지 않습니다. 기도는 그의 마지막 수단이 아니라, 그의 첫 번째 본능이며, 그의 삶의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도 주님을 향한 그의 믿음과 신뢰가 여전히 굳건하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그의 기도는 응답되지 않는 현실에 대한 고통으로 이어집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시나이까?" (14절) 그는 하나님께 멸시당하고 무시당한다고 느끼며,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질문은 앞선 질문들보다 더욱 비난적이고 원망스러운 어조를 띠지만, 그는 이 모든 질문을 사람들에게 하소연하는 대신 주님께 직접 가져갑니다. 그의 믿음은 자신이 보고 느끼는 상황을 초월하여, 여전히 하나님께 모든 것을 아뢰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고통은 단기적인 것이 아니라, "어릴 적부터 고난을 당하여" 평생을 따라다닌 만성적인 아픔입니다(15절). 이 고난은 그를 점진적으로 지치게 만들었고, 이제는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말조차 할 수 없는 지경(16절)에 이르렀습니다. 마치 홍수처럼 "물 같이 종일 나를 에우며... 한꺼번에 나를 에워쌌나이다" (17절)라고 표현하며, 피할 수 없는 고통의 파도에 완전히 휩쓸렸음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시편은 가장 충격적인 절로 끝납니다. "주는 내게서 사랑하는 자와 친구를 멀리 떠나게 하시며 내가 아는 자를 흑암에 두셨나이다" (18절) 거의 모든 탄식 시편이 찬양이나 소망의 고백으로 끝나는 것과 달리, 시편 88편은 위로도, 구원의 약속도 없이 '흑암'이라는 단어로 마무리됩니다. 그는 자신의 철저한 고립과 취약성에 대한 책임을 주님께 돌리며, 어둠 속에서 홀로 걷는 자신의 처지를 직시합니다. "어둠이 나의 유일한 친구"라는 이 마지막 문장은 듣는 이에게 깊은 탄식과 함께 진한 여운을 남깁니다.
결론 | 정직한 고통, 거룩한 예배
사랑하는 여러분, 시편 88편은 우리에게 중요한 진리를 깨닫게 합니다. 때로 우리의 삶은 회복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던져질 수 있습니다. 기도해도 응답이 없고, 기다려도 아무런 변화가 없을 때, 우리는 깊은 절망과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왜"라고 묻고, 심지어는 불평하고 원망할 수도 있습니다. 시편 88편은 그러한 정직한 고통과 외침조차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드려질 수 있는 거룩한 예배임을 보여줍니다.
이 시편의 시인은 가장 깊은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내 구원의 하나님"이라 부르며, 그에게 끊임없이 부르짖습니다. 비록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침묵과 버려진 듯한 아픔을 겪었지만,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끝까지 놓지 않았습니다. 그의 기도는 문제 해결을 위한 공식적인 주문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존재론적인 신뢰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고통 속에서도 여전히 주권자이심을 인정하고, 자신의 모든 비참한 상황을 주님께 맡겨드렸습니다.
신약의 관점에서 볼 때, 시편 88편의 시인은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절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예언적으로 보여줍니다. 인류의 죄를 짊어지시고 하나님의 진노를 온전히 받으신 예수님은, 시편 기자가 경험한 것보다 더 깊은 고통과 하나님의 버려짐을 실제로 겪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 극한의 어둠 속으로 들어가셨기에, 그분은 우리의 모든 고통에 공감하시고(히 4:15), 우리가 가장 깊은 절망의 순간에도 우리를 돕고 구원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 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지금 삶의 시편 88편을 통과하고 계십니까?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홀로 고통받고 계십니까? 주님께 부르짖어도 응답이 없는 것 같아 낙심하고 계십니까?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솔직한 눈물과 탄식까지도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여러분의 가장 깊은 고통과 절망까지도 하나님께 숨김없이 아뢰십시오.
시편 88편은 우리에게 답을 주지 않습니다.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서 절망해도 괜찮다'는 놀라운 위로와 용기를 줍니다. 이 시편이 비록 어둠 속에서 끝나지만, 그 어둠 속에서도 하나님께 부르짖는 그 신앙의 행위 자체가 가장 큰 믿음의 고백입니다. 오늘도 그 어둠 속에서 부르짖는 여러분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상달될 줄 믿으며, 침묵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참된 위로와 버틸 힘을 얻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시편 88편 본문 연구 및 주석]
📖 본문 배경
❖ 개요
시편 88편은 시편 전체 가운데 가장 깊고 어두운 탄식을 담은 기도문으로, 마무리마저 소망이 아닌 “흑암”으로 끝나는 유일한 시편입니다. 고라 자손의 시로, ‘에스라인 헤만(Heman the Ezrahite)’의 마스길로 기록되어 있으며, 시편 88편은 공동체 찬양의 틀 안에서조차 사라지지 않는 개인의 고통, 절망, 침묵하시는 하나님 앞에서의 끊임없는 부르짖음을 정직하게 드러냅니다. 이 시편은 육체적 질병이든, 영적 침체이든, 혹은 사회적 고립이든 간에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의 현장에서 하나님께 소망 없이 기도할 수밖에 없는 심정을 진실하게 담아내며, 그 자체로 ‘신앙의 깊은 밤’을 통과하는 이들에게 울림을 주는 시입니다.
❖ 역사적 배경
시편 88편은 바벨론 포로기 전후 또는 깊은 공동체적 고난의 시기에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에스라 사람 헤만’은 역대상 6장에 따르면 다윗 시대 성전 음악을 담당했던 고라 자손 레위인이며, 당시 성전 찬양과 예배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입니다. 이 시는 개인의 고난을 그리지만, 동시에 예배 가운데 불려졌던 점에서 공동체의 고난과 슬픔 또한 담아내는 탄식의 모델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도 부르짖는 기도를 멈추지 않으며, 그 절박한 음성은 포로기의 상실감, 하나님의 임재 상실, 질병과 죽음 앞의 무기력, 또는 관계 단절 속의 절망이라는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 분위기와 맞닿아 있습니다.
❖ 문화적 배경
고대 근동 사회에서는 죽음, 병, 고난 등을 신의 저주 혹은 심판의 결과로 간주했습니다. 특히 ‘무덤’, ‘스올’, ‘흑암’ 등은 하나님의 임재와 분리된 곳, 더 이상 생명의 연결이 단절된 장소로 여겨졌습니다. 본 시편은 그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끊어진 듯한 존재가 하나님께 여전히 부르짖는, 문화적으로는 모순된 태도를 통해 오히려 신앙의 진정성과 극한 상황 속의 경외심을 보여줍니다. 또한 ‘갇혀 나갈 수 없게 된 자’, ‘사랑하는 자와 친구로부터 단절된 자’라는 표현은 단순히 물리적 고립을 넘어, 공동체와의 연대와 정체성을 상실한 깊은 영적 상실의 상태를 시사합니다.
❖ 신학적 배경
시편 88편은 회복이나 응답이 없는 탄식을 통해, 인간의 고통이 반드시 응답이나 해결로 귀결되지 않더라도 그 고통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드려질 수 있는 예배의 행위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지체되거나 전혀 없는 듯 보일 때에도, 시인은 ‘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며 관계를 포기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부르짖는 신앙의 인내를 실천합니다. 이것은 신앙의 성숙이 단지 기적의 경험이나 응답의 여부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도 그분만이 나의 유일한 대상이심을 고백하는 믿음의 본질을 드러냅니다. 이 시편은 신약의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예수님의 고통, 십자가에서의 버려짐의 순간(“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과 연결되며, 궁극적으로는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깊은 동일시와 은혜로 이어집니다(히 4:15). 시편 88편은 구속사 속에서 하나님의 어두운 얼굴 아래에서도 부르짖을 수 있는 자격이 은혜임을 선포하는 시편입니다.
📖 본문 요약
시편 88편은 고라 자손의 시이자, 에스라인 헤만의 마스길로 기록된 매우 독특하고도 어두운 탄식시입니다. 총 18절로 구성된 이 시편은 전체 시편 중 유일하게 끝까지 소망이나 회복의 언급 없이 깊은 절망 가운데 마무리되는 시편이며, 신앙 안에서 감정의 진실한 토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본문입니다.
1–2절 | 시인은 “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라는 고백으로 기도를 시작합니다. 고통 가운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자신의 구원의 주’로 부르며, 낮과 밤 끊임없이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토로합니다. 이 절망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부름을 멈추지 않는 신앙의 자세가 인상 깊습니다.
3–5절 | 자신의 영혼은 고난으로 가득 차 있고, 스올에 가까워졌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죽은 자들과 같이 무력하고 잊혀진 자, 하나님에게서 끊어진 자와 같은 존재로 묘사됩니다. ‘무덤에 내려가는 자’라는 표현은 단순히 죽음을 의미하기보다, 생명의 주 되신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이라는 영적 상태를 드러냅니다.
6–8절 | 이 고통은 단순히 상황이 악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런 자리에 두셨다는 해석으로 이어집니다. “주의 진노가 나를 심히 누르고”라는 표현은 고난의 근원이 하나님임을 고백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깊은 인식을 보여줍니다. 사람들과도 단절되고, 자신은 외롭고 고립된 상태에 있음을 호소합니다.
9절 | “눈이 근심으로 말미암아 쇠하였다”는 말은, 지속적인 눈물과 고통의 시간 속에서 육체적·정서적 소진을 나타냅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시인은 여전히 하나님을 향해 손을 들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절망 속의 신앙, 어둠 속에서도 하나님을 찾는 그의 태도는 본 시편의 핵심 신앙 고백이라 할 수 있습니다.
10–12절 | 시인은 죽은 자에게는 하나님의 기이한 일을 알릴 수 없고, 무덤에서는 주의 인자하심을 선포할 수 없다고 호소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생존의 요청이 아닌,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삶으로 회복되기를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그의 탄식은 자기 연민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로 이어집니다.
13절 | 이 절에서 시인은 다시 “여호와여”라고 하나님을 부르며, 아침부터 기도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고난의 밤이 길어도 아침이 올 것을 기대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그의 모습은 시편 전체의 반복되는 신앙의 패턴을 보여줍니다.
14–18절 | 그러나 그 기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현실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셨고, 멀리하셨다는 탄식, 자신을 친구와 가족으로부터 끊으셨다는 고백은 그를 절대 고립의 상태로 내모는 듯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18절, “내 친구와 이웃을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셨으며 내 친척을 흑암이라 부릅니다”라는 절망적 마무리는,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가장 깊은 어둠 가운데서조차 하나님께 토로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시편 88편은 고난 중에도 신앙을 놓지 않는 정직한 탄식이며, 응답이 없어도 하나님께 울부짖을 수 있는 자격이 은혜임을 선포하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오늘날 신앙의 어두운 밤을 지나고 있는 성도들에게 이 시편은, 말이 되지 않아도, 눈물밖에 없어도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위로의 말씀이 됩니다.
📖 붙잡는 말씀
13 여호와여 오직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
이 말씀은 시편 88편의 깊은 절망 속에서도 유일하게 희미한 빛과 같이 등장하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시인은 이 시편 내내 어둠과 고통, 외로움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침이 되자 다시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기도라는 ‘신앙의 습관’을 통해 하나님께 의탁하는 삶의 태도를 보여줍니다.
‘아침에 기도한다’는 표현은 단지 하루의 시작이라는 의미만이 아니라, 절망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임재를 기다리는 영적 태도를 상징합니다. 앞선 절들에서는 “죽은 자 중에 자신이 있으며”, “친척은 흑암이라 부른다”는 표현까지 등장했지만, 이 한 구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는 멈추지 않는다는 결단의 선언입니다.
이 구절은 마치 욥이 고백한 “죽으면 죽으리이다”(욥기 13:15)와도 닮아 있습니다. 아무 응답이 없어도, 환경이 변화되지 않아도,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는 것을 멈추지 않는 것, 그것이 진짜 믿음의 태도임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신앙생활을 하며 지속적인 고통 가운데 있는 이들이 붙잡을 수 있는 말씀이 바로 이 구절입니다. 누군가는 “내가 왜 계속 기도해야 하나요?“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시편 88편은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여전히 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응답을 받아야만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그 행위 자체가 믿음이며 예배이며, 위대한 신뢰의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이렇게 도전합니다.
“그대의 아침을 시작하는 기도는 살아 있는 믿음의 표시입니까?”
“어둠이 가시지 않아도, 여전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용기를 품고 있습니까?”
고통 중에도 손을 들고 부르짖을 수 있는 사람, 그는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큰 자입니다. 그가 바로 오늘 우리가 본받아야 할 믿음의 예배자입니다.
📖 단어 연구
❖ 구원 (יֵשַׁע / 예샤)
✦ 뜻과 의미
히브리어 ‘예샤’(יֵשַׁע)는 구출하다, 해방하다, 안전하게 하다 등의 의미를 가진 어근 יָשַׁע(yasha)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주로 전쟁이나 위기 상황 속에서 건짐을 의미합니다. 이는 단지 생존 그 자체가 아닌, 적의 손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놓이는 상태를 말합니다.
✦ 본문에서의 의미
1절에서 시인은 “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라고 고백하며, 자신의 처절한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구원의 하나님’으로 부르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신앙의 핵심 고백입니다. 이 말은 역설적으로 시인이 지금 당장은 구원을 체감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본질이 ‘구원’에 있음을 신뢰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 신학적 의미
‘예샤’는 구약 전반에서 하나님의 구속사적 사역을 대표하는 단어입니다. 단순히 고난에서의 일시적 회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죄와 심판에서 건져내시는 은혜의 역사를 뜻합니다. 이 단어는 신약 헬라어로 ‘소테리아’(σωτηρία, 구원)로 번역되며, 예수 그리스도(Soter, 구세주)를 통해 완성됩니다. 시편 88편의 어둠 가운데서 이 단어는 그리스도의 구속을 향한 갈망의 예표로 읽힙니다.
❖ 부르짖다 (צָעַק / 차아크)
✦ 뜻과 의미
히브리어 ‘차아크’(צָעַק)는 “크게 외치다, 도움을 요청하다”라는 뜻의 동사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문화에서는 절박한 상황에서 소리 높여 부르는 행위를 ‘부르짖음’으로 표현하며, 이는 단순한 말이 아니라 영혼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탄식입니다.
✦ 본문에서의 의미
1절과 2절에서 시인은 “주야로 주 앞에서 부르짖었다”고 말하며, 단순한 기도가 아닌 고통의 절규를 표현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신다는 느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께만 향하고 있는 신앙적 애착을 보여줍니다.
✦ 신학적 의미
성경에서 ‘부르짖음’은 하나님의 응답을 불러오는 믿음의 통로로 자주 등장합니다(출 3:7, 시 34:17). 예수님 역시 십자가 위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부르짖으셨으며(마 27:46), 이는 신앙이란 결국 하나님을 향한 마지막 끈을 놓지 않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시편 88편에서의 부르짖음은, 응답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침묵 속에 머무는 신앙의 용기를 드러냅니다.
❖ 스올 (שְׁאוֹל / 쉐올)
✦ 뜻과 의미
‘쉐올’(שְׁאוֹל)은 히브리 사상에서 죽은 자들이 가는 음부, 혹은 지하 세계를 가리키며, 신약의 헬라어 ‘하데스’(ᾅδης)에 해당합니다. 삶의 단절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영적 암흑의 장소로 여겨졌습니다.
✦ 본문에서의 의미
3절에서 시인은 자신의 생명이 스올에 가까웠다고 고백합니다. 이는 단지 죽음의 임박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가 철저히 사라진 상태를 묘사합니다. 시인은 살아 있으나 죽은 자처럼 취급받고, 아무도 그를 기억하지 않는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 신학적 의미
구약에서 스올은 종말론적 심판의 장소라기보다는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의 상징으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음부의 권세를 깨뜨리셨기에, 스올은 더 이상 최종적 절망의 장소가 아닌, 복음의 승리를 선포하는 배경이 됩니다(행 2:27, 계 1:18). 시편 88편은 스올 앞에서 부르짖는 한 인간의 모습 속에, 그리스도께서 대신 지신 고통의 그림자가 담겨 있습니다.
❖ 기억하다 (זָכַר / 자카르)
✦ 뜻과 의미
히브리어 ‘자카르’(זָכַר)는 “기억하다, 회상하다, 주의하다”의 의미를 가진 동사로, 단순한 추억이 아니라 적극적 관심과 돌봄, 행동을 포함한 기억을 뜻합니다.
✦ 본문에서의 의미
5절에서 시인은 “주께서 그들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시니”라고 말하며,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관심 밖에 있다는 절망을 토로합니다. 기억되지 않는 존재는 곧 존재 자체가 부정된 것과 같았습니다. 그만큼 시인은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을 죽음보다 더 무섭게 여깁니다.
✦ 신학적 의미
하나님께서 기억하신다는 것은 언약적 사랑 안에서의 개입과 구원을 의미합니다(창 8:1, 출 2:24). 반대로, 하나님이 기억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심판이나 소외의 상징입니다. 하지만 시편 88편에서 이 ‘기억의 단절’은 기억되기를 갈망하는 영혼의 기도로 승화됩니다. 결국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회개의 기도로 이어지며, “주여, 주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라는 강도의 기도로 성취됩니다(눅 23:42).
❖ 흑암 (אֹפֶל / 오펠)
✦ 뜻과 의미
히브리어 ‘오펠’(אֹפֶל)은 “짙은 어둠, 절망, 눈에 보이지 않는 깊은 혼돈”을 의미하는 명사로, 단순히 빛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심리적·영적 절망의 상태를 상징합니다.
✦ 본문에서의 의미
18절에서 시인은 “내가 아는 자를 흑암에 두셨나이다”라고 말하며,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는 이들과의 관계조차 차단하셨다고 느낍니다. 여기서 흑암은 단지 시각적 암흑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 모두에게서 철저히 고립된 심령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 신학적 의미
‘흑암’은 창세기 1:2에서 하나님의 창조 이전 혼돈 상태로 등장하며, 출애굽기에서는 심판의 징조로 표현됩니다(출 10:22). 그러나 복음은 이 흑암 속에 비추는 빛으로 시작합니다(사 9:2, 요 1:5). 시편 88편에서의 흑암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경험하신 “제육시부터 제구시까지 온 땅에 어둠이 임하더라”는 절정의 고난을 예고하며, 모든 흑암 가운데 임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기대하게 합니다.
📖 절별 주해
1절 | 구원의 하나님께 부르짖는 시작
“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야로 주 앞에서 부르짖었사오니”
시인은 극심한 고통과 절망의 한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내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이 고백은 단순히 입술의 고백을 넘어, 과거에 경험했던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며, 현재의 상황에서도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의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인정하는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드러냅니다. '주야로' (day and night) 부르짖는다는 표현은 그의 고통이 만성적이고 강렬함을 시사하며, 쉬지 않고 이어지는 간절하고 끈질긴 기도의 태도를 보여줍니다. 이는 마치 욥이 그러했듯이, 진정한 믿음이 고통 앞에서 무관심하게 수긍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로 주님과 씨름하는 것임을 증명합니다.
2절 | 기도가 상달되기를 바라는 간구
“나의 기도가 주 앞에 이르게 하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기울여 주소서”
시편 88편에서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실제적인 간구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기도가 하나님의 임재(presence)에 도달하기를 간청하며, 단순히 자신의 말을 듣는 것을 넘어 하나님께서 자신의 부르짖음에 주의를 기울여 주시기를(be attentive to him) 간절히 바랍니다. 이는 왕이 청원자에게 왕홀을 내밀어 접근을 허락하듯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받아들여 주시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을 담고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며 백성의 부르짖음을 들으신다고 믿지만, 마치 시편 13편처럼 하나님의 침묵에 직면하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의 개입을 간청하며, 자신의 애타는 신음(rinnâ, "cry")에 귀 기울여 달라고 간곡히 호소합니다.
3절 | 죽음의 문턱에 선 고백
“무릇 나의 영혼에는 재난이 가득하며 나의 생명은 스올에 가까웠사오니”
접속사 '무릇' (kî, 'for')은 앞선 2절의 간구에 대한 이유를 제시합니다. 시인은 자신의 내면이 고난으로 가득 차서 자신을 삼켜버렸다고 느낍니다. 그의 생명은 이미 죽음의 심연, 즉 스올(Sheol)의 가장자리에 다다랐다고 표현합니다. 이는 단순히 고통스러운 상태를 넘어, 구약에서 죽은 자들의 장소로 여겨지는 스올에 이미 발을 들여놓은 듯한 극한의 절망감을 나타냅니다. 셰이퍼의 관찰처럼, 시인은 "죽음의 동반을 느끼는데, 그곳에서는 하나님과의 관계는 생각할 수 없다"고 여기며 심리적, 육체적 증상들이 뒤섞인 처절한 상태임을 고백합니다.
4절 | 살아 있으나 죽은 자로 취급됨
“나는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이 인정되고 힘없는 용사와 같으며”
시인은 자신이 이미 무덤으로 내려가는 자들 가운데 헤아림을 받았다고 느낍니다. 이는 사회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그 누구도 자신에게 희망이 없다고 여기며 포기했음을 의미합니다. 과거의 강인함과 활력을 상징하는 '용사'가 이제는 '힘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표현은 고난이 그의 존엄성과 존재감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무기력하게 만들었음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는 살아있지만 사실상 죽은 자나 다름없는 상태라고 스스로를 인식합니다.
5절 | 하나님의 기억에서 끊어진 자
“죽은 자 중에 던져진 바 되었으며… 그들은 주의 손에서 끊어진 자니이다”
시인의 비극은 더욱 심화됩니다. 그는 단순히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것을 넘어, 하나님의 기억에서조차 지워지고 버려진 듯한(abandoned) 절망을 표현합니다. 구약에서 '버려진'(ḥopšî)이라는 단어는 해방된 노예를 지칭하는 경우가 많지만, 여기서는 고난에서 벗어나 집단 무덤에 던져지는 역설적인 '자유'를 의미합니다. 테이트가 지적했듯, 그는 공동체의 책임에서 벗어나 죽은 자들 가운데 '자유'를 얻었지만, 이는 사실상 살아있는 지옥과 같습니다. 구약 사상에서 주님은 죽은 자들과 관계하지 않으시기에, '주의 손에서 끊어졌다'는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 즉 영적 돌봄에서 완전히 단절된 상태를 의미하며, 이것이 그에게는 가장 큰 고통으로 다가옵니다.
6절 | 깊은 어둠 속에 놓이게 하심
“주께서 나를 깊은 웅덩이와 어둡고 음침한 곳에 두셨사오며”
시인은 자신의 처참한 상황을 하나님의 직접적인 행위로 인식하며 주님께 직접적으로 불평합니다. 그는 주님께서 자신을 "가장 낮은 구덩이"(lowest pit), 즉 가장 극심한 고통의 심연에 두셨다고 토로합니다. 시편 69편에서 '깊은 곳'(depths)이 극한 고난의 경험을 나타내는 이미지인 것처럼, 시인은 자신이 생명과 빛에서 완전히 단절되고, 주님의 도움에서 완전히 분리되었다고 느낍니다. 시편 86편에서 주님께서 간구자를 스올의 깊은 곳에서 구원하신 것과는 대조적으로, 시편 88편의 시인은 자신이 주님의 시야와 마음에서 벗어났다고 절규합니다. 이 '어둡고 음침한 곳'은 단지 물리적인 장소를 넘어, 영적 고립과 외로움의 심연을 상징합니다.
7절 | 하나님의 진노 아래 눌림
“주의 노가 나를 심히 누르시고 주의 모든 파도가 나를 괴롭게 하셨나이다 (셀라)”
시인은 하나님의 '심판의 진노'가 자신을 무겁게 짓누르고(weighs heavily) 있다고 느낍니다. '누르시고'에 사용된 동사 '사마크'(sāmak)는 에스겔서 24장 2절에서 바빌론이 예루살렘을 포위할 때 사용된 것처럼, 강렬하고 압도적인 힘을 의미합니다. 야훼의 진노는 마치 연속적으로 밀려드는 거대한 파도와 같아서(시 42:7 참조), 그를 덮쳐 위험과 절망감에 빠뜨립니다. 여기서 '셀라'(Selah)는 단순히 음악적 지시를 넘어, 이 극심한 고통과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묵상을 깊이 하도록 독자나 공동체에게 요청하는 강조의 역할을 합니다.
8절 | 고립된 존재가 됨
“주께서 내가 아는 자를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고…”
시인은 자신의 고통의 시기에 어떤 인간적인 지지도 느끼지 못합니다. 그는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 모두에게 잊히고 버림받아 역경 속에서 홀로 남겨졌다고 느낍니다(애 1:16 참조). 그의 친구들은 단순히 부재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자신을 철저히 혐오하게 만드셨기 때문에 그에게 적대적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결과, 그는 사회적으로 따돌림을 당하고 소외되어, 욥이 욥기 19:13-29와 30:9-15에서 느꼈듯이 완전히 불명예스럽고 거부당했다고 절규합니다. "나는 갇혀서 나갈 수 없나이다"라는 표현은 물리적인 감금뿐만 아니라, 사회적 관계와 소통에서 완전히 단절되어 탈출구가 없는 내적 고통의 상태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9절 | 쇠약 속에서도 드리는 기도
“곤란으로 말미암아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 나의 두 손을 들었나이다”
시인은 자신의 고통에 대해 철학적인 무관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반게메렌이 지적했듯이, "진정한 믿음은 어떤 일이든 무관심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믿음은 기도로 주님과 씨름하는 데 있다." 오히려 그는 울음으로 인해 그의 눈이 녹아내리는 것 같다고 표현할 정도로(시 69:3; 욥 17:7 참조) 극심하게 지쳐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온종일 주님께 기도로 부르짖고, 간청하며 두 손을 펼칩니다. 9절의 주님을 향한 이 부르짖음은 1절의 서두와 포괄 구문(inclusio)을 형성하여, 그의 서두와 불평 전체를 감싸면서, 절망 속에서도 결코 기도를 포기하지 않는 끈질긴 믿음을 보여줍니다.
10절 | 죽음과 찬송에 대한 질문
“주께서 죽은 자에게 기이한 일을 보이시겠나이까…”
이 구절은 표준 탄식 시 패턴에서 신뢰의 고백이 나타나야 할 부분에 시인이 던지는 수사적 질문입니다. 시인은 죽음과 관련된 다섯 가지 단어("죽은 자", "죽은 영", "무덤", "아바돈", "어둠", "망각")와 야훼의 다섯 가지 활동("이적을 베풀다", "인자하심", "신실하심", "이적", "의")을 대조하며, 이 질문들이 모든 것이 무덤에서는 알려지지 않는다는 파괴적인 선언을 암시합니다. 구약에서 이적(peleʾ)은 오직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일이며, 시인이 자신의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바로 그것을 필요로 합니다. 심지어 죽은 자들 가운데 강한 자들인 '르파임'(departed spirits)조차도 일어나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습니다. 시인은 구약의 부분적인 계시를 통해 죽음이 모든 인간의 희망을 끝낸다고 결론 내릴 수밖에 없었기에(시 6:5; 30:8; 115:17 참조), 자신이 살아있는 지금, 주님께서 개입하시어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암묵적으로 호소하는 것입니다.
11–12절 | 인자와 성실을 위한 간청
“주의 인자하심을 무덤에서… 주의 공의를 알 수 있으리이까”
시인은 주님께 버림받았다고 느끼면서도 주님께 직접적으로 계속해서 말합니다. 이는 주님께서 자신을 포기한 것처럼 보일 때에도 주님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인자하심(ḥesed)과 신실하심(ʾĕmûnâ)이 죽음의 영역에서 말로 예배되고 찬양될 수 있는지 묻습니다. 그의 수사적 질문은 죽은 자들이 주님의 이러한 찬양할 만한 속성들을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을 명확히 합니다. 구약 계시의 제한된 지평 내에서, 시인은 죽음을 어둠과 망각의 장소로 묘사합니다. 이러한 죽음에 대한 견해로 볼 때, 그가 하나님의 개입을 간청한 것은 당연하며, 자신의 상태에 대한 어떤 긍정적인 미래도 상상하기가 얼마나 어려웠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는 곧 살아있는 자만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의 성품을 선포할 수 있으므로, 자신을 살려 달라는 간곡한 외침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13절 | 아침에도 계속되는 기도
“여호와여 오직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
"그러나 내가"(wa ʾănî)라는 강렬한 대조를 통해, 시인은 이전의 죽음에 대한 수사적 질문들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여전히 살아있고, 계속해서 주님께 도움을 부르짖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이는 1절의 표현과도 메아리치며, 욥의 불평과도 닮아 있습니다. 그의 극심한 고통은 그를 마비시키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열정적인 기도를 촉발했습니다. '아침에' 자신의 기도가 주님을 만난다고 말함으로써, 시인은 기도가 그의 일과 중 가장 첫 번째 우선순위임을 시사합니다. 기도는 그의 마지막 수단이 아니라 그의 첫 번째 본능인 것입니다. 반게메렌이 지적했듯이, "기도의 빈도와 끈기는 시편 기자가 주님의 의와 자신의 신실함을 믿는 경건한 사람임을 나타낸다." 또한, 구약에서 아침은 종종 주님께서 백성을 위해 개입하시는 시간이었으므로(시 30:5; 46:5; 사 37:36 참조), 시편 기자는 자신의 간구에 대한 주님의 긍정적인 응답을 기대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14절 | 버림받은 듯한 외침
“여호와여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시나이까?”
그가 기도할 때, 이 질문에서 명확히 드러나듯이, 시인은 왜 주님께서 지금까지 자신에게 응답하지 않으셨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는 하나님께 멸시당하고 무시당한다고 느끼며,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합니다(시 44:23 참조). 이는 10-12절에서 이전에 물었던 질문들보다 더욱 비난적인 성격을 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단순히 자신의 상황에 대해 불평하는 대신 주님께 직접 자신의 질문을 가져갑니다. 시편 기자의 믿음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보고 느끼는 것을 초월해야 함을 보여줍니다. 그는 하나님의 침묵과 부재를 깊이 경험하며 절망의 절정을 향해 나아갑니다.
15절 | 오랜 고난의 기억
“내가 어릴 적부터 고난을 당하여… 주의 두려움이 나를 끊었사오니”
이 고통은 단기적인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심지어 그의 젊은 시절부터 지속되어 왔습니다. 이 만성적인 고난은 그를 점진적으로 지치게 만들었고, 절망의 말을 쏟아냄으로써 그가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한계에 다다랐음을 분명히 합니다. 그는 고통당하거나 "괴로워하는(ʿānî)"자이며, 구약 전체에서 주님은 약한 자들을 특별히 돌보십니다(잠 22:22-23 참조). 그러나 그는 오히려 하나님께 공포를 느껴 심한 두려움(dread)에 사로잡혀 있습니다(욥 9:34; 13:21; 31:23 참조). 이는 그의 존재 전체가 고난으로 형성되었고, 이제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 찼음을 나타냅니다.
16절 | 진노와 두려움의 압박
“주의 진노가 내게 넘치고 주의 두려움이 나를 끊었나이다”
주님께 대한 그의 호소와 주님의 그에 대한 대우 사이에는 심각한 단절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두려움'(terrors)이 그를 침묵하게 하여, 그가 경험한 것에 대해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CSB와 대부분의 영어 번역본은 '짜마트'(ṣāmat)를 "파괴하다"로 번역하지만, 오스월트의 주장처럼 "침묵시키다" 또는 "마비시키다"의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시편 기자는 주님께서 자신의 삶에서 무엇을 하고 계신지, 왜 그렇게 행동하시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가 아는 것은 자신이 압도당하고 절망적이라는 것뿐이며, 마치 하나님의 진노의 불에 그슬린 숲과 같습니다. 그는 고통 속에서 말조차 할 수 없는 극한의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17절 | 쉼 없이 몰려오는 고난
“이런 일이 물 같이 종일 나를 에우며… 한꺼번에 나를 에워쌌나이다”
시인은 이제 하나님의 진노를 홍수에 비유하여 자신의 고통을 표현합니다. 다른 시편들에서는 주님께서 백성을 고난의 홍수에서 구원하시지만(시 18:16; 69:14; 144:7), 이 경우 시편 기자는 주님께서 자신에게 이 홍수를 보내셨다고 느낍니다. 그는 마치 하나님의 진노 아래 익사하는 것 같으며,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 개입하시지 않으면 이 절망적인 상태에서 어떠한 안식이나 해방도 없다고 느낍니다. 현재로서는 그럴 가능성조차 없어 보입니다. '종일' 그를 휘감는다는 표현은 고난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그를 완전히 에워싸서, 피할 수 없는 구조화된 고통의 형태임을 강조합니다.
18절 | 흑암 속의 마지막 탄식
“주는 내게서 사랑하는 자와 친구를 멀리 떠나게 하시며 내가 아는 자를 흑암에 두셨나이다”
거의 모든 구약 탄식 시편들이 찬양이나 찬양의 서원으로 끝나는 것과 달리, 시편 88편은 이례적이고 예외적인 시편입니다. 그의 고통 속에서 시편 기자는 자신에게 의지할 아무도 남아있지 않다고 느낍니다. 그는 '주님'(You)이라는 대명사를 사용하여, 자신의 완전한 고립과 취약성에 대한 책임을 주님께 돌립니다. 그는 어둠 속에서 홀로 걸으며 완전히 버려졌다고 느낍니다. 이 시편은 저주 시편들처럼 극심한 외로움의 경험을 반영하며, "어둠이 나의 유일한 친구"라는 가슴 아픈 말로 끝납니다. 히브리어로는 단 두 단어(məyudāʿay maḥšāk)로, 첫 단어는 '나에게 알려진 자들', 즉 '나의 동반자/친구들'을 의미하고, 두 번째 단어는 '어둠'을 뜻합니다. 시편은 끝에서 찬양으로 전환되지 않고, 단지 문제를 주님의 손에 맡기며, 사실상 주님께서 자신의 신실하심과 의로움으로 이 상황을 바로잡아 달라고 도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철저한 절망의 끝이면서도, 그 가운데에서도 하나님께 부르짖는 신앙의 신비를 역설적으로 드러냅니다.
📖 묵상
시편 88편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어두운 시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 시편이 끝내 ‘소망’이나 ‘회복’이라는 전환점 없이, 어둠과 고통 속에서 마무리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편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기도의 정직함이 무엇인지, 고난 중에도 신앙을 지킨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보여주는 깊은 묵상의 교과서와도 같습니다.
시인은 끊임없는 고난을 당합니다. 질병과 외로움, 거절과 침묵 속에서 그의 삶은 “스올에 가까웠다”고 고백합니다. 심지어 “사랑하는 자와 친구를 멀리 떠나게 하셨다”고 하며, 인생의 외곽선조차 무너진 상태입니다. 그러나 그는 기도합니다. 주야로, 쉬지 않고, 반복하여 하나님께 손을 듭니다.
그의 기도는 문제 해결을 위한 요청이기보다, 자신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정직한 고백입니다. 때로 우리는 ‘괜찮은 기도’, ‘응답받을 법한 기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시편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어둠 속에서 울부짖는 음성도 들으신다”고. 시인은 고난을 당하며 하나님의 얼굴이 감춰졌다고 느끼지만, 여전히 그 얼굴을 찾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완전히 놓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도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이 있을 수 있습니다. 기도했지만 상황이 나아지지 않고, 기다렸지만 응답이 들리지 않을 때, 이 시편은 우리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부르짖는 믿음’을 가르칩니다. 때론 믿음이란 상황을 이겨내는 능력이 아니라, 버티는 용기일 수 있습니다. 그 버팀의 자리에서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Bible'Story】 > [생명의 삶] 시편ㅣ2025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생명의 삶] 시편 89편 19절-37절 _ 2025. 7. 6(주일) (2) | 2025.07.06 |
---|---|
[생명의 삶] 시편 89편 1절-18절 _ 2025. 7. 5(토) (3) | 2025.07.05 |
[생명의 삶] 시편 87편 1절-7절 _ 2025. 7. 3(목) (7) | 2025.07.03 |
[생명의 삶] 시편 86편 1절-17절 _ 2025. 7. 2(수) (2) | 2025.07.02 |
[생명의 삶] 시편 85편 1절-13절 _ 2025. 7. 1(화) (2) | 2025.07.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