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자료는 개인적인 말씀 묵상과 연구를 바탕으로 [목회자의 설교 준비], [성경을 더욱 깊이 알고자 하는 분], 그리고 [말씀묵상에 도움이 필요한 성도]를 돕기 위해 제작되었습니다. 본 자료의 모든 저작권은 작성자인 〈LogosLab Steward〉에게 있으며, 자유롭게 사용 및 참고하시되 출처를 밝혀주시고, [무단 복제 및 배포]를 금합니다. 이 자료가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풍성하게 경험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 본문
개역개정
1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와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
2 빌라도가 묻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매
3 대제사장들이 여러 가지로 고발하는지라
4 빌라도가 또 물어 이르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그들이 얼마나 많은 것으로 너를 고발하는가 보라 하되
5 예수께서 다시 아무 말씀으로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빌라도가 놀랍게 여기더라
6 명절이 되면 백성들이 요구하는 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7 민란을 꾸미고 그 민란중에 살인하고 체포된 자 중에 바라바라 하는 자가 있는지라
8 무리가 나아가서 전례대로 하여 주기를 요구한대
9 빌라도가 대답하여 이르되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10 이는 그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러라
11 그러나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하여 도리어 바라바를 놓아 달라 하게 하니
12 빌라도가 또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를 내가 어떻게 하랴
13 그들이 다시 소리 지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14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 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15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NASB)
1 Early in the morning the chief priests with the elders and scribes and the whole bCouncil, immediately held a consultation; and binding Jesus, they led Him away and delivered Him to Pilate.
2 Pilate questioned Him, “Are You the King of the Jews?” And He answered him, “It is as you say.”
3 The chief priests began to accuse Him harshly.
4 Then Pilate questioned Him again, saying, “Do You not answer? See how many charges they bring against You!”
5 But Jesus made no further answer; so Pilate was amazed.
6 Now at the feast he used to release for them any one prisoner whom they requested.
7 The man named Barabbas had been imprisoned with the insurrectionists who had committed murder in the insurrection.
8 The crowd went up and began asking him to do as he had been accustomed to do for them.
9 Pilate answered them, saying, “Do you want me to release for you the King of the Jews?”
10 For he was aware that the chief priests had handed Him over because of envy.
11 But the chief priests stirred up the crowd to ask him to release Barabbas for them instead.
12 Answering again, Pilate said to them, “Then what shall I do with Him whom you call the King of the Jews?”
13 They shouted back, “Crucify Him!”
14 But Pilate said to them, “Why, what evil has He done?” But they shouted all the more, “Crucify Him!”
15 Wishing to satisfy the crowd, Pilate released Barabbas for them, and after having Jesus scourged, he handed Him over to be crucified.
📖 들어가는 기도
사랑과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이 고난주간의 거룩한 아침에 주님의 말씀 앞에 저를 세워 주시니 감사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다시 십자가의 길을 따라갑니다.
조용한 새벽, 억울한 재판을 받으시고, 사람들의 소리 없는 폭력 앞에 홀로 서신 주님을 기억합니다.
말씀을 묵상하려는 이 순간, 주님께서 그 새벽에 느끼셨던 외로움과 침묵 속의 고통이 제 마음에 깊이 새겨지게 하소서.
사람들의 소리에 밀려, 진실이 묻혀버리는 현실을 우리는 오늘도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도 정의가 뒤집히고, 거짓이 진실을 이기는 듯 보일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 역시 사람들의 눈치와 말에 흔들리며, 빌라도처럼 진실을 알면서도 침묵하거나 타협하고 맙니다.
그러나 주님, 오늘 말씀 앞에서 다시 눈을 뜨게 하소서.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주님의 선택이 얼마나 위대한지, 그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깨닫게 하소서.
주님, 바라바가 풀려나고 주님께서 채찍질 당하시며 십자가로 내몰리는 이 장면 앞에서,
내가 바로 바라바임을 고백합니다.
자격 없는 죄인인 나를 대신하여, 침묵하시며 고난의 길을 선택하신 그 사랑 앞에
어떤 말로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 제 안에 여전히 고집과 교만, 두려움이 있지만
이 말씀을 통해 주님의 뜻에 다시 순종하는 믿음과 용기를 허락해 주옵소서.
오늘도 제 마음을 여시고, 말씀 앞에 무릎 꿇게 하시며
억울한 일을 당하신 주님의 침묵 속에 담긴 순종과 사랑을 깊이 묵상하게 하소서.
십자가의 진리가 제 삶을 움직이게 하시고,
이 고난주간이 저의 신앙을 다시 세우는 은혜의 시간이 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본문배경
1. 역사적 배경
마가복음 15장의 사건은 기원후 1세기 초, 유대 땅이 로마 제국의 식민지로 놓여 있었던 시대에 일어났습니다. 당시 유대는 자치권 일부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실질적인 사법권은 로마 총독에게 있었습니다. 사형 판결은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이 직접 집행할 수 없었기에, 그들은 예수님을 로마 총독인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e)에게 넘겨야 했습니다.
빌라도는 기원후 26년부터 36년까지 유대 총독으로 재직하면서, 유대인의 종교적 감정에 무지하고 종종 충돌을 일으킨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요세푸스와 필로 같은 유대 역사가들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잔인하고 고집스러웠으며, 백성들의 반란을 두려워하여 종종 부당한 타협을 하기도 했습니다. 본문에서도 그러한 모습이 드러납니다. 그는 예수님에게서 특별한 죄를 발견하지 못했지만, 민중의 소요를 피하기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넘깁니다.
또한 본문에 등장하는 바라바(Barabbas)는 당시 유대 땅에서 자주 일어났던 유대인들의 정치적 반란과 폭동과 관련된 인물입니다. 로마에 저항했던 혁명가(또는 열심당원)의 성격을 지닌 인물로, 유대 민중은 이런 자들을 민족적 영웅처럼 여기기도 했습니다. 바라바가 정치범으로 언급되고 있다는 점은, 예수님을 바라바와 같은 범주로 취급하여 로마법으로 처벌하려는 대제사장들의 전략이었음을 보여줍니다.
2. 문화적 배경
본문은 유월절(6월절, Passover) 기간 중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 시기는 유대인들이 애굽에서 해방된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는 절기로, 많은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을 찾는 가장 큰 명절 중 하나였습니다. 로마 총독은 민심을 달래고자, 이 절기에 죄수 한 사람을 사면해주는 전례를 따랐고, 이 전통은 정치적 선물이나 선심성 조치로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이 전례가 이번에는 아주 역설적으로 작동합니다. 가장 극악한 범죄자인 바라바는 풀려나고, 죄가 없는 예수님은 군중의 요구에 따라 십자가형에 넘겨집니다. 이는 당시 대중 심리가 얼마나 조작되기 쉬운지를 드러냅니다. 대제사장들은 이 전례를 이용해 민중을 선동하고, 결국 의인을 버리고 죄인을 선택하게 만듭니다.
또한, 본문에서 예수님의 침묵은 당시 유대 문화와 예언자 전통 속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당시의 가치관으로는 무고를 주장하고 변호하는 것이 정당했지만, 예수님은 침묵하심으로써 스스로를 고난받는 종으로 드러내십니다. 침묵은 연약함이 아닌, 순종과 신뢰의 표현이며, 이는 이사야 53장에서 예언된 메시아의 모습과 일치합니다.
3. 신학적 배경
이 본문은 단순한 재판 장면이 아니라, 속죄와 구속의 신학적 전환점을 담고 있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기 위해 부당한 판결을 받고 십자가로 나아가시는 길목입니다. 의인이 죄인의 자리에 서시고, 죄인이 풀려나는 장면은 복음의 핵심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는 예수님의 죽음이 단순한 희생이 아니라 대속(代贖, atonement)이라는 구속적 의미를 지녔음을 말해줍니다.
빌라도의 질문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는 질문은 예수님의 정체성과 관련된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정치적 직함이 아니라, 메시아직(기름부음을 받은 자)을 묻는 질문이었으며, 예수님은 “네 말이 옳도다”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자신이 참된 왕이심을 인정하십니다. 그러나 그 왕권은 세상의 방식이 아닌, 십자가의 방식으로 드러납니다.
또한 이 본문은 인간의 죄성과 연약함, 특히 지도자와 군중의 타락을 통해 하나님의 의와 사랑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줍니다.종교 지도자들의 시기, 빌라도의 무책임, 군중의 선동과 폭력성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구속사, 곧 십자가가 하나님의 계획이었음을 분명히 증거하는 장면입니다. 이 모든 인간의 죄악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예수님의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게 합니다.
📖 본문요약
1-2절 │ 새벽, 공회에서 빌라도에게 넘겨진 예수님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 즉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서기관들은 밤새 심문을 마치고 새벽이 되자 예수님을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넘깁니다. 이른 아침 회의는 율법상 공적 판결을 정당화하기 위한 절차였으며, 그들은 종교적 문제로만은 예수님을 죽일 수 없었기에, 정치적 죄목을 꾸며 로마의 권력으로 예수님을 제거하려 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묻습니다. 이는 정치적 반역자에 해당하는 중대한 질문이며, 빌라도는 이 질문을 통해 예수님의 사형 여부를 결정하려 합니다. 예수님은 “네 말이 옳도다”라고 말씀하시며, 그분의 정체성과 왕권을 부인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이는 칼과 권력으로 다스리는 세상의 왕이 아닌, 십자가를 통해 섬기고 구원하시는 하늘의 왕으로서의 선언이었습니다.
➡ 예수님은 거짓과 조작의 법정 앞에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진리가 사람들의 판단에 좌우되지 않으며, 오히려 하나님의 때에 드러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억울함 앞에서 침묵할 수 있는 믿음,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인내를 예수님을 통해 배웁니다.
3-5절 │ 침묵하시는 예수님과 놀라는 빌라도
대제사장들은 여러 죄목을 덧붙이며 예수님을 고발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기 위해 거짓 증언도 불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모든 고소 앞에 침묵하십니다. 빌라도는 이 비상식적인 태도에 놀랍니다. 일반적으로 재판에서 피고는 자신을 변호하려 애쓰지만, 예수님은 자신을 변명하거나 방어하지 않으십니다. 이 침묵은 두려움이나 패배가 아니라, 십자가를 향한 순종이며, 하나님의 구속 계획에 대한 전적인 수용이었습니다. 이는 이사야 53장 7절의 예언 —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 의 성취이기도 합니다.
➡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침묵은 무력함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침묵은 거룩한 순종의 언어입니다. 우리는 모든 상황에서 자신을 방어하려 하지만,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시며 말없이 고난을 감당하십니다. 이 침묵은 구원의 문을 여는 열쇠였습니다.
6-11절 │ 바라바를 선택한 군중
명절에 총독이 죄수 하나를 석방해주는 관례는 유대인들의 정서를 달래기 위한 로마의 정치적 제도였습니다. 빌라도는 이 관례를 이용해 예수님을 놓아주려 하지만, 대제사장들은 무리를 충동하여 “바라바를 놓아 달라”고 요구하게 만듭니다. 바라바는 폭동과 살인으로 체포된 자로, 로마 입장에서는 명백한 정치범이며 흉악한 죄인입니다. 그러나 군중은 무죄한 예수님보다, 피 묻은 손의 죄인을 택합니다. 이는 인간의 타락한 본성과, 다수의 의견이 항상 정의를 대변하지 않는다는 교훈을 남깁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시기로 고발된 것을 알면서도, 그 압박에 굴복하고 마는 연약한 권력자의 모습을 보입니다.
➡ 우리는 쉽게 다수의 소리에 기대어 판단합니다. 그러나 다수가 선택한 길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보다 바라바를 택한 군중처럼, 오늘 우리도 종종 잘못된 우선순위 속에 진리를 외면합니다. 믿음은 진리의 편에 서는 결단이며, 때론 소수의 길입니다.
12-14절 │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무리
빌라도는 다시 한 번 대중에게 예수님을 어떻게 하기를 원하느냐고 묻습니다.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를 내가 어떻게 하랴?” 이 질문은 재판관의 책임을 군중에게 전가하는 회피이며, 동시에 예수님의 정체성을 빌라도도 인식하고 있었음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대중은 한 목소리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라고 외칩니다. 빌라도는 무슨 악한 일을 했느냐고 묻지만, 군중은 그 물음에 답하지 않고 오히려 더 크게 소리칩니다. 이 장면은 이성이 사라지고, 선동과 감정이 지배하는 군중심리의 위험성을 보여줍니다.
➡ 분노에 휘둘리는 군중은 진실을 듣지 않습니다. 진리를 따르기보다 감정과 두려움, 또는 권력에 따라 움직이는 이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서라도 자신의 욕망을 정당화합니다. 우리 안에도 그런 군중의 그림자가 존재하지 않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15절 │ 바라바는 풀려나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빌라도는 결국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십자가형에 넘깁니다. 이는 정의의 포기이며, 두려움에 의한 타협의 결정입니다. 가장 부당한 판결이 내려지는 이 순간, 인류의 구원은 역설적으로 시작됩니다. 죄 없는 분이 죄인의 자리를 대신하시고, 죄인은 무죄한 자의 자리를 차지합니다. 바라바의 석방은 단순한 정치적 사건이 아니라, 복음의 상징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바라바입니다. 나의 죄를 대신해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 복음은 이 사건을 통해 선포됩니다. 의인이 희생되고 죄인이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는 결코 당연히 구원받은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누군가의 희생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 누군가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고난은 우리의 생명의 이유이며, 그 사랑은 우리의 삶의 방향이 되어야 합니다.
📖 붙잡는 말씀
빌라도가 묻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매 (v.2)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로마 총독 빌라도와의 짧은 문답 속에, 그분의 정체성과 사명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는 질문은 단순한 신원 확인이 아닙니다. 이는 예수님께 ‘정치적 반역자’라는 죄목을 적용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고리였고, 결국 십자가형으로 이끄는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질문에 대하여 “네 말이 옳도다”, 곧 자신이 왕임을 부인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로마의 권력 앞에서, 무장도 백성의 지지도 없이, 결박된 채 서 계셨습니다. 그 모습은 너무도 연약하고 무력해 보였지만, 그분의 대답은 오히려 단호하고 확고했습니다. 그분은 침묵하시되, 진리에 대해서는 침묵하지 않으셨습니다. 스스로 왕이심을 고백하시되, 그 왕권은 세상 방식의 통치가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 이 땅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자로서의 선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짧은 대답은 우리 모두를 향한 메시지입니다. 세상은 지금도 끊임없이 묻습니다. “예수가 정말 왕이냐?” 그 질문 앞에 예수님은 여전히 “네 말이 옳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 왕의 자리는 금으로 장식된 왕좌가 아닌, 가시관을 쓰시고 못 박히신 십자가였습니다.
이 고백은 믿는 우리에게도 물음이 됩니다.
예수님은 지금 나의 삶에서도 여전히 왕이신가?
내 판단과 기준, 욕망이 왕좌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오늘 우리는 이 짧고도 깊은 대답을 붙잡습니다.
“네 말이 옳도다.”
예수님은 나의 왕이시며, 나를 다스리시고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내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분이 진정한 왕으로 자리하시기를 소망합니다.
눈앞의 불의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내 안에 살아계신 주님의 통치를 고백하며 살아가는 자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나의 왕이시기에, 나는 오늘도 담대히 걸어갈 수 있습니다.
📖 단어 연구
1. 유대인의 왕 (ὁ βασιλεὺς τῶν Ἰουδαίων, ho basileus tōn Ioudaiōn)
❖ 뜻과 의미
• ‘βασιλεὺς’는 헬라어로 “왕, 통치자”를 의미하며, ‘τῶν Ἰουδαίων’은 “유대인들의”라는 소유격 표현입니다.
• 직역하면 “유대인들의 왕”으로, 정치적·민족적 정체성과 권위를 지칭하는 표현입니다.
• 당시 이 표현은 로마 제국의 입장에서는 반란죄로 연결될 수 있는, 매우 민감한 정치 용어였습니다.
❖ 본문에서의 의미
• 이 칭호는 예수님을 로마 제국의 질서를 위협하는 정치적 선동가로 몰아가기 위한 명목으로 사용되었습니다.
• 그러나 예수님은 빌라도의 질문에 “네 말이 옳도다”라고 대답하시며, 거짓 없이 스스로 그 정체성을 인정하십니다.
• 이는 겉으로는 피고의 입장이지만, 실제로는 영적 왕권을 선포하시는 주님의 선언이기도 합니다.
❖ 신학적 의미
• ‘유대인의 왕’이라는 표현은 단지 민족의 지도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된 메시아, 즉 다윗의 왕위를 잇는 자로서의 예수님의 정체성을 상징합니다(삼하 7:12-13).
• 십자가 위에서도 조롱처럼 붙여진 이 칭호(막 15:26)는, 역설적으로 진정한 왕의 길이 고난과 섬김을 통해 이뤄짐을 보여줍니다(요 18:36).
• 예수님은 고난받는 왕, 십자가로 통치하시는 구원의 왕으로서, 성도들의 주권자로 자리하십니다.
2. 넘겨주다 (παραδίδωμι, paradidōmi)
❖ 뜻과 의미
• 헬라어 paradidōmi는 “넘겨주다, 배신하다, 내어주다”를 뜻하며, 법적·군사적 맥락에서 자주 사용됩니다.
• 또한 복음서에서는 유다의 배신(마 26:15)부터 공회에 의한 인도, 십자가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전반에 걸쳐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 본문에서의 의미
• 대제사장들은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주었고(1절), 빌라도는 군중의 뜻에 따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겨줍니다(15절).
• 단순한 인도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으며, 불의한 세력에 의한 하나님 아들의 내어줌이라는 비극을 상징합니다.
❖ 신학적 의미
• paradidōmi는 단지 인간의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사적 의도 속에서 성취된 뜻으로 해석됩니다.
• 로마서 8:32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라고 말하며, 하나님 아버지조차 예수님을 내어주셨음을 강조합니다.
• 결국 이 ‘넘겨줌’은 인간의 죄와 불의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이 성취되는 도구가 됩니다.
3. 침묵하다 (σιωπάω, siōpaō)
❖ 뜻과 의미
• siōpaō는 “조용하다, 말하지 않다, 침묵하다”는 뜻으로, 감정의 통제나 고통의 인내를 담은 동사입니다.
• 고대 헬라 문학에서는 침묵이 때로는 지혜, 때로는 수치의 표현으로 여겨졌습니다.
❖ 본문에서의 의미
• 예수님은 자신을 둘러싼 수많은 고발 앞에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다(4-5절).
• 이는 무력함이 아닌, 의도적인 침묵이며,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 빌라도는 이 침묵에 놀랍니다. 피고가 침묵한다는 것은 당시 법정에서 거의 유죄를 인정하는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입니다.
❖ 신학적 의미
• 이 침묵은 이사야 53장 7절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의 예언 성취로, 메시아의 순종과 인내를 상징합니다.
• 동시에 예수님의 침묵은 인류의 죄에 대한 답변이자, 십자가로 대답하겠다는 하나님의 침묵이기도 합니다.
• 오늘의 성도에게 이 침묵은, 억울함 앞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태도를 가르쳐 줍니다.
4. 채찍질하다 (φραγελλόω, phragellóō)
❖ 뜻과 의미
• phragellóō는 “로마식 채찍질을 가하다”는 의미로, flagellum이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했습니다.
• 로마의 채찍은 가죽끈 끝에 납이나 동물 뼈를 달아, 살을 찢고 피를 쏟게 하는 극형 직전의 고문 방식이었습니다.
❖ 본문에서의 의미
• 빌라도는 군중을 만족시키기 위해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넘깁니다(15절).
• 이는 당시 사형 직전 통상적으로 행해지던 고문이며, 예수님은 법적 정당성 없이 극심한 고통을 받으십니다.
❖ 신학적 의미
• 이 채찍은 단순한 육체적 고통이 아닌, 인간 죄의 결과로서 예수님께서 대신 감당하신 형벌입니다.
• 이사야 53:5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라는 예언의 성취이며,
• 예수님의 고난은 육체를 넘어선 영적 치유의 근거가 됩니다(벧전 2:24).
• 그분의 상처는 우리의 회복입니다.
5. 십자가에 못 박다 (σταυρόω, stauroō)
❖ 뜻과 의미
• stauroō는 “십자가에 못 박다”는 뜻의 동사로, 로마 시대 최악의 형벌 중 하나인 십자가형을 묘사합니다.
• 이는 고통과 수치, 그리고 공개적 처형을 통해 반역자들을 경고하는 잔혹한 사형 방식이었습니다.
❖ 본문에서의 의미
• 무리는 두 번이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칩니다(13-14절).
• 이는 예수님이 받은 최종적이고도 결정적인 형벌의 방식이며, 그분의 죽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를 보여줍니다.
• 빌라도는 군중의 외침에 밀려,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줍니다.
❖ 신학적 의미
• 십자가는 단지 고문 도구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이 실제로 실행된 장소입니다.
• 골로새서 2:14는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다”고 말합니다.
• stauroō는 예수님의 죽음을 의미하는 동시에, 우리의 옛 자아와 죄 또한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함을 요구합니다(갈 2:20, 롬 6:6).
• 그러므로 십자가는 심판이 아니라 구원의 선언입니다.
📖 절별주해
1절 │ 새벽에 예수를 결박하여 빌라도에게 넘기다
❖ 해설
• 새벽, 공회가 모여 급히 회의를 마친 후 예수님을 결박한 채 빌라도에게 넘깁니다. 유대인들은 로마의 통치하에 있었기 때문에 사형을 집행할 권한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종교범이 아닌, 정치적 반역자—즉 ‘유대인의 왕’을 자칭한 자로—고소하여 로마의 법에 따라 십자가형을 받게 하려 했습니다.
• ‘결박하였다’는 표현은 예수님의 수난의 시작을 상징하는 동사로, 이제부터 예수님은 완전히 사람들의 손에 넘겨진 상태가 됩니다.
❖ 적용
• 우리는 종종 거짓된 판단과 오해 속에서 사람을 결박할 수 있습니다. 진리를 향해 마음을 열지 못하면, 오히려 스스로를 결박하게 됩니다. 내가 혹시 진리의 음성을 무시하고 있는 부분은 없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2절 │ 유대인의 왕이냐는 질문과 예수님의 대답
❖ 해설
• 빌라도는 예수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묻습니다. 이는 정치적 죄를 물을 수 있는 핵심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네 말이 옳도다”라고 대답하십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동의하거나 인정한 것이 아니라, ‘너는 그렇게 말하고 있다’는 의미로, 예수님의 왕권이 세속적인 개념과 다르다는 점을 내포합니다.
❖ 적용
• 예수님은 세상의 방식이 아닌, 십자가를 통해 왕 되심을 드러내십니다. 우리가 따르는 왕은 어떤 분입니까? 세상의 권세를 추구하는가, 아니면 주님의 섬김과 희생의 길을 따르고 있는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3-5절 │ 고발당하시고도 침묵하시는 예수님
❖ 해설
• 대제사장들은 여러 가지로 예수님을 고발하지만, 예수님은 이에 대해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다. 이 침묵은 무기력의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복하는 신적인 침묵입니다. 빌라도는 그런 예수님의 태도에 놀랍니다. 당시에 피고인의 침묵은 스스로 죄를 인정하는 행위로 여겨졌지만, 예수님은 말없이 진리를 품고 계셨습니다.
❖ 적용
• 억울함 앞에서 말하고 싶고 해명하고 싶을 때, 주님의 침묵을 떠올려야 합니다. 말보다 더 강한 순종과 신뢰의 언어가 침묵일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진리 앞에서는 변명이 필요 없습니다.
6-8절 │ 명절 전례와 바라바의 등장
❖ 해설
• 유월절 명절에는 총독이 죄수 하나를 석방하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이 전례는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정치적 장치였으며, 여기서 ‘바라바’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는 반란과 살인 혐의로 체포된 인물로, 당대에는 민족주의자 또는 저항 세력으로 보일 수 있는 자였습니다. 군중은 이 전례를 통해 바라바의 석방을 요구합니다.
❖ 적용
• 세상은 종종 의인보다 범죄자를 선택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선택하고 있는가? 대중의 소리인가, 진리의 음성인가? 믿음은 때로 고독한 선택을 요구합니다.
9-11절 │ 시기와 선동 속의 선택
❖ 해설
• 빌라도는 예수님이 시기 때문에 고발된 것을 알고 있었고, 그분을 놓아주려 했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은 군중을 선동하여 바라바의 석방을 요구하게 만듭니다. 종교 지도자들의 시기와 조작, 그리고 군중의 무지는 결국 진리를 외면하게 만듭니다.
• ‘선동’이라는 단어는 복음서 속에서 대중이 어떻게 조작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입니다.
❖ 적용
• 우리는 얼마나 자주 다른 사람의 판단이나 분위기에 휘둘립니까? 신앙인은 언제나 영적 분별력으로 진리를 따라야 합니다. 세상의 목소리보다 하나님의 뜻에 민감한 사람이 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12-14절 │ 십자가에 못 박으라 외치는 무리
❖ 해설
• 빌라도는 예수님을 어떻게 처리할지를 다시 묻지만, 군중은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칩니다. 빌라도는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고 되묻지만, 군중은 대답 대신 외침의 수위를 높입니다. 이 장면은 감정과 선동이 이성을 삼켜버린 군중 심리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 적용
• 오늘날 우리는 얼마나 자주 정보보다 감정에, 진실보다 분위기에 반응합니까? 신앙은 단순한 열정이 아닌, 진리 위에 선 분별력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감정이 아니라 믿음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15절 │ 채찍질당하시고 십자가에 넘겨지신 예수님
❖ 해설
• 빌라도는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님을 채찍질한 후 십자가에 넘깁니다. 이는 정의를 포기한 정치적 타협이며, 인류의 죄된 본성이 낳은 결과입니다. 그러나 이 부당한 판결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길이 열립니다.
• ‘채찍질하다’는 로마 형벌 중 극심한 고문이었고, 십자가형 이전에 당하는 고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고통을 기꺼이 감당하셨습니다.
❖ 적용
• 우리는 바라바와 같이 죄인이었지만, 예수님이 대신 고난을 감당하셨습니다. 이 사랑 앞에서 침묵할 수 없습니다. 오늘도 그 은혜를 기억하며, 나의 삶을 다시금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 묵상
그분은 말없이 서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 침묵은 진리의 외침이었습니다.
마가복음 15장의 새벽, 예수님은 결박당하신 채 빌라도 앞에 서 계셨습니다. 대제사장들의 시기와 왜곡된 고발이 이어졌지만, 예수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빌라도는 놀랐고, 군중은 점점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라.”
이 장면은 단순한 재판이 아닙니다. 진리가 거짓에 둘러싸이고, 사랑이 증오에 내몰리고, 의로움이 폭력에 눌리는 현장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혼란의 중심에서 예수님은 말없이 계셨습니다.
그분의 침묵은 포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순종의 고백이었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빌라도의 질문은 무거운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이 질문은 예수님의 정체성, 그분의 왕권, 그리고 이 재판의 본질을 묻는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대답하십니다.
“네 말이 옳도다.”
그 짧은 대답 속에, 그분은 세상의 왕이 아닌, 하늘나라의 왕으로 오셨음을 선포하십니다.
그 왕은 검을 들지 않았고, 병거를 타지 않았습니다. 그 왕은 채찍에 맞으셨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바라바라는 이름이 등장합니다. 반란자, 살인자, 유대의 열혈 민족주의자. 그는 분명한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군중은 그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기꺼이 죄인을 놓아달라고 외치며, 의인을 죽이라고 외쳤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그 질문의 답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바라바는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자리를 대신하셨습니다. 죄인인 우리가 풀려나고, 죄 없으신 주님이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빌라도는 진리를 알았지만, 다수를 택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얼마나 자주 ‘하나님이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람들의 시선을 선택하고, 타협하며, 눈치를 보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본문은 고난주간의 중심에서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의 왕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은 여전히 “나는 왕이다”라고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여전히 그분을 왕으로 모시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도 우리는 영적인 법정 앞에 서 있습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할 것인지,
그분을 따를 것인지,
내려놓을 것인지,
그 선택은 여전히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주님은 채찍을 맞으셨고, 침묵하셨고, 결국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는 심판이 아닌 사랑이었고, 패배가 아닌 승리였습니다.
우리는 그 사랑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외쳐야 합니다.
“예수님, 주님은 진정 나의 왕이십니다.”
오늘 하루, 그분의 침묵 속 사랑을 기억하며
침묵을 선택한 예수님의 용기처럼,
진리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서기를 소망합니다.
📖 말씀 _ "왕의 침묵"
서론 │ 침묵의 무게를 견디신 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억울한 상황 앞에서 말없이 참아본 경험이 있으신가요? 억울함은 인간의 마음을 가장 크게 흔드는 감정 중 하나입니다. 누군가 나를 오해하고, 잘못된 정보로 공격하고, 내가 하지도 않은 일로 손가락질을 할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해명하고 싶고, 설명하고 싶고, 아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럴 때 침묵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할 마가복음 15장 1절에서 15절까지의 본문은, 예수님께서 그 억울함의 극치를 겪으시며 침묵하시는 장면입니다. 새벽 공회에서 끌려나와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은 수많은 고발 앞에서 입을 열지 않으십니다. “유대인의 왕이냐”는 질문에는 짧게 대답하셨지만, 그 외에는 말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말할 수 있었지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진실을 증명할 수 있었지만, 침묵하셨습니다.
그 침묵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왜 예수님은 자신의 무죄를 밝히지 않으셨을까요?
그리고 우리는 이 장면에서 어떤 주님의 마음을 보아야 할까요?
오늘 설교를 통해 우리는 침묵 속에서 선포된 주님의 왕 되심, 그리고 십자가로 향하신 그분의 왕권을 함께 묵상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 길 위에 서 있는 우리의 자리 또한 돌아보려 합니다.
본론 │ 그분은 말없이, 그러나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1. 새벽의 재판, 억울한 고발과 형식적인 절차
1절에서 시작되는 장면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밤새 형식적인 회의를 마친 뒤,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기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공회는 종교적 권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사형을 집행할 권한은 없었기에, 예수님을 정치범으로 조작하여 로마의 법에 따라 처형되게 하려는 의도였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적 선언을 ‘유대인의 왕’이라는 정치적 반역으로 왜곡시켜 고발합니다.
이런 방식은 매우 교묘하고 계산된 선동이었습니다.
정의롭다고 자부하던 자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거짓 증언을 만들어내고, 권력의 손을 빌려 거룩하신 주님을 정죄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장면은 오늘날에도 반복됩니다.
종교라는 이름 아래, 권력이라는 이름 아래, 때로는 침묵하는 진리가 희생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모든 조작 앞에, 말없이 계십니다.
2.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 예수님의 정체성 선언
빌라도는 질문합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이는 단순한 신분 확인이 아닙니다. 반역의 죄가 성립되는 핵심 질문이었고, 예수님을 십자가로 보내기 위한 절차상 결정적인 물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짧게 대답하십니다.
“네 말이 옳도다.”
이 대답은 “내가 맞다”는 명확한 선언이라기보다는, 당신이 말하는 방식으로는 맞지만, 내 왕권은 당신이 아는 왕권과 다르다는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진정한 왕이심을 부인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칼을 들고 왕이 되지 않으셨고, 병거를 몰고 통치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왕권은 섬김으로, 채찍으로, 십자가로 세워졌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날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어떤 왕이십니까?
내 삶에 군림하기만을 원하는 왕입니까?
아니면 나를 위해 죽기까지 사랑하시는, 십자가의 왕이십니까?
3. 침묵 속에서 드러난 순종과 사랑
3절부터 5절까지, 대제사장들이 여러 가지로 고발하지만 예수님은 다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다.
빌라도는 놀랍니다. 재판장에서 침묵은 불리함을 인정하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침묵은 자신의 무죄를 밝히지 못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십자가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시려는 순종의 표현이었습니다.
이사야 53장 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 같고,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아서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의 침묵은,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신 고난받는 종의 침묵이었습니다.
그분은 말없이 고통을 감내하셨고, 말없이 죄를 짊어지셨습니다.
4. 바라바가 놓이고 예수님이 넘겨지다 – 대속의 교환
6절부터는 명절의 사면 관례에 따라 한 죄수를 놓아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뜻밖에도, 군중은 바라바를 선택합니다.
반역자요 살인자였던 바라바, 그는 진짜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의 선동과 군중의 감정은 그를 택하게 했고, 예수님은 대신 십자가에 넘겨집니다.
이 장면은 단지 정치적 조작의 결과가 아닙니다.
이는 복음의 핵심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죄인이 자유를 얻고, 의인이 죽임을 당합니다.
무죄한 분이 죄인의 자리를 대신합니다.
바라바는 누구입니까?
바로 나, 우리, 모든 인류입니다.
우리가 풀려나고, 예수님이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살아나고, 예수님이 채찍을 맞으셨습니다.
5. 빌라도의 타협, 군중의 외침, 그리고 하나님의 침묵
마지막 15절에서 빌라도는 군중에게 만족을 주고자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님을 채찍질하여 십자가에 넘깁니다.
빌라도는 진실을 알면서도 그것을 따르지 못하는 권력자의 상징입니다.
군중은 한때 “호산나”를 외쳤지만, 이제는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칩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침묵하십니다.
그 침묵 속에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작정과 인류를 향한 뜨거운 사랑을 봅니다.
결론 │ 그분의 침묵은 나를 위한 말씀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의 침묵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당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으셨습니다.
억울함을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을 변호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리를 우리가 서야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라바처럼 죄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자리를 대신하셨습니다.
그분은 침묵하심으로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고,
그 침묵은 이제 우리를 향한 구원의 외침이 되었습니다.
오늘 하루, 그분이 왕이심을 다시 고백하십시오.
진리를 따라 침묵할 수 있는 용기를 구하십시오.
그리고 십자가의 사랑 앞에,
“주님, 그 자리는 원래 제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대신 서셨습니다”
라고 고백하십시오.
그분의 침묵이 곧 우리를 살리는 소망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그 사랑 앞에 순종으로 응답하는 삶을 살아가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올려드리는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나아와 엎드립니다.
이 고난주간, 마가복음 15장의 말씀을 통해
주님의 침묵을 바라보며 마음이 깊이 흔들립니다.
억울함 앞에서도 침묵하셨던 주님,
수많은 고발과 조롱, 고통 속에서도 말씀하지 않으셨던 주님,
그 침묵이 얼마나 무겁고, 얼마나 뜨거운 사랑의 표현이었는지를
오늘 새삼 깨닫게 됩니다.
주님,
우리는 억울할 때 소리치고,
누군가 나를 오해하면 해명하기 바쁘며,
내 생각이 옳다고 여기면 침묵하기보다 주장하기 바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아무 죄도 없으시면서도,
사람들의 거짓과 시기 앞에서도,
한 마디 반박 없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 침묵은 패배의 표시가 아니라,
온전한 순종이자, 구원의 시작이었습니다.
주님,
빌라도의 물음처럼 우리도 묻습니다.
“정말 예수님이 우리의 왕이십니까?”
그리고 주님의 대답은 오늘도 들려옵니다.
“네 말이 옳도다.”
세상이 원하는 방식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십자가의 방식으로,
우리를 다스리시는 참된 왕이심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주님,
우리의 마음은 자주 바라바를 선택합니다.
진리보다는 익숙함을,
의로움보다는 편안함을,
주님의 음성보다는 군중의 소리를 따르려 합니다.
죄인인 바라바가 자유를 얻고,
의로우신 주님이 채찍을 맞으신 이 장면은
단지 2천 년 전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의 저희 삶을 고스란히 비추는 거울입니다.
주님, 저는 바로 그 바라바입니다.
원래 제가 서야 할 자리에, 주님이 서셨습니다.
제가 맞아야 할 채찍을,
제가 달려야 할 십자가를,
주님께서 대신 지셨습니다.
그 사랑을 알면서도,
저는 종종 주님의 왕 되심을 부인하며 살아갑니다.
제 욕심이, 제 감정이, 제 계획이
주님의 자리를 밀어낼 때가 많았습니다.
주님을 왕으로 고백하면서도
실제로는 내 마음의 왕좌에
내 자신이 앉아 있었음을 회개합니다.
주님, 이제는 진정한 고백으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주님은 저의 왕이십니다.
침묵으로 순종하신 그 왕이,
저의 삶을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셔도,
그 침묵 속에 담긴 사랑을 믿습니다.
주님,
빌라도처럼 진리를 알면서도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타협하지 않게 하소서.
군중처럼 분위기에 휘둘려
참된 진리를 외면하지 않게 하소서.
진실을 말할 때는 용기 있게 말하게 하시고,
말해야 할 때가 아니라면
주님의 침묵을 본받아,
기도로 이기게 하소서.
이 고난주간을 지나며,
주님이 걸어가신 그 십자가의 길을 따라 걷고자 합니다.
그 길이 때로 좁고 힘들지라도
그 길 끝에 생명이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십자가 앞에 무릎 꿇어
주님의 침묵을 붙듭니다.
왕이신 주님,
제 마음의 주인이 되어 주옵소서.
더 이상 세상의 왕좌를 바라보지 않고,
주님의 손에 이끌려 순종의 걸음을 걷게 하소서.
주님의 침묵 앞에서 저의 말이 멈추고,
주님의 사랑 앞에서 저의 자아가 꺾이고,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저의 욕심이 무너지게 하소서.
오늘도 바라바가 된 저를 자유케 하시고,
침묵하신 주님의 은혜로 살아가게 하시는
그 사랑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내어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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