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자료는 개인적인 말씀 묵상과 연구를 바탕으로 [목회자의 설교 준비], [성경을 더욱 깊이 알고자 하는 분], 그리고 [말씀묵상에 도움이 필요한 성도]를 돕기 위해 제작되었습니다. 본 자료의 모든 저작권은 작성자인 〈LogosLab Steward〉에게 있으며, 자유롭게 사용 및 참고하시되 출처를 밝혀주시고, [무단 복제 및 배포]를 금합니다. 이 자료가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풍성하게 경험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 본문
개역개정
25 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
26 그 위에 있는 죄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
27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28 (없음)
2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30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3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32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33 제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더니
34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35 곁에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보라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36 한 사람이 달려가서 해면에 신 포도주를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고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 주나 보자 하더라
37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38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NASB)
25 It was the athird hour when they crucified Him.
26 The inscription of the charge against Him read, “THE KING OF THE JEWS.”
27 They crucified two robbers with Him, one on His right and one on His left.
28 [And the Scripture was fulfilled which says, “And He was numbered with transgressors.”]
29 Those passing by were hurling abuse at Him, wagging their heads, and saying, “Ha! You who are going to destroy the temple and rebuild it in three days,
30 save Yourself, and come down from the cross!”
31 In the same way the chief priests also, along with the scribes, were mocking Him among themselves and saying, “He saved others; He cannot save Himself.
32 “Let this Christ, the King of Israel, now come down from the cross, so that we may see and believe!” Those who were crucified with Him were also insulting Him.
33 When the bsixth hour came, darkness fell over the whole land until the bninth hour.
34 At the ninth hour Jesus cried out with a loud voice, “Eloi, Eloi, lama sabachthani?” which is translated, “My God, My God, why have You forsaken Me?”
35 When some of the bystanders heard it, they began saying, “Behold, He is calling for Elijah.”
36 Someone ran and filled a sponge with sour wine, put it on a reed, and gave Him a drink, saying, “Let us see whether Elijah will come to take Him down.”
37 And Jesus uttered a loud cry, and breathed His last.
38 And the veil of the temple was torn in two from top to bottom.
📖 들어가는 기도
사랑과 은혜의 주님,
오늘도 거룩한 말씀 앞에 엎드려 주님의 고난을 묵상합니다.
피 묻은 나무 위에서 침묵하셨던 주님,
손과 발에 못이 박히시고, 머리에 가시관을 쓰시며,
사람들의 조롱과 외면 속에서도 오직 사랑으로 그 자리에 계셨던 주님을 바라봅니다.
주님,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땅끝의 수치 위로 걸어가신 주님의 순종이
저의 무뎌진 신앙과 죄의식 없는 삶을 부끄럽게 합니다.
“유대인의 왕”이라는 조롱 섞인 죄패 아래,
참된 왕이신 주님이 조용히 죽음을 받아들이신 그 십자가를,
제가 너무 가볍게 여겼던 것은 아니었습니까.
하나님, 이 땅 위에서 가장 어두운 오후,
세상은 침묵했고, 하늘은 빛을 감추었으며,
당신의 독생자가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크게 외치시던 그 외로움의 절규 속에
저를 위한 구속의 사랑이 있었음을 믿습니다.
주님, 오늘도 저는 주님의 십자가 옆을 지나치듯 지나가며,
때론 조롱하는 군중처럼 외면하고,
때론 침묵하는 제자들처럼 숨어 있었던 저 자신을 마주합니다.
그러나 이 시간, 다시 그 십자가 앞에 서고자 합니다.
주님의 못 자국 난 손을 바라보며,
찢긴 휘장을 통하여 열린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고자 합니다.
주님, 말씀이 제 안에 생명이 되게 하시고,
묵상이 제 안에 통곡이 되게 하시며,
회개가 제 안에 순종으로 맺어지게 하소서.
주님의 피 흘리심이 저의 영혼을 덮게 하시고,
십자가의 사랑이 오늘 제 마음을 흔들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본문배경
1. 역사적 배경
마가복음 15장 25-38절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장면의 중심부로, 로마 제국의 공식적인 형벌 제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본문은 제삼시(오전 9시경)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고 말합니다. 십자가형은 로마가 반역자나 흉악범들에게 사용하던 극형으로, 공공장소에서 공개적으로 집행되어 로마 제국의 권위와 경고의 수단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십자가형은 단순한 종교 재판의 결과가 아니라,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정치적 조작과 로마 총독 빌라도의 정치적 타협이 만들어낸 결과였습니다.
죄패에 기록된 ‘유대인의 왕’이라는 표현은 단지 조롱이 아닌, 반역자에게 적용할 수 있는 사형의 명분으로서 로마의 법적 언어였습니다.
함께 못 박힌 강도들은 ‘λῃσταί’라는 단어로 표현되는데, 이는 단순한 절도가 아니라 반란과 폭동에 연루된 정치범이나 폭력범을 가리킵니다. 즉,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가장 위험한 죄인들과 동일시되는 자리에 놓이신 것입니다.
제육시부터 제구시까지(정오부터 오후 3시), 땅에 어둠이 임한 현상은 자연 현상 이상의 신적 개입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마지막 외침 이후,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찢어진 사건은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실제 일어났던 신성한 징조로 기록되어 있으며, 구약의 제사 시스템이 종결되었음을 알리는 상징적 장면입니다.
2. 문화적 배경
십자가형은 당시 유대 문화에서 가장 저주받은 죽음으로 여겨졌습니다. 신명기 21장 23절은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이는 유대인들에게 십자가형이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의 죽음이라는 인식을 각인시켰습니다.
로마에서 십자가형은 통상 죄목을 적은 패(티툴루스)를 죄수 머리 위에 붙였습니다. 예수님께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문구가 붙었는데, 이는 유대 지도자들에겐 조롱이자 모욕이었고, 로마 입장에서는 반란죄를 정당화하는 문구였습니다.
이 죄패는 정치적 선동자라는 틀에 예수님을 고정시키려는 시도이자, 하늘의 왕이 땅의 비웃음을 받는 아이러니한 장면을 연출합니다.
예수님의 외침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는 시편 22편의 인용으로, 당시 청중은 이 말이 ‘엘리야’를 부르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이는 유대 문화에서 엘리야가 종말의 선지자로 등장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며, 예수님의 고통과 의도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영적 무지와 조롱의 문화를 드러냅니다.
또한,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갈대에 꿰어 올린 행위는 전통적으로 로마 병사들이 갈증 나는 죄수에게 제공하던 저급한 음료였고, 이는 희생자에 대한 최소한의 인도주의적 처우이자, 조롱 섞인 시혜적 태도였습니다.
3. 신학적 배경
이 본문은 신학적으로 기독론(그리스도론), 속죄론, 그리고 종말론적 완성이라는 세 가지 중심축을 따라 읽혀야 합니다.
첫째,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고난받는 종의 예언(이사야 53장)의 직접적인 성취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라는 말씀처럼, 예수님은 철저히 죄인을 대신한 자로서 침묵하시고, 조롱당하시고, 죽음에 이르시기까지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특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외침은 하나님과의 단절을 경험하신 예수님의 대속적 외침으로, 삼위 하나님 내에서 단 한 번 있었던 단절의 순간이며, 인간의 죄값을 짊어진 구속의 절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둘째, 성소 휘장의 찢어짐은 구약의 제사 체계와 구분된 공간(지성소) 접근이 종결되고, 이제는 누구나 예수님의 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길이 열렸음을 상징합니다(히브리서 10:19-20 참조).
이는 예수님의 죽음이 단순한 순교가 아니라, 인류의 죄를 위한 대속 제사였다는 신학적 메시지를 선명히 보여줍니다.
셋째, 이 본문은 하나님의 심판과 은혜가 동시에 드러난 장면입니다. 세상의 어둠은 하나님의 진노를 상징하지만, 그 어둠 한가운데에서 하나님은 구원의 길을 여셨습니다. 이는 십자가가 심판이 아닌 사랑의 완성이며, 부활로 이어지는 승리의 길이라는 복음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 본문요약
25-26절 │ 제삼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시각은 제삼시(오전 9시경)였습니다. 이는 유대의 하루 시간 계산법에 따른 기록으로, 새벽 공회 재판과 빌라도의 재판이 끝난 후 바로 처형이 진행되었음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유대인의 왕”이라 적힌 죄패가 붙었습니다. 이 표현은 로마법상 반역죄의 상징이었지만, 동시에 역설적으로 예수님의 참된 정체성을 드러내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 이 짧은 한 문장은 인류의 역사를 갈라놓는 고백이 됩니다. 조롱조차도 진리를 담고 있었고, 사람들은 모른 채 십자가에 진리를 못 박았습니다.
27-28절 │ 죄인들과 함께 못 박히신 예수
예수님은 두 강도와 함께 못 박히십니다. 마가복음은 이들이 ‘λῃστάς’ 곧 반란자, 폭력범이었다고 기록합니다. 이는 이사야 53장의 “그는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다”는 예언의 성취로, 하나님의 아들이 가장 낮은 자리, 가장 수치스러운 자리에서 죄인들과 함께하셨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 예수님은 거룩한 성소가 아니라, 가장 더럽고 피비린내 나는 자리에 함께하셨습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죄인의 자리까지 내려오신 하나님.
29-32절 │ 조롱당하시는 왕
지나가는 자들은 머리를 흔들며 예수님을 모욕합니다.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짓겠다 하더니, 네가 너를 구원하여 내려오라”는 말은,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하고 왜곡한 조롱이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도 비웃습니다. “남은 구원하더니 자기는 구원할 수 없다.”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와야만 믿겠다고 말하지만, 역설적으로 예수님이 내려오지 않으셨기에 우리는 믿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 고난의 왕은 능력이 없어서 십자가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 능력을 내려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조롱받는 왕이 아니라, 자기를 내어주신 왕이셨습니다.
33-34절 │ 어둠과 절규
제육시(정오)부터 제구시(오후 3시)까지, 온 땅에 어둠이 임합니다. 이는 자연현상을 넘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상징하는 묵직한 징조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구시에 큰 소리로 외치십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 외침은 단지 고통의 절규가 아니라, 인류의 죄를 온몸으로 감당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찢기는 통곡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단절, 그 경험은 예수님께서 대속의 자리에서 홀로 겪으신 버림이었습니다.
➡ 우리를 하나님과 다시 잇기 위해, 주님은 하나님과 끊기셨습니다. 그 외로움 속에, 우리를 향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35-36절 │ 엘리야를 오해하는 무지
예수님의 외침을 들은 자들은 그가 엘리야를 부른다고 생각하며, 갈대에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올립니다. 이는 최소한의 인도주의적 행동이었지만, 동시에 주님의 고통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의 무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의 의도와 말씀은 외면된 채, 사람들은 여전히 기적을 구경거리로만 이해하려 합니다.
➡ 사람들은 예수님의 외침을 들어도, 제대로 듣지 못합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의 음성을 오해한 채, 종교적 구경꾼으로 머무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37-38절 │ 마지막 숨, 그리고 찢어진 휘장
예수님은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을 거두십니다. 이는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완전한 헌신과 순종의 마지막 외침이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집니다. 이는 인간의 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이 찢으신 것입니다.
지성소와 성소를 구분하던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던 죄의 장벽이 무너졌다는 상징적 사건입니다.
➡ 주님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습니다. 휘장이 찢어지던 그 순간, 은혜의 길이 열렸고, 아무도 들어갈 수 없던 자리에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 붙잡는 말씀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v.34)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 가장 깊고도 고요한 절규.
이 한 마디 외침은 단순한 감정이 아닙니다.
그 외침은 인류의 죄가 한 사람의 몸 위에 쏟아질 때,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로서 오롯이 감당해야 했던 신적 고독의 절규였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는 이 호칭은
신뢰와 단절 사이를 오가는 복잡한 감정이 묻어난 고백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버림받은 자로 계셨습니다.
이 외침은 시편 22편의 첫 구절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셨습니다.
인간의 죄를 대신한 자리,
십자가의 무게와 죄의 짐이 어깨 위에 눌러올 때,
그분은 아버지 하나님과 단절된 고통을 느끼셔야만 했습니다.
우리를 하나님께로 다시 이으시기 위해,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지셨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은 육체의 고통을 넘어서,
삼위 하나님의 사랑의 교제가 한순간 무너진 우주적 단절의 시간이었습니다.
이 붙잡는 말씀은 단순히 예수님의 아픔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외침 속에 담긴 진짜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너를 대신해 내가 버림받았다.”
예수님이 버림받으셨기에,
우리는 결코 하나님께 버림받지 않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고백 앞에 묻습니다.
나는 그분의 이 외침을 기억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예수님의 절규가, 나를 위한 외침이었다는 사실을 마음에 품고 있는가?
오늘도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
내 기도가 하늘에 닿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
그 누구보다 먼저 이 고백을 하신 예수님을 떠올리십시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그 외침은 결코 응답 없는 외침이 아니었습니다.
그 외침 이후, 구원의 길이 열렸습니다.
그 외침 이후,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그 외침 이후,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 단어 연구
1. 십자가에 못 박다 (σταυρόω, stauroō)
❖ 뜻과 의미
헬라어 stauroō는 ‘십자가에 못 박다’, ‘형벌로서 십자가에 처형하다’는 의미입니다. 고대 로마에서는 stauros라는 나무 기둥에 죄수를 매달아 죽이는 형벌이 존재했고, 이는 가장 잔인하고 치욕스러운 사형 방식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로마 제국의 공권력이 죄인을 처형할 때 사용하던 공식 용어였습니다.
❖ 본문에서의 의미
본문 25절에서 예수님은 제삼시에 σταυρόω, 즉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이는 물리적인 처형을 뜻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손에 의해 수치스럽게 죽음을 당하는 결정적 장면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단지 고난당하신 것이 아니라, 가장 비참한 형태의 죽음을 택하신 것입니다.
❖ 신학적 의미
십자가형은 구약의 저주(신 21:23)를 상기시키며,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 죄를 대신한 형벌의 성격을 띤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3:13에서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를 받은 자라”고 인용하며, 예수님의 죽음이 죄의 대속임을 분명히 밝힙니다.
σταυρόω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사가 십자가 위에서 성취되었다는 복음의 핵심 단어입니다.
2. 죄패 (ἐπιγραφή, epigraphē)
❖ 뜻과 의미
헬라어 epigraphē는 ‘글자가 새겨진 것, 명패, 표지’를 의미합니다. 이는 죄수의 머리 위에 붙이는 죄목을 적은 표식으로, 당시 로마의 관행에서 공개 처형 시 범죄 내용을 명확히 알리는 일종의 형법적 절차였습니다.
❖ 본문에서의 의미
본문 26절에서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문구가 ἐπιγραφή로 기록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적용한 죄목이었으며,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제기한 혐의를 로마식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죄패는 조롱의 도구이자 동시에 복음의 선언이 되었습니다.
❖ 신학적 의미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패는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님의 참된 정체성을 선포하는 진리의 표식이 됩니다. 사람들은 조롱의 뜻으로 썼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위에 “이는 너희의 왕이시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ἐπιγραφή는 인간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예수님의 메시아직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상징이 됩니다.
3. 어둠 (σκότος, skotos)
❖ 뜻과 의미
헬라어 skotos는 ‘어둠’, ‘암흑’, ‘빛의 부재’를 뜻하며, 성경에서는 종종 하나님의 심판, 진노, 임박한 재앙과 연결되어 사용됩니다.
이는 물리적 현상뿐 아니라, 영적 절망과 하나님의 임재의 철수를 의미하는 상징적 개념으로도 사용됩니다.
❖ 본문에서의 의미
본문 33절은 제육시부터 제구시까지, 즉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 “온 땅에 어둠이 임했다”고 기록합니다. 이 시간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이 절정에 달한 시각으로, 이 어둠은 단순한 일식이나 기후적 현상이 아닌, 하나님께서 온 인류의 죄를 아들 위에 담당시키시며 세상을 심판하시는 상징입니다.
❖ 신학적 의미
σκότος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그리고 인간 죄악의 무게가 집중된 순간을 표현합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인류의 죄를 지고, 하나님과의 단절을 경험하시며 죽어가신 그 시간, 하늘은 침묵하고 땅은 빛을 잃었습니다. 이 어둠은 바로 우리의 죄가 만들어낸 영적 현실이었으며, 예수님이 그 어둠 속에 홀로 남겨지심으로, 우리는 빛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얻게 된 것입니다.
4. 버리다 (ἐγκαταλείπω, egkataleipō)
❖ 뜻과 의미
egkataleipō는 “버리다, 떠나다, 포기하다”를 뜻하는 헬라어로, 누군가를 전적으로 내팽개치는 강한 단절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떠나실 때 혹은 사람이 하나님을 외면할 때 사용됩니다.
❖ 본문에서의 의미
예수님은 34절에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ἐγκατέλιπές με)”라고 외치십니다. 이 표현은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과의 교제가 완전히 끊어진 상태, 곧 영적인 단절의 절정을 묘사합니다. 이는 삼위 하나님의 깊은 연합이, 인류 구속을 위해 한 순간 깨진 신비로운 장면입니다.
❖ 신학적 의미
이 단어는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그분은 죄인이 아버지 앞에서 경험해야 할 모든 외로움과 버림을 대신 감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이 외침은 복음의 가장 깊은 심장부입니다.
우리가 결코 버림받지 않기 위해, 그분은 철저히 버려지셨습니다.
5. 휘장 (καταπέτασμα, katapetasma)
❖ 뜻과 의미
katapetasma는 ‘휘장, 커튼’을 뜻하며, 성전의 지성소와 성소 사이를 구분하던 천을 가리킵니다. 이 휘장은 성소에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경계, 즉 죄인 된 인간이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 본문에서의 의미
본문 38절은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신 순간,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찢어졌다고 기록합니다. 이는 우연이나 자연현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 사건입니다.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다는 표현은,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임을 드러냅니다.
❖ 신학적 의미
휘장의 찢어짐은 제사장 없이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은혜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서 10:19-20은 이를 예수님의 육체로 찢어진 휘장에 비유하여, 그분의 죽음이 곧 지성소로 들어가는 새롭고 산 길임을 선언합니다.
katapetasma는 곧 복음의 길, 십자가의 문, 하나님의 은혜로 열린 하늘의 입구입니다.
📖 절별주해
25절 │ 제삼시가 되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
❖ 해설
‘제삼시’는 유대인의 시간 개념으로 오전 9시경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재판과 처형이 매우 신속하게 이루어졌음을 보여줍니다. ‘못 박다’ (ἐσταύρωσαν)는 단순히 형벌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이 절정에 이르렀음을 나타냅니다. 고대 로마에서는 범죄자에게 십자가형을 통해 모욕과 고통을 동시에 가하는 공개적 처벌을 행했습니다.
❖ 적용
우리가 쉽게 넘기는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친히 선택하신 구원의 방식입니다. 주님이 어떤 시간, 어떤 방법으로 나를 위해 죽으셨는지 진지하게 묵상해야 합니다. 복음은 그분의 고통에서 시작됩니다.
26절 │ 그 위에 있는 죄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
❖ 해설
‘죄패’는 로마법에 따라 십자가 위에 붙이는 죄인의 죄목입니다. ‘유대인의 왕’이라는 문구는 빌라도가 예수님을 정치범으로 몰아가기 위해 사용한 말이지만, 신학적으로는 예수님의 왕권을 드러내는 진리의 선언이 됩니다. 이는 인간의 조롱이 하나님의 메시지로 전환되는 장면입니다.
❖ 적용
세상은 예수님을 조롱하며 ‘유대인의 왕’이라 불렀지만, 하나님은 그 조롱마저 사용하셔서 진리를 증언하셨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어떤 왕으로 고백하고 있는가? 말이 아닌 삶으로 고백하고 있는가?
27절 │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 해설
예수님은 ‘강도들’(λῃστάς)과 함께 못 박히셨습니다. 이는 단순한 동시처형이 아니라, 예수님이 가장 낮고 저주받은 자들과 함께하셨다는 상징입니다. 이사야 53:12의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다”는 예언이 성취됩니다.
❖ 적용
예수님은 죄 없는 분이셨지만, 죄인들 사이에 서셨습니다. 나의 죄된 자리, 더럽고 피 흘리는 그 자리에 오신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겸손히 응답해야 합니다.
28절 │ (어떤 사본에 이르되 이는 대적들과 함께 잡힌 바 되었다 함을 이루려 함이러라 기록되어 있음)
❖ 해설
이 구절은 고대 사본에 따라 포함되지 않기도 하며, 일부 본문에는 각주로 처리됩니다. 하지만 이 내용은 명백히 이사야 53:12의 성취와 관련된 주석적 삽입이며, 예수님이 범죄자들과 함께 취급되었음을 신학적으로 강조한 표현입니다.
❖ 적용
예수님의 고난은 철저히 예언된 고난이며,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이루어진 구속의 길이었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예언과 말씀의 성취가 있음을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29-30절 │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 해설
‘머리를 흔들며’는 히브리적 표현으로 조롱의 제스처입니다(시 22:7 참조). 예수님의 성전 발언을 오해하여 그를 모욕하고, 기적을 요구하는 이들은 기적을 믿음의 조건으로 삼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음으로써 진정한 구원을 이루십니다.
❖ 적용
우리는 주님께 기적을 원하면서, 그분의 뜻은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믿음은 기적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31-32절 │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 해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종교 지도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조롱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보고 믿겠다”는 말은 인간의 불신앙을 드러내며, 그들의 요구는 믿음이 아니라 구경거리입니다. 심지어 함께 못 박힌 죄인들마저 예수님을 욕합니다.
❖ 적용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증거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의미를 마음으로 깨닫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나는 여전히 ‘보여달라’는 신앙 안에 머물러 있지는 않은가요?
33-34절 │ 제육시가 되매 …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 해설
제육시(정오)부터 제구시(오후 3시)까지 땅에 어둠이 임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의 상징입니다. 예수님의 외침은 시편 22편의 인용으로, 버림받은 자의 절규이며 동시에 구속의 중심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된 이 순간은 삼위 하나님의 내적 고통이 응축된 장면입니다.
❖ 적용
우리는 하나님의 침묵 앞에 낙심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철저히 버림받은 자리에서도 여전히 ‘나의 하나님’이라 부르셨습니다. 그 신뢰를 배우고 싶습니다.
35-36절 │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 주나 보자 하더라
❖ 해설
예수님의 외침을 듣고 ‘엘리야’를 부른다고 오해하는 자들은 예언적 구속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채, 여전히 기적과 구경거리에 집중합니다. 해면에 신 포도주를 적셔 마시게 하는 장면은 최소한의 배려이자, 조롱 섞인 기대의 표현입니다.
❖ 적용
예수님의 말씀을 바르게 듣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신앙은 ‘무엇을 보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믿는가’입니다. 우리는 엘리야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주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37절 │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 해설
예수님의 죽음은 침묵이 아니라 ‘큰 소리’로 마무리됩니다. 이는 승리의 외침이자, 모든 것을 다 이루셨다는 완결의 선언입니다. 누가복음 23:46과 요한복음 19:30은 이 장면에서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또는 ‘다 이루었다’라고 병행해서 설명합니다.
❖ 적용
예수님은 죽음을 맞이하실 때에도 담대히 외치셨습니다. 우리의 마지막도 믿음과 소망의 외침으로 마무리될 수 있도록, 지금의 삶을 주님 앞에 정결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38절 │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 해설
휘장은 지성소와 성소를 구분하던 천으로, 죄인된 인간과 거룩하신 하나님 사이의 경계를 상징합니다.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다는 표현은 하나님이 주도하신 일이며, 이제 예수님의 피로 누구나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 적용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그 순간, 나를 위한 길이 열렸습니다. 신앙생활은 이제 성전 밖에서 맴도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는 삶입니다. 오늘도 그 열린 길 앞에 무릎 꿇어야 합니다.
📖 묵상
“제삼시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
마가복음 15장의 이 한 구절은 너무도 담담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한 줄 안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피 흘리시는, 우주의 역사가 바뀌는 가장 결정적인 순간이 담겨 있습니다.
오전 9시. 한낮을 향해 가던 시간에, 하늘의 왕은 조롱의 죄패 아래에 달리셨습니다.
‘유대인의 왕’이라는 글씨는 사람들의 눈엔 조롱이었지만, 믿는 이들에겐 가장 깊은 위로의 선언입니다.
“진짜 왕이 오셨다. 그러나 그 왕은 우리 죄를 대신하여 달리셨다.”
예수님은 홀로 달리신 것이 아니라, 양편에 강도들과 함께 달리셨습니다.
이는 단지 동시처형이 아니라, 예수님이 죄인의 자리 한복판에 서셨다는 강력한 상징입니다.
아무도 원하지 않는 자리에, 아무도 대신 서 줄 수 없는 자리에,
주님은 스스로 서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지나가며 머리를 흔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곡해하고, 자신들의 논리로 조롱합니다.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짓겠다더니, 내려와 보라!”
“남은 구원하면서 자기는 못 구원하는가?”
이 말들은 모두, 예수님을 바라보는 인간의 눈이 얼마나 편협하고,
얼마나 자기중심적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들은 믿음을 보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기적을 구경하고 싶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때, 하늘이 어두워졌습니다.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 가장 밝아야 할 시간에 세상은 침묵했고,
빛은 사라졌고, 땅은 숨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들렸던 한 음성—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분이 부르셨는데,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분이 찾으셨는데, 하늘은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 침묵은 죄인을 위한 자리였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버림받지 않도록,
그분이 대신 버림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순간, 한 사람은 포도주를 해면에 적셔 올렸습니다.
어쩌면 마지막 자비였을 수도 있고, 여전히 조롱이 담긴 행동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엘리야가 오기를 기대했지만,
진짜 구원은 그들의 발 아래에서 피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은 숨을 거두십니다.
그 숨은 패배의 끝이 아니라, 사랑의 완성이었습니다.
그 순간, 성소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찢어졌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던 죄의 장막이 찢기고,
은혜의 길이, 생명의 길이, 구원의 길이 열렸습니다.
이 본문을 묵상하며 오래도록 머물렀던 장면은,
예수님의 침묵이었습니다.
아무 말씀 없이,
아무 해명 없이,
오직 사랑으로 감당하셨던 그 침묵은
오늘 나의 불평 많고 자기중심적인 신앙을 부끄럽게 만듭니다.
예수님은 내려오실 수 있었지만,
내려오지 않으셨습니다.
그 선택이 없었다면,
지금 나는 주 앞에 설 수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고난주간을 지나는 이 시간,
우리는 그 십자가 앞에서 묻습니다.
“내가 서야 할 자리에 누가 서셨는가?”
“그 사랑 앞에 나는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오늘도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를 위해 나는 침묵했고, 너를 위해 나는 달렸으며, 너를 위해 휘장을 찢었다.”
이 놀라운 사랑 앞에, 이제 우리의 고백이 필요합니다.
“주님, 저도 십자가 아래 무릎 꿇습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그 사랑을 외면하지 않겠습니다.”
📖 말씀 _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원의 완성"
서론 │ 멈춰 선 시간, 완성된 구원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장소는, 우리가 생각하는 왕궁이나 성전이 아닙니다. 바로 골고다 언덕 위의 십자가입니다.
가장 비참하고, 가장 수치스러운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가장 크고, 가장 영광스러운 구원의 역사를 완성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하는 마가복음 15장 25절부터 38절까지의 본문은, 그 절정의 순간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조롱당하셨고, 모욕당하셨고, 마지막 숨을 내쉬기까지 그 자리를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다 이루었다’는 외침과 함께 구원의 길이 열렸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다시금 기억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그분의 고난 속에서 완성되었고,
우리의 은혜는, 그분의 죽음 위에 세워졌다는 사실을.
본론 │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세 가지 완성
1. 죄인의 자리에 대신 서신 완성
본문 27절은 예수님께서 두 강도 사이에 함께 못 박히셨음을 전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가장 죄 많은 자’의 자리, ‘가장 저주받은 자’의 자리에 계셨습니다.
그분은 거룩한 분이셨지만, 범죄자들과 함께 숫자에 들어가셨고,
그분의 죄패에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조롱이 담겼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장면을 단지 수치로 기록하지 않습니다.
이사야 53장의 예언,
“그가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도다”라는 말씀은
이 순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대신하여 정죄의 자리에 서셨고,
우리는 그분의 대신하심으로 의인의 자리로 옮겨졌습니다.
십자가는 교체의 자리입니다.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주님이 계셨고,
주님이 누리셔야 할 자리를 내가 받았습니다.
2. 버림받음의 자리에서 울려 퍼진 완성
제육시, 온 땅에 어둠이 임하고,
제구시에 예수님은 외치십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 외침은 예수님의 내면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온 정신적, 영적, 존재적 고통의 절규입니다.
삼위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과 교제가 단절되는 순간—
이전에도, 이후에도 결코 없었던 우주적 고독의 순간입니다.
그분은 하나님께 철저히 버림받으셨고,
그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완전히 받아들여지는 길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외침은 패배가 아닙니다.
이 외침은 대속의 본질이며,
죄의 값을 온전히 치르셨다는 구속의 선언입니다.
3. 휘장이 찢어지며 열려진 완성
예수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는 순간,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찢어집니다.
이 휘장은 단순한 성전의 장막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죄의 상징,
지성소와 인간 사이의 단절의 증거였습니다.
그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이 단지 한 생명의 끝이 아니라,
모든 시대를 관통하는 구속사의 완성이며,
모든 인류를 향한 은혜의 문이 열렸음을 뜻합니다.
이제는 더 이상 제사장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속죄의 염소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피가 모든 장벽을 무너뜨렸고,
그분의 죽음이 은혜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결론 │ “다 이루셨도다”, 그 선언 앞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그 누구보다 완전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분은 죄가 없으셨고, 비난받을 이유가 없으셨으며,
스스로 생명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죽음을 선택하셨고,
십자가를 감당하셨으며,
그 자리에서 외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구원의 모든 과정이 끝났다는 의미,
죄의 값이 완전히 지불되었다는 의미,
은혜의 길이 완전하게 열렸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이 완성 앞에 서야 합니다.
더 이상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으려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더 이상 비교와 죄책감에 얽매일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루신 구원이 완전하기에,
우리는 이제 담대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도 이렇게 고백하십시오.
“주님, 제 삶은 제 힘으로 완성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주님이 이루신 완성이 제게 충분합니다.
그 은혜로 오늘도 살고,
그 사랑으로 오늘도 예배합니다.”
그분이 이루셨기에,
우리는 오늘도 감사로 삽니다.
십자가 앞에 머무르며,
완성된 복음 위에 다시 서는 한 주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올려드리는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오늘도 저를 십자가 앞에 세워주시니 감사합니다.
제게는 익숙한 십자가지만,
말씀을 묵상할수록 그 십자가는 여전히 놀랍고,
여전히 두렵고, 여전히 감사할 뿐입니다.
주님,
“제삼시에 못 박히셨다”는 짧은 문장 하나에
우주의 역사가 멈추고,
시간이 멈추고,
하늘과 땅이 교차한 그날이 담겨 있었습니다.
아무 말 없이 조롱을 견디시고,
내려올 수 있음에도 그 자리를 지키신 예수님,
그 자리가 바로 제가 서야 할 자리였습니다.
왕이신 주님,
그 죄패에 쓰인 ‘유대인의 왕’이라는 글귀는
사람들은 조롱의 말이었지만,
하나님은 그것으로 진리를 선포하셨습니다.
“이 분이 너희 왕이시다.”
주님, 오늘도 제 왕은 오직 주님이심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주님,
저는 얼마나 자주
왕이신 주님을 따르지 않고,
내가 주인 된 삶을 살았는지요.
나의 판단과 감정과 고집이
십자가의 은혜보다 앞선 삶을 살았던 시간들이
오늘 이 말씀 앞에서 얼마나 부끄러운지요.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주님, 그 외침은
단순한 고통의 절규가 아니라,
저를 위한 대속의 선언이었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버림받으셔야 했던 그 자리에서,
저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제가 하나님과 다시 화목하게 된 이유,
그것은 주님이 화목의 제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하나님과 단절되셨기에,
저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예수님의 죽음의 순간,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그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찢어졌다는 말씀은
누군가의 손이 아닌,
하나님의 손으로 이루어진 사건임을 보여줍니다.
이제는 더 이상 제사장 없이도,
속죄의 염소 없이도,
예수님의 피로 지성소로 나아가는 길이 열렸습니다.
주님,
그 길을 걸을 수 있게 하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 은혜를 당연하게 여겼던 저의 무지함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 사랑을 알고도,
순종하지 않았던 제 삶의 게으름을 회개합니다.
주님, 오늘 저는
그 휘장이 찢어지며 열려진 은혜의 문 앞에 다시 서고 싶습니다.
그 문을 매일 통과하며 살고 싶습니다.
내 힘과 능력, 자격으로가 아니라,
예수님이 다 이루신 그 구속의 완성 위에 살고 싶습니다.
오늘도 그 십자가 앞에 엎드립니다.
내가 살아 있는 이유,
내가 용서받은 이유,
내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이유가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신 주님의 외침 때문임을 믿습니다.
“다 이루었다.”
이 한 마디에
제 구원이 완성되었고,
제 신분이 바뀌었고,
제 인생의 방향이 정해졌습니다.
주님,
이제는 내 삶이
그 사랑에 응답하는 예배가 되게 하소서.
내 말과 행동, 선택과 시간,
모든 것이 ‘다 이루신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소서.
은혜 위에 서게 하시고,
복음 위에 서게 하시며,
그 완성된 사랑 위에 나를 고정시키소서.
오늘도 그 십자가 앞에서 다시 고백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이 다 이루셨습니다.
이제 제 삶은 오직 그 은혜로만 살아갑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믿으며, 고백하며 기도드립니다.
아멘.
'【Bible'Story】 > [생명의 삶] 고난주간ㅣ2025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생명의 삶_고난주간 QT] 마가복음 15장 39절-47절 _ 2025. 4. 19(토) (0) | 2025.04.18 |
---|---|
[생명의 삶_고난주간 QT] 마가복음 15장 1절-15절 _ 2025. 4. 17(목) (2) | 2025.04.17 |
[생명의 삶_고난주간 QT] 마가복음 14장 32절-42절 _ 2025. 4. 16(수) (2) | 2025.04.16 |
[생명의 삶_고난주간 QT] 마가복음 14장 12절-26절 _ 2025. 4. 15(화) (1) | 2025.04.15 |
[생명의 삶_고난주간 QT] 마가복음 12장 1절-12절 _ 2025. 4. 14(월) (0) | 2025.04.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