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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Story】/[생명의 삶] 시편ㅣ2025년

[생명의 삶] 시편 89편 38절-52절 _ 2025. 7. 7(월)

by LogosLab Steward 2025. 7. 7.

❖ 이 자료는 개인적인 말씀 묵상과 연구를 바탕으로 [목회자의 설교 준비][성경을 더욱 깊이 알고자 하는 ], 그리고 [말씀묵상에 도움이 필요한 성도]를 돕기 위해 제작되었습니다. 본 자료의 모든 저작권은 작성자인 LogosLab Steward에게 있으며, 자유롭게 사용 및 참고하시되 출처를 밝혀주시고, [무단 복제 배포]를 합니다. 이 자료가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풍성하게 경험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 본문

38 그러나 주께서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노하사 물리치셔서 버리셨으며 
39 주의 종의 언약을 미워하사 그의 관을 땅에 던져 욕되게 하셨으며 
40 그의 모든 울타리를 파괴하시며 그 요새를 무너뜨리셨으므로 
41 길로 지나가는 자들에게 다 탈취를 당하며 그의 이웃에게 욕을 당하나이다 
42 주께서 그의 대적들의 오른손을 높이시고 그들의 모든 원수들은 기쁘게 하셨으나 
43 그의 칼날은 둔하게 하사 그가 전장에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게 하셨으며 
44 그의 영광을 그치게 하시고 그의 왕위를 땅에 엎으셨으며 
45 그의 젊은 날들을 짧게 하시고 그를 수치로 덮으셨나이다 (셀라)
46 여호와여 언제까지니이까 스스로 영원히 숨기시리이까 주의 노가 언제까지 불붙듯 하시겠나이까 
47 나의 때가 얼마나 짧은지 기억하소서 주께서 모든 사람을 어찌 그리 허무하게 창조하셨는지요 
48 누가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자기의 영혼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지리이까 (셀라)
49 주여 주의 성실하심으로 다윗에게 맹세하신 그 전의 인자하심이 어디 있나이까 
50 주는 주의 종들이 받은 비방을 기억하소서 많은 민족의 비방이 내 품에 있사오니 
51 여호와여 이 비방은 주의 원수들이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의 행동을 비방한 것이로소이다 
52 여호와를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아멘 아멘 

📖 말씀

"변함없는 하나님의 약속_Vol.3"

 

서론하나님의 약속, 정말 여전히 유효한가요?

 

시편 89편의 후반부는 너무도 인간적인 절규로 가득합니다. 앞선 19–37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으신 언약, 그리고 그 언약의 영광스러운 약속들을 회상하며 찬양합니다. 마치 모든 것이 분명하고 확실하게 보이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38절부터 분위기는 급격히 달라집니다. “주께서 주의 기름 부으신 자를 미워하사”라는 충격적인 고백은, 그 찬양의 여운을 무참히 깨뜨립니다. 마치 하늘이 갈라지고, 언약의 무게가 산산이 부서지는 듯한 절망이 밀려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목회를 하며, 사역의 길에서 저는 이 질문과 수도 없이 마주쳤습니다. “하나님, 분명히 저를 부르셨잖아요. 그런데 왜 지금 이렇게 침묵하시는 거죠?” 고백컨대, 어떤 날은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처럼 느껴졌고, 어떤 날은 ‘언약’이라는 말이 공허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동안 기도했던 수많은 약속들이 지연되는 것처럼 보이고, 때로는 완전히 무너진 듯한 상황 앞에서, ‘신실하신 하나님’이라는 고백은 점점 입 밖으로 꺼내기 어려운 말이 되곤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본문은, 그 위기의 순간에도 우리가 말씀을 손에 들 수 있는 이유를 다시 확인시켜줍니다. 시인은 언약의 약속을 기억하면서도, 지금의 상황은 전혀 그것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토로합니다. 그 간극, 그 괴리감—그것이 바로 우리의 삶 속에 자주 찾아오는 현실입니다. 말씀을 믿지만 현실은 반대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같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순간, 시인은 하나님 앞에서 가면을 벗고 말합니다. 그 말은 원망이기도 하고, 부르짖음이기도 하며, 동시에 믿음의 마지막 끈을 놓지 않으려는 애틋한 손짓입니다.

 

이 설교에서 우리는 그 ‘신실하신 언약의 하나님’이 도대체 어떤 분이시며, 버림받은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에도 그 언약이 어떻게 여전히 살아 있는지를 살펴보려 합니다. 시편 89편의 절망과 탄식을 통해, 오히려 하나님의 언약이 어떻게 더 깊고, 더 위대하며, 더 복음적인 방식으로 성취되고 있는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다시 믿고 고백합시다. 하나님은 여전히, 자신의 약속에 충실하십니다. 그리고 그 언약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멈추지 않는 사랑의 표현이며, 결국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성취될 것입니다.

 

 

본론ㅣ그러나, 주님의 언약을 기억하소서

 

1. 하나님의 침묵처럼 느껴질 때, 언약은 무너진 것일까?

그러나 주께서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노하사 물리치셔서 버리셨으며
주의 종의 언약을 미워하사 그의 관을 땅에 던져 욕되게 하셨으며 ” (38–39절)

 

시편 89편 38절의 시작은 전환의 접속사 “그러나”로 시작됩니다. 이는 앞절까지의 언약 찬양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선언입니다. 시인은 ‘주의 기름 부으신 자’—곧 다윗 왕을 언급하며, 지금의 현실이 그 언약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토로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다윗을 버리셨고, 그의 왕관이 땅에 던져졌으며, 언약은 철회된 것처럼 보인다고 고백합니다. 신학적으로 보면 이것은 매우 대담하고 위험한 진술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너무도 인간적이고, 너무도 정직한 고백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이런 ‘그러나’의 순간들이 찾아옵니다. ‘주께서 기름 부으신 사역자’, ‘믿음으로 걸어온 길’이라 확신했는데, 돌아오는 것은 실패와 비난, 낙심뿐일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길이기에 그분이 책임지실 것이라 믿었지만, 현실은 오히려 하나님의 ‘철수’를 느끼게 합니다. 그때 우리는 본문처럼 묻습니다. “주님, 왜 지금 침묵하십니까?”

 

본문은 단지 현실의 고통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과의 언약에 대해 어떤 충격을 주는지를 솔직하게 말합니다. 39절에서 ‘언약을 미루시고’라는 표현은 히브리어로 ‘하늘로 들어올려진 것처럼 멀어져 버린 상태’를 묘사합니다. 눈앞의 현실과 언약 사이의 간극이 깊어질수록, 하나님이 나를 떠난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이 커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의 흐름은 이 절망의 순간을 ‘언약의 파기’가 아니라, ‘언약의 깊은 시험’으로 해석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그분의 언약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시인은 그렇게 느낄 뿐입니다. 침묵은 파기가 아니며, 하나님의 느림은 무능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의 시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분의 약속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다윗 왕조가 흔들려도, 메시아는 결코 그 계획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침묵 중에도 여전히 말씀하시고, 무너진 것처럼 보여도 언약은 더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하나님의 약속은 점점 ‘지연된 약속’처럼 보입니다. 정의가 승리하지 않고, 교회는 공격받고, 성도는 고난받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본문처럼 하나님께 질문해야 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 질문조차 ‘믿음’의 행위라는 사실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여전히 하나님께 묻는 이 시인의 태도는, 언약을 완전히 잊지 않았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언약의 종말이 아니라, 성취의 서곡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도 그랬습니다. 모두가 버림받았다고 여겼던 그날, 오히려 하나님의 언약은 가장 깊이 성취되고 있었습니다. 침묵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2. ‘패배의 시간’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감추어진 손길

그의 모든 울타리를 파괴하시며 그 요새를 무너뜨리셨으므로 
길로 지나가는 자들에게 다 탈취를 당하며 그의 이웃에게 욕을 당하나이다 ” (40–41절)

 

시편 기자는 눈에 보이는 모든 ‘영광의 상징’들이 무너지는 것을 목격합니다. 성벽은 무너졌고, 왕관은 땅에 던져졌으며, 다윗 왕국의 요새는 무너졌습니다. 한때 세상의 중심이었던 시온이 이제 조롱거리가 되고, 원수의 손에 유린되고 있습니다(42–44절). 이 모든 장면은 단순한 정치적 몰락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실제로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종말적 절망의 풍경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눈으로 다시 바라보면, 그 ‘패배의 시간’은 하나님의 침묵의 시간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감추어진 손이 일하고 있는 시간입니다. 겉으로는 심판처럼 보일지라도, 실제로는 언약을 갱신하고, 믿음의 근거를 인간의 조건이 아닌 하나님의 성실하심으로 되돌리는 정화의 시간입니다.

 

본문은 다윗의 왕위가 끊기고(44절), 청년의 때가 짧아지고(45절), 수치와 조롱이 쏟아지는(46–50절) 상황을 생생히 묘사합니다. 이처럼 무너지고 수치를 당하는 시간은 모든 사람에게 철저한 고통의 시간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패배의 시간을 절망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시편의 클라이맥스는 49절에서 시인이 하나님께 묻는 절절한 질문에 담겨 있습니다.

 

주여 주의 성실하심으로 다윗에게 맹세하신 그 전의 인자하심이 어디 있나이까

 

시인은 단순히 하나님께 불평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이전 인자하심’—곧 과거에 언약 안에서 베풀어오신 그 신실하심을 기억하며 묻습니다. 그 물음은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아니라, 잊을 수 없는 은혜에 대한 절규입니다.

 

우리도 신앙의 여정에서 ‘이전의 은혜’를 붙들며 하나님께 묻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사역이 어려워지고, 관계가 흔들리고, 건강이 무너지고, 기도는 응답되지 않을 때 우리는 이렇게 질문하게 됩니다. “하나님, 그때의 은혜는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바로 그 질문이 믿음의 자리입니다. 하나님과의 과거를 기억하고, 그 기억을 통해 현재를 재해석하며, 여전히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 이 태도는 바로 ‘언약 백성’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영광스러운 승리의 시간만이 아니라, 패배와 어둠의 시간 가운데서도 자신의 일을 쉬지 않고 이루어가십니다. 성벽이 무너질 때, 사람들은 하나님도 떠나셨다고 생각하지만, 그 벽 너머 어딘가에서 하나님은 언약을 다시 세우실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마치 예루살렘이 멸망한 그때에도, 바벨론 포로지에서 에스겔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지 않았음을 보여주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지금 여러분의 인생의 성벽이 무너진 것처럼 느껴지십니까? 사역의 관이 땅에 떨어지고, 내 삶이 수치로 덮인 것 같은 시간 속에 계십니까? 그렇다면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여전히 그분의 언약을 기억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언약은 우리의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실하심 위에 세워진 약속입니다.

 

우리가 보기엔 실패처럼 보여도, 그 시간은 하나님의 정화이며, 회복의 준비입니다. 그 감추어진 손길을 신뢰할 수 있다면, 우리는 패배 속에서도 소망을 노래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언약은 무너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3. “언약을 기억하소서” – 절망 속에서도 드리는 신앙의 기도

“주는 주의 종들이 받은 비방을 기억하소서 많은 민족의 비방이 내 품에 있사오니” (50절)

 

시편 기자는 이제 절망의 한복판에서 다시 고개를 들어 하나님을 향해 기도의 언어를 회복합니다. 그는 단순히 상황의 고통을 토로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을 근거로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언약을 기억하소서.” 이것은 인간의 조건을 근거로 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성실하심에 기초한 신앙의 간구입니다.

 

49절에 “주의 인자하심은 어디 있나이까?”라는 질문은 과거의 은혜를 기억하는 신앙인의 물음입니다. 하지만 50절에 이르면 그 기억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회복하소서라는 신앙의 요청으로 전환됩니다. 치욕을 당하는 것은 단지 개인적인 수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에 관계된 문제라는 인식이 그 바탕에 있습니다.

 

이 기도는 참된 언약 백성만이 드릴 수 있는 기도입니다. 단순히 현실의 고통을 벗어나게 해달라는 탄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과 그 영광을 다시 회복해 달라는 간절한 중보의 기도입니다. 시편 기자는 민족의 대표로, 망가진 왕권과 짓밟힌 백성의 처지를 품고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그리고 마지막 52절, 그는 선언하듯 고백합니다.

 

“여호와를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아멘 아멘.”

 

이 결론은 너무도 놀랍습니다. 왜냐하면 시인은 여전히 고통 가운데 있고,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상황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이 달라졌습니다. 그는 패배의 한복판에서, 조롱받는 현실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 하나만을 근거로 영원한 찬송을 결단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기도, 언약의 기도, 소망의 예배입니다.

 

우리의 현실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을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시고, 그 언약은 여전히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편의 마지막은 ‘아멘 아멘’으로 끝납니다. ‘그렇습니다, 반드시 그렇게 될 것입니다.’ 이 반복은 시인의 확신이며, 언약 백성의 신앙의 고백입니다.

 

 

결론 | 찬송으로 마무리되는 절망의 노래

 

시편 89편은 놀라운 구조를 가진 시입니다. 1절부터 37절까지는 하나님 언약의 영광을 노래하다가, 38절 이후부터 급격히 상황이 어두워지고 절망으로 내려앉습니다. 하지만 맨 마지막 구절은 다시 찬송으로 끝납니다. 마치 깊은 계곡의 끝에서 다시 새벽의 빛을 보는 것처럼, 시인은 ‘언약이 현실을 이긴다’는 고백으로 시편을 마무리합니다.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찬송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잘될 때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 무너졌을 때에도 하나님을 여전히 ‘선하신 분’으로 믿는 행위입니다. 바로 그런 찬송이, 이 시편의 결론이자 우리의 신앙의 출발점이 됩니다.

 

오늘 우리가 서 있는 자리는 회복의 자리일 수도 있고, 무너진 성벽 앞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기억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붙잡지 않아도, 그분은 우리를 결코 놓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손이 약해질지라도, 하나님의 손은 결코 느슨해지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눈물의 자리에서라도 찬송을 멈추지 마십시오. 응답이 더뎌 보여도, 언약을 신뢰하는 기도를 놓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성실하심은 우리의 신실함보다 앞서가며, 그 언약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될 것입니다.

 

“여호와를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아멘 아멘.”


📖 본문 배경

❖ 개요

 

시편 89편은 하나님의 언약 신실하심에 대한 찬양(1–18절), 다윗 언약에 대한 회상과 확언(19–37절), 그리고 오늘 본문인 38–52절에서 언약의 현실적 좌절과 신학적 탄식으로 이어집니다. 이 부분은 시 전체의 분위기를 급격히 반전시키며, “그러나”로 시작하여 하나님의 언약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강하게 호소합니다. 시인은 다윗에게 주어진 언약이 마치 폐기된 듯 보이는 현실 앞에서, 하나님의 노하심과 방관, 원수들의 조롱, 이스라엘의 수치 등을 솔직하게 토로합니다.

특히 38–45절에서는 다윗 왕조의 몰락과 수치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며, 46–51절에서는 언약을 기억하소서라는 절박한 기도로 이어집니다. 52절의 “여호와를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아멘 아멘”은 이러한 탄식조차 믿음 안에서 마무리 짓는 성숙한 신앙고백입니다. 이 마지막 절은 시편 세 번째 책의 공식적인 결미(結尾)이기도 합니다.


❖ 역사적 배경

 

이 시편은 바벨론 포로 직전 혹은 포로기 중반에 쓰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다윗 왕조의 연속성이 위협받고, 왕권이 무너졌으며, 성전조차 파괴된 상황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신학적 혼란을 안겼습니다. “다윗의 왕위는 영원하리라”(삼하 7:16)는 하나님의 약속이 무색할 만큼, 현실은 패배와 멸망으로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이러한 역사적 좌절 속에서 하나님의 분노와 언약의 실패처럼 보이는 현실을 직면합니다. 그러나 단순한 역사적 불만이 아닌, 언약을 기억하소서라는 신앙의 호소로 전환시키는 점에서 이 시는 신학적 탄식시로서의 독보적인 위상을 가집니다.


❖ 문화적 배경

 

고대 근동에서는 왕의 실패나 몰락이 신의 저주나 철회로 여겨졌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주변국들은 다윗 왕조의 몰락을 보고 “여호와가 이들을 버리셨다”고 조롱했습니다. 본문 50–51절은 이러한 ‘비방’의 문화적 맥락을 반영합니다. 이처럼 고대 세계에서 왕의 영광은 곧 나라의 신의 영광이었기에, 하나님의 명예는 왕의 운명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시인은 “주의 종들이 받은 비방”을 하나님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 여기며, 하나님의 명예 회복을 간구합니다. 왕의 패배는 단지 정치적 실책이 아니라, 하나님 신뢰의 붕괴 위기로 간주되었던 것입니다.


❖ 신학적 배경

 

38–52절은 성경 전체에서 언약 신학의 긴장을 가장 날카롭게 보여주는 본문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분명 “영원하다”고 하셨는데(35절), 현실은 정반대입니다. 이 딜레마 속에서 시인은 단순한 항의나 절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붙드는 기도로 나아갑니다.

“주의 성실하심으로 다윗에게 맹세하신 그 전의 인자하심이 어디 있나이까”(49절)는 질문은 비판이 아니라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믿음의 요청입니다.

본문은 언약의 철회가 아닌, 언약의 지연과 시련으로 해석됩니다. 신학적으로 이는 신정론(theodicy), 즉 하나님의 선하심과 현실의 고통 사이에서 성도의 태도를 모범적으로 보여주는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이 본문은 메시아 예언의 배경이 되는 언약 위기를 드러내며,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윗 언약이 성취됨으로 이 긴장은 해소됩니다. 그리스도는 버림받으신 왕(38절), 조롱당하신 종(51절), 그러나 결국 높임을 받은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히 1:8–9)로서 이 시편의 종말적 성취가 됩니다.

 


📖 본문 요약

시편 89편 38–52절은 앞서 언급된 다윗 언약에 대한 찬양과 확신(19–37절)과 극명하게 대조되는 탄식의 절정입니다. 시인은 이제 눈앞의 현실 속에서 다윗 왕조의 몰락과 언약의 파기를 체험하는 듯한 상황을 마주하며, 언약의 불변을 선언했던 그 믿음과는 다른, 깊은 혼란과 절망을 토로합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현재의 고난 사이에서 느끼는 신앙의 긴장을 날 것 그대로 드러내는 대목으로, 이 시편의 절정이자 절규의 정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이러한 절망의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의 언약을 호소하고, 종말적인 구속을 갈망하며 시편을 마무리합니다.

 

38–39절 | 시인은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자, 곧 왕을 거부하시고 물리치셨다고 고백합니다. 이는 단순한 통치의 붕괴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가 파기된 듯한 충격을 내포합니다. “주의 종의 언약을 미워하사”라는 표현은, 시인의 입장에서 바라본 극심한 좌절감의 표현으로, 하나님께서 과거에 맺으신 언약을 무시하신 것처럼 느껴지는 현실을 반영합니다.

 

40–41절 | 다윗 왕국의 보호 장치들—울타리와 요새—가 무너졌고, 이로 인해 외부의 약탈자들에게 공격을 받으며 수치와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고 탄식합니다. 이는 단지 군사적 패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 백성으로서의 정체성과 자존감이 철저히 무너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42–45절 | 하나님은 오히려 대적들의 손을 들어 높이시고, 그들의 기쁨의 도구로 삼으셨다고 표현됩니다. 다윗 왕가의 무기는 무력해졌고, 왕의 영광은 지워졌으며, 젊은 날과 힘 또한 짧아지고 수치로 가려졌습니다. 이는 왕국의 몰락이 단지 정치적 패배가 아니라,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 아래 이루어진 일처럼 보인다는 인식을 표현합니다.

 

46–48절 | 시인은 깊은 탄식 속에서 하나님께 “언제까지 숨기시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이 물음은 시간의 무게 속에서 신앙이 흔들리는 인간의 내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시인은 인간의 인생이 얼마나 짧고 허무한지를 기억해 달라고 간청하며, 죽음의 보편성과 그 절박함을 하나님 앞에 토로합니다. “누가 살아서 죽음을 피하리이까”라는 질문은 구속의 희망 없이는 인간 존재가 얼마나 허약한지를 절절히 드러냅니다.

 

49–51절 | 시인은 다시금 다윗 언약으로 돌아가, 하나님께 그 인자하심과 신실하심이 어디 있는지를 묻습니다. 과거 다윗에게 맹세하신 그 언약이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를 찾는 탄식이며, 이는 언약 신학의 심장부에서 터져 나오는 절규입니다. 또한, 주의 종들이 비방당하고, 주의 원수들이 왕의 행동을 조롱하는 현실을 고발하면서, 이 모든 모욕은 단지 인간 왕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이라고 간주합니다.

 

52절 | 이러한 탄식과 질문의 끝에서도, 시인은 “여호와를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아멘 아멘”이라는 고백으로 시편을 마무리합니다. 이는 역설적 결론입니다. 모든 것이 무너진 듯한 현실 속에서도, 여호와는 찬송받아야 할 분이며,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언젠가 반드시 드러날 것이라는 믿음을 놓지 않겠다는 결단이 담겨 있습니다. 시인의 신앙은 절망과 불평의 자리에 멈추지 않고, 찬송이라는 미래 지향적 고백으로 나아갑니다.

 

시편 89편 38–52절은 언약에 대한 신앙이 어떻게 절망을 통과하며 더욱 깊어지는지를 보여주는 탁월한 본문입니다. 이는 단지 고난의 현실을 설명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기억하고, 그 신실하심을 붙들어야 한다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이 마지막 탄식은 단절이 아니라, 더욱 깊은 신뢰를 향한 다리 역할을 하며, 모든 신자의 고난 속에서 여전히 유효한 찬송의 가능성을 증언합니다.

 


📖 붙잡는 말씀

46 여호와여 언제까지니이까 스스로 영원히 숨기시리이까 주의 노가 언제까지 불붙듯 하시겠나이까 

 

이 구절은 시편 89편 후반부의 탄식과 고통을 가장 응축하여 담고 있는 구절이자, 시인의 절규 가운데 우러나오는 깊은 질문입니다. 앞서 다윗과 맺으신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을 상기하던 시인은, 이제 눈앞의 현실 속에서 그 약속이 철저히 무너진 것처럼 보이는 상황 앞에서 하나님께 직접 묻습니다. “언제까지입니까?” 이 질문은 단순히 시간의 흐름을 묻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깊은 갈등과 의문을 토해내는 인간 영혼의 울부짖음입니다.

 

“여호와여 언제까지니이까?” 이 질문은 성경 전반에 걸쳐 고난 가운데 있는 신자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반복되는 물음입니다. 시편 13편에서도, 하박국 선지자도, 계시록의 순교자들도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신뢰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갈망의 표현이며, ‘부르짖음조차 멈추지 않겠다’는 신앙의 끈질긴 태도입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언약을 믿었기에 오히려 더 절실하게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언약하신 주님, 지금 왜 침묵하십니까?”

 

“영원히 숨으시리이까?”라는 고백은 단지 현실의 고난이 길어지는 것에 대한 탄식이 아니라, 마치 하나님이 등을 돌리신 것 같은 영적 공허감을 고백하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숨으셨다는 감각은 영혼에 가장 치명적인 어둠이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질문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믿음을 전제하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고백입니다. 절망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여전히 어디엔가 계신다는 신뢰, 그 신뢰가 꺼지지 않았기에 이런 부르짖음이 가능한 것입니다.

 

“주의 진노가 불붙듯 하시리이까?”라는 질문은 지금의 고난이 단순한 시련이 아닌, 하나님의 진노라는 인식에서 비롯된 아픔입니다. 다윗의 왕조가 무너지고, 기름 부으신 자가 조롱당하는 현실은 하나님이 징벌하시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하나님께서 다시 긍휼을 베풀어주시기를 바라는 깊은 회개의 마음과 간구가 담겨 있습니다.

 

이 구절은 저 개인에게도 깊은 울림이 되는 말씀입니다. 목회의 여정 가운데, 하나님께서 숨으신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습니다. 기도해도 응답이 들리지 않고, 약속의 성취는커녕 오히려 더 멀어지는 듯한 시간들 속에서 “여호와여, 언제까지입니까?”라고 울부짖은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물음 속에서, 저는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은혜임을 배웠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묻고, 울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이 곧 언약 백성의 증거였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지금 고난과 혼돈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 중요한 신앙의 틀을 제시합니다. 절망의 순간, 하나님께 물을 수 있다면,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마침내 응답하실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는 묻습니다. “여호와여, 언제까지니이까?” 그리고 그 질문 속에서 다시 하나님을 기다립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숨으시는 것 같아도, 결코 멀리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 단어 연구

❖ 왕권 (מַלְכוּת / 말쿠트)

 

✦ 뜻과 의미

히브리어 “말쿠트”(מַלְכוּת)는 ‘통치, 주권, 왕국’을 의미하는 단어로, ‘왕’(מֶלֶךְ / 멜렉)이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개념입니다. 고대 근동 사회에서 왕권은 단순한 정치적 권한이 아니라, 신의 위임을 받은 통치 질서를 의미했습니다. 말쿠트는 물리적인 영역이나 국경을 넘어, 다스림의 주체와 성격을 포괄하는 개념입니다.

 

✦ 본문에서의 의미

29절 “내가 그의 후손을 영원히 있게 하며 그의 왕위를 하늘의 날과 같게 하리로다”에서 ‘왕위’는 바로 말쿠트의 구체적 표현입니다. 이는 다윗에게 주어진 단순한 정치 권력이 아닌, 하나님의 언약 속에서 보장된 영적 왕국의 약속을 나타냅니다. 본문에서는 다윗의 왕위가 일시적이 아니라, ‘하늘의 날’처럼 지속될 것이라 선언되며, 이는 곧 ‘말쿠트’의 영속성과 신적 기원을 드러냅니다.

 

✦ 신학적 의미

성경에서 말쿠트는 점차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 개념으로 확장됩니다. 다윗의 왕위는 메시아의 통치로 이어지며,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으로 성취됩니다(눅 1:32–33). 예수께서는 “회개하라 천국(말쿠트)의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고 선포하시며, 다윗의 언약이 완성되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따라서 말쿠트는 단지 다스림의 구조가 아니라, 복음과 구속의 궁극적 실현지로서 신앙 공동체의 중심이 됩니다.

 


❖ 인애 (חֶסֶד / 헤세드)

 

✦ 뜻과 의미

히브리어 “헤세드”(חֶסֶד)는 ‘사랑, 자비, 인애, 신실한 은혜’를 뜻하는 단어로, 구약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가장 풍성하게 나타내는 표현 중 하나입니다. 단순한 감정이 아닌, 언약적 관계에 기반한 지속적이고 변함없는 자비를 말합니다.

 

✦ 본문에서의 의미

33절 “그러나 내가 나의 인애를 그에게서 다 거두지는 아니하며”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과 인내를 보여줍니다. 다윗의 후손이 죄를 범할지라도, 하나님은 자신의 ‘헤세드’를 완전히 거두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이는 인간의 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 쪽에서 먼저 책임지시는 언약의 자비를 말합니다.

 

✦ 신학적 의미

신약의 ‘자비’(ἔλεος) 또는 ‘은혜’(χάρις) 개념과 연결되는 헤세드는 구속사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용서하시는 분이 아니라, 자신의 백성과 맺은 관계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언약의 사랑’으로 완전하게 드러났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끊을 수 없는 사랑(롬 8:39)으로 계시됩니다.

 


❖ 변하지 아니하리라 (לֹא אֲשַׁנֶּֽה / 로 아샤네)

 

✦ 뜻과 의미

히브리어 표현 “로 아샤네”(לֹא אֲשַׁנֶּֽה)는 ‘나는 바꾸지 않는다, 변경하지 않는다’는 단정적 선언입니다. ‘아샤네’는 동사 “샤나”(שָׁנָה, 바꾸다, 변경하다)의 1인칭 미래형이며, 여기에 부정어 “로”(לֹא)가 붙어 강한 의지를 나타냅니다.

 

✦ 본문에서의 의미

34절 “내 언약을 깨뜨리지 아니하고 내 입술에서 낸 것은 변하지 아니하리로다”에서 이 표현은 하나님의 절대적 불변성과 신실함을 나타냅니다. 이 단어는 단지 미래의 가능성을 닫아버리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신실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존재 선언과도 같습니다.

 

✦ 신학적 의미

이 표현은 하나님의 성품 중 ‘불변성’을 가장 명확히 드러냅니다. 말 3:6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신실함은 시대와 조건을 초월합니다. 신약에서는 히 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는 말씀과 맞물려, 하나님께서 자신이 하신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라는 보증이 됩니다.

 


❖ 거룩한 (קָדוֹשׁ / 카도쉬)

 

✦ 뜻과 의미

“카도쉬”(קָדוֹשׁ)는 ‘거룩한, 구별된, 순결한’이라는 뜻으로, 본질적 차이 혹은 분리를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단순한 도덕적 개념을 넘어, 하나님의 절대성과 초월성을 드러내는 대표적 용어입니다.

 

✦ 본문에서의 의미

20절 “나의 거룩한 기름을 그에게 부었도다”에서 ‘거룩한’은 기름 자체의 물리적 속성이 아닌, 그것이 하나님의 의지와 선택을 상징하는 도구임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에 ‘카도쉬’하며, 그 기름 부음 받은 다윗 역시 하나님께 구별된 자가 됩니다.

 

✦ 신학적 의미

하나님의 거룩함은 모든 언약과 심판, 구원 행위의 전제가 됩니다.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거룩한 자’(막 1:24)라고 고백하며, 성령을 통해 믿는 자들 역시 거룩하게 구별됩니다(벧전 2:9). 하나님의 백성은 단순히 윤리적으로 착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자로 ‘구별’된 존재로 살아야 합니다.

 


❖ 멸시하다 (חָרַף / 하라프)

 

✦ 뜻과 의미

히브리어 “하라프”(חָרַף)는 ‘모욕하다, 조롱하다, 경멸하다’를 뜻합니다. 이는 언어적 비하뿐만 아니라, 상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거나 가치 없이 여기는 태도를 포함합니다.

 

✦ 본문에서의 의미

38절 이하에서 “주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심히 멸시하셨나이다”라는 표현이 등장하며, 이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왕조가 대적들로부터 수치와 조롱을 받는 처지를 묘사합니다. 여기서 ‘하라프’는 다윗의 자손이 받는 조롱이 단지 인간의 수모가 아닌, 하나님의 언약 자체가 멸시당하고 있는 현실을 고발합니다.

 

✦ 신학적 의미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멸시와 조롱’(마 27:29–31)을 받으셨습니다. 이는 구약에서 기름부음 받은 자가 받는 수치의 예언적 성취이자, 언약 백성의 고난에 동참하신 메시아의 실재입니다. 그러나 이 멸시는 곧 승리의 서막이 되었고, 예수의 부활은 모든 조롱을 뒤엎는 하나님의 응답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하라프’는 인간의 거절 속에서도 끝까지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반전 역사를 드러냅니다.

 


📖 절별 주해

38절 | 언약을 거절하신 듯한 하나님

“주께서 주의 기름 부으신 자를 미워하여 버리시며 그와 세우신 언약을 물리치시고 그의 면류관을 땅에 던지셨으며”

 

이 절은 시인이 절망 가운데 토로하는 강렬한 표현으로, 다윗 왕조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이 파기된 것처럼 보이는 현실을 고백합니다. ‘기름 부으신 자’는 곧 다윗 왕가를 가리키며,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왕조가 지금은 버림받고 조롱당하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이 탄식은 언약 파기를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런 상황을 허락하셨는지 묻는 신앙의 고뇌입니다.


39절 | 하나님께서 하신 언약의 무효화처럼 보이는 현실

“주의 종의 언약을 욕되게 하시며 그의 관을 땅에 던져 욕되게 하셨나이다”

 

다윗의 언약이 “욕되게” 되었다는 표현은, 언약의 영광이 사람들 앞에서 수치로 변했다는 의미입니다. 왕의 ‘관’을 땅에 던졌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의 존귀함이 더 이상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는 역사적 절망을 반영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언약이 깨어진 듯한 현실을 직시하며, 도리어 그분께서 이를 회복하실 것을 간절히 기대합니다.

 


40절 | 성벽의 파괴와 방어선의 무너짐

“주께서 그 모든 울타를 파괴하시며 그 요새를 무너뜨리셨으므로”

 

이스라엘의 왕국이 적에게 함락되고 방비가 무너진 현실을 묘사합니다. ‘울타’(히. 미그달)와 ‘요새’는 왕권과 나라의 보호 장치였는데, 이것이 허물어졌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그 보호를 거두신 것으로 해석됩니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의 한 형태로, 백성들의 죄로 인해 그분의 은혜가 일시적으로 철수된 상황을 반영합니다.


41절 | 외부로부터의 수치와 조롱

“길을 지나가는 모든 자들에게 탈취를 당하며 그의 이웃에게 욕을 당하나이다”

 

이 절은 전쟁의 여파로 민족이 주변 국가들에게 조롱거리가 되었음을 나타냅니다. ‘탈취’는 약탈당함을, ‘욕’은 수모와 모욕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시인은 이스라엘이 외교적으로도, 군사적으로도 완전히 무너진 현실을 인정하며,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를 회복해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42절 | 원수들에게 주어진 권세

“주께서 그의 대적들의 오른손을 높이시며 그들의 모든 원수들을 기쁘게 하셨으며”

 

하나님이 다윗의 대적들에게 권세를 넘기셨다는 선언은 시인이 체감하는 영적 충격을 드러냅니다. ‘오른손을 높이셨다’는 표현은 권력과 승리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의 도구로 대적들을 사용하셨음을 시인은 믿고 있으나, 동시에 그 기쁨이 너무 오래 지속되는 듯한 현실에 탄식합니다.


43절 | 칼의 실패와 전쟁의 패배

“그의 칼날도 둔하게 하사 그와 전장에서 싸우지 못하게 하셨으며”

 

이 절은 더 이상 이스라엘 왕이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함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무기를 둔하게 하셨다는 것은 그분의 보호와 능력이 거두어졌음을 상징합니다. 시인은 이로 인해 다윗 언약이 무색하게 된 현실을 보고 있습니다.


44절 | 영광과 존귀의 상실

“그의 영광을 그치게 하시고 그의 왕위를 땅에 던지셨으며”

 

왕의 영광과 존귀가 사라졌음을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왕위를 땅에 던지셨다’는 말은 왕권의 몰락을 강하게 표현하는 구절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지속될 것을 믿고 있었던 시인은 이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기에 하나님께 묻고 있습니다.


45절 | 인생의 짧아짐과 젊음의 부끄러움

“그의 젊은 날을 단축시키시고 그를 수치로 덮으셨나이다”

 

‘젊은 날을 단축시키셨다’는 것은 다윗 왕조의 번성이나 왕의 생명이 기대보다 빨리 꺾였다는 뜻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축복이 중단된 것처럼 보이는 현실입니다. 시인은 이러한 상황이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모순된 것처럼 보인다는 점을 하나님께 토로합니다.


46절 | 하나님께 드리는 절박한 호소

“여호와여 언제까지니이까 영원히 스스로 숨기시리이까 주의 진노가 언제까지 불붙으시겠나이까”

 

시편 기자의 절박한 질문이 절정에 달합니다. ‘언제까지’라는 반복은 시편에서 자주 등장하는 탄식의 언어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얼굴을 숨기신 현실이 영원히 지속될 것인지 묻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절망이 아니라, 그분의 회복을 바라는 간절한 호소입니다.


47절 | 인생의 허무함을 통한 탄식

“나의 때가 얼마나 짧은지 기억하소서 주께서 모든 사람을 어찌 그리 허무하게 창조하셨는지요”

 

시인은 인간 존재의 덧없음을 인식하며 하나님께 간청합니다. 언약의 파괴가 인간의 유한함을 더더욱 깊이 체감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 탄식은 회복의 근거로 하나님의 긍휼을 요청하는 정서로 이어집니다.


48절 | 죽음 앞에 선 인간의 무력함

“누가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자기 영혼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지리이까”

 

시인은 인간의 힘으로는 죽음을 피할 수도, 구원을 이룰 수도 없음을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곧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신앙의 표현이며, 더 나아가 메시아의 구속을 기다리는 절절한 고대의 울림이 됩니다.

 


49절 | 이전 언약을 기억해 주소서

“주여 주의 전의 인자하심을 어디 계시니이까 주께서 다윗에게 성실하심으로 맹세하신 그것을 기억하소서”

 

드디어 시인은 하나님의 성실하심과 다윗과의 언약을 직접 상기시키며 간구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맹세가 과거에 실제로 있었음을, 그리고 그것이 지금도 유효하다는 것을 고백하며 회복을 촉구합니다.


50절 | 종이 받는 수치와 조롱

“주의 종이 나의 품은 수치를 기억하소서 많은 민족의 모든 강한 자의 조롱을 내가 내 품에 품었나이다”

 

시인은 개인적, 민족적 조롱을 ‘자신의 품에 품었다’고 표현합니다. 이는 조롱이 일시적인 외적 모욕이 아니라 내면 깊숙이 자리한 고통임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감당해야 하는 이 아픔을 하나님께 맡기고 있습니다.


51절 |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자가 받는 조롱

“여호와여 이같이 주의 원수들이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의 행동을 조롱하여 따랐나이다”

 

이 절은 그 조롱이 단순히 인간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과 그분의 기름 부으신 자에 대한 모욕임을 말합니다. 이는 언약의 회복이 단지 백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것임을 암시합니다.


52절 | 찬양으로 끝나는 신앙의 결단

“여호와를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아멘 아멘”

 

시편 89편의 마지막 절은 놀랍게도 찬양으로 끝납니다. 현실은 여전히 절망스럽지만, 시인은 하나님의 영원하심과 신실하심을 여전히 믿기에 ‘아멘’을 고백합니다. 이는 신앙의 최종적인 태도—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을 바라보는 믿음의 결단입니다.

 


📖 묵상

시편 89편 38–52절은, 전환점입니다.

19–37절까지 신실하신 언약의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분의 약속을 되새기던 시인이, 38절부터는 정반대의 현실 앞에서 탄식합니다. 언약은 여전히 살아 있는데, 현실은 언약이 깨어진 듯한 폐허만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 간극, 곧 ‘믿음으로 붙든 약속’과 ‘눈앞의 무너짐’ 사이에서 시인은 질문합니다. “여호와여, 언제까지니이까?”

 

저 역시도 그런 시기를 지나온 기억이 있습니다. 사역의 길 가운데 하나님이 분명히 허락하신 자리인데, 도무지 손에 잡히는 열매는 없고, 상황은 점점 더 위축될 뿐이었습니다. 사람들의 말과 시선, 실패한 듯한 감정,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던 시간… 그때 저의 기도도 이 시편처럼 정직한 탄식이었습니다. “주께서 주의 기름 부으신 자를 미워하여 버리시며…” (38절) 이 구절은 한때, 제 고백이었습니다.

 

하지만 시편 기자가 그 절망 속에서도 결코 놓지 않았던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기억’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하셨던 언약을 기억하고, 다윗에게 하신 맹세를 상기시키며, 그 약속을 근거로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주의 전의 인자하심을 어디 계시니이까… 그것을 기억하소서.” (49절) 

기도란, 때로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을 ‘상기시켜 드리는’ 일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통해 언약을 다시 일으키십니다. 하나님은 망각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기억 속에 새기고 붙들기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도 세상은 언약이 깨어졌다고 말합니다.

가정의 약속, 공동체의 신뢰,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확신조차도 깨어졌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현실보다 더 강한 ‘기억’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의 실패로 무너지지 않습니다. 다윗의 후손이 땅에 던져졌어도, 하나님은 그 땅 위에서 부활의 왕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언약은 쓰러지지 않았고, 결국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성취되었습니다.

 

그렇기에 마지막 52절의 “여호와를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아멘 아멘.”은, 상황과 감정에 앞서는 믿음의 선언입니다. 저는 이 믿음이 오늘 저의 하루를 붙들게 하길 기도합니다. 무너진 자리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며, 현실보다 더 깊은 약속의 세계를 살아가겠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고백하길 원합니다.

“제가 하나님의 언약을 의지하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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