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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Story】/[생명의 삶] 요한복음ㅣ2025년

[생명의 삶] 사도행전 7장 1절-16절 _ 2023. 7. 3(월)

by LogosLab Steward 2023. 7. 3.

▣ 본문

1 대제사장이 스데반에게 “사람들이 고소한 이 내용들이 사실이냐?” 하고 물었습니다.
2 이 말에 대해 스데반이 대답했습니다. “형제들이여, 그리고 어르신들, 내 말을 들어 보십시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살기 전 아직 메소포타미아에 있었을 때 영광의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
3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4 그래서 아브라함은 갈대아 땅을 떠나 하란에 가서 살았습니다. 거기서 그의 아버지가 죽은 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지금 살고 있는 이 땅으로 아브라함을 보내셨습니다.
5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기에서 손바닥만한 땅도 아브라함에게 유산으로 주시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그와 그 씨가 이후에 그 땅을 갖게 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에게는 자식도 없었는데 말입니다.
6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후손이 자기 땅이 아닌 곳에서 나그네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노예가 돼 400년 동안 혹사당할 것이다.
7 그러나 그들이 노예로 섬기게 될 그 나라에 내가 벌을 내릴 것이다. 그러고 나서야 그들이 그 땅에서 나와 이곳에서 나를 경배하게 될 것이다.’
8 그러고 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할례의 언약을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았고 태어난 지 8일 만에 아들에게 할례를 주었습니다. 나중에 이삭은 야곱을 낳았고 야곱도 우리 열두 조상을 낳았습니다.
9 그런데 우리 조상들은 요셉을 시기한 나머지 그를 이집트에 노예로 팔아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와 함께 계셔서
10 모든 어려움에서 그를 구해 주셨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지혜를 주셔서 이집트 왕 바로의 총애를 받게 하셨습니다. 왕은 요셉을 총리로 삼아 이집트와 왕궁을 다스리게 했습니다.
11 그때 이집트와 가나안 온 땅에 큰 가뭄이 들어 사람들이 심한 고통을 겪게 됐습니다. 우리 조상들도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12 야곱은 이집트에 곡식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는 우리 조상들을 처음으로 그곳에 보냈습니다.
13 그들이 이집트에 두 번째로 갔을 때 요셉은 자기 형제들에게 자기가 누구인지 밝혔으며 바로도 요셉의 가족에 대해 알게 됐습니다.
14 이 일 후에 요셉은 사람을 보내 아버지 야곱과 모든 친족까지 합해 75명을 불렀습니다.
15 그리하여 야곱은 이집트로 내려가게 됐으며 그와 우리 조상들은 그곳에서 죽었습니다.
16 그 후에 그들의 시신은 세겜으로 옮겨져 무덤에 묻혔습니다. 그 무덤은 과거에 아브라함이 세겜에서 하몰의 자손들에게 얼마의 돈을 주고 사 둔 것이었습니다. [행 7:1–16]

 

▣ 본문내용 요약

   대제사장의 심문에 스데반이 대답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하시고, 그 후손이 400년간 다른 땅에서 종이 되었다 나오리라는 언약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열두 아들 중 요셉과 함께 하셔서 그를 애굽으로 보내 통치자로 세우시고, 이스라엘을 환난에서 건져내셨습니다. 

 

▣ 본문주해

1~3절 

     스데반은 산헤드린에서 진행된 소송의 의장인 대제사장의 초대에 동료 유대인들을 향하여 예를 갖춘 설명으로 대응한다. 그는 예비 진술(preliminaries)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산헤드린 안에서는 필요 조건이 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헬라 법정들에서는 일반적이었다.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하나님이 어떻게 아브라함을 그 나라의 국부로 부르셨는지에 대한 묘사와 함께 자신의 주제로 뛰어든다.
     스데반은 하나님을 영광의 하나님(시 29:3)으로 묘사하는데, 아마도 처음부터 사람의 손으로 만든 성전 안에 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의 초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 어떻게 메소보다미아에 있던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는가를 상세하게 기술한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유대인의 땅에 제한되지 않으며, 성전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메소보다미아는 ‘강들 사이의 땅’에 적용되는 이름으로 현대의 이라크에 있는 티그리스 강과 유브라데 강 사이의 북쪽 지역이었다. 그러나 헬라적 용례에서 그 이름은 남쪽에 있던 바벨론을 포함하는 보다 큰 지역에게 적용되었다. 따라서 그 명칭은 우르(Ur)가 위치했던 영역을 가리킬 수 있었다.
     하란(Haran)은 메소보다미아의 북서쪽에 위치했으며, 팔레스타인을 향하는 ‘비옥한 초승달 지대’ 길목에 있었다. 여기에서 다시 재생된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명령은 창세기 12:1에서 왔으며, 그곳에 의하면 그 명령은 사실상 하란에서 말하여졌다. 그러나 창세기 15:7과 느헤미야 9:7로 미루어 볼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우르(Ur) 밖으로 부르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부르심이 그에게 임한 것은 그가 하란에 살기 전이었다고 합리적으로 추론될 수 있다.
     그리고 사실 이 동일한 추론이 필로에 의해서도 이루어진다. 우르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메시지의 본질은 하란에서 주어진 것과 동일한 것이라는 추정이 자연스럽다. 따라서 누가가 여기에서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말할 필요는 없다. 창세기 11:31–12:5에 있는 설명으로부터 벗어남은 매우 의도적이다.

 

4~5절

     이처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그의 고향 땅을 떠났다. 처음에 그와 그의 가족은 하란에 정착하였다. 실제로 이 지점에서 그는 아마도 결코 하란을 떠나지 않은 그의 아버지의 통제 아래 있었을 것이다. 창세기 11:26, 32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태어났을 때, 데라는 70세였고 그는 하란에서 205세의 나이에 죽었다. 창세기 12:4에서 아브라함은 하란을 떠날 때 75세였다. 이는 스데반이 주장한 아브라함이 데라가 죽은 후가 아닌, 아브라함이 145세였을 때, 곧 그가 죽기 60년 전에 하란을 떠났음을 의미한다.
     필로가 아브라함이 데라의 죽음 후에 하란을 아브라함이 떠났다는 스데반의 주장에 동의하고 창세기의 사마리아 판본이 데라가 죽었을 때 나이가 145세였다고 전하기 때문에 여기에서 스데반은 창세기 본문에 대한 다른 이독(variant) 전승을 따르고 있음이 분명하다. 누가 자신이 보통 70인역을 따르고, 우리는 이 이독을 지닌 본문을 지닌 창세기의 헬라어 판본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에서 누가가 그 연설을 자유로이 지어낸 것이 아니라 어떤 자료를 따르고 있다는 증거를 만날 수 있다.
     아브라함의 행선지는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이었다. 그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이 이제 그의 후손들이 그 약속된 땅에 살고 있다는 점에서 성취되었다는 사고가 여기에 암시되어 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 그곳은 여전히 약속된 땅이었다. 스데반은 신명기 2:5의 성경 어구를 사용하여, 아브라함 자신은 그 땅에 아무런 분깃-발 붙일 만한 땅-이 없었다고 말한다. 아브라함이 받은 약속조차도 공허한 것이었음에 틀림없는데, 그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이다(참조. 롬 4:16–22은 성취가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아브라함이 가졌던 믿음의 힘을 묘사한다).
     아브라함이 매장지를 샀던 것은 사실이나(창 23장), 스데반은 이를 올바르게 무시한다. 매장지는 살기 위한 장소도 미래의 거주를 위한 상징으로도 볼 수 없는 까닭이다. 그가 이삭 보다 앞선 그리고 이삭보다 나중에 낳은 다른 자녀들이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약속된 상속자로 간주되지 않았다. 단지 하나님의 개입만이 그 약속의 성취를 가져올 수 있다.

 

6~7절

     추가적 약속이 뒤따른다. 아브라함이 후손들을 갖게 되었을 때, 그들이 나그네가 되어 사백 년 동안 외국에서 노예로 살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 부정적 형태로 도입된다. 그 일 후에야 하나님은 그들을 다스리던 자들을 심판하시고 그들을 가나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데려오실 것이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는 스데반과 그의 동시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살고 있고, 그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는 사실에 의하여 입증된다. 동시에 하나님이 그들이 포로로 있는 동안에도 함께 하실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그 예언은 창세기 15:13f로부터 인용되었고, 그 언급은 이집트에서의 체류를 가리킨다.
     사백 년은 어림 숫자이다(출 12:40을 대조하라). 우리가 갈라디아서 3:17의 연대기적 진술을 대조할 때 문제점들이 발생한다. 그러나 스데반은 단지 창세기 15:13에서 말해진 바를 따르고 있기 때문에 이 문제점들은 갈라디아서에 대한 주석가의 관심사일 뿐이다.
     7절의 첫 번째 부분은 창세기를 인용하지만, 두 번째 부분은 출애굽기 3:12에서 온 어휘들을 포함한다. 그 구절은 백성들이 이집트를 떠날 때, 그들이 ‘이 산’ 즉 호렙(시내 산)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것이라고 모세에게 약속되었다.
     반면에 스데반은 가나안을 의미하는 이 곳을 말한다. 그리하여 스데반이 청중들에게 전하는 내용은 출애굽기 3:12에 근거한 성경적 용어를 사용하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바의 의역이다. 그는 창세기에서 명확하지 않으나 암시된 것으로 합리적으로 간주될 수 있는 요점을 나타내기 위해 실제적으로 창세기가 말하는 바를 뛰어넘는다.

 

8절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의 보증으로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할례의 언약을 주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으며, 그 언약의 유효함의 징표는 할례 행위였다(창 17:10). 그 언약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의 하나님이 되셔서 그들을 하나님의 특별한 돌보심의 대상이 되게 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이었다.
     사람들의 측면에서 할례 의식에 대한 복종이 하나님께 대한 헌신의 징표였다. 할례를 그러한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을 스데반이 반대했던 어떤 표식도 없다. 그 의식(rite)은 단지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이 교회의 구성원이 될 때만 논쟁 사안이 되었다. 레이크(Lake)와 캐드베리(Cadbury)는 그 구절의 두 번째 부분의 서두를 다음과 같이 의역한다. ‘그리하여 여전히 거룩한 장소가 없었던 반면, 이스라엘의 종교를 위한 모든 본질적 조건들은 성취되었다’(BC, IV, p. 72).
     이는 아마도 과장적 표현이나, 아브라함이 가나안에서 아무런 땅을 소유하지 못한 동안에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다는 것이 그 내러티브 안에 암시되어 있다. 그가 이삭을 낳았고 할례를 행한 것(창 21:4)과 그리하여 야곱의 열두 아들인 족장들의 출생으로 이어지는 계보가 시작된 것은 그 약속의 결과였으며, 또한 그 약속과 결부된 명령에 순종한 것이었다.

 

9~10절

     스데반은 요셉의 이야기에 다다르고 있으며, 그 이야기는 그의 연설의 두 번째 주요 부분을 형성한다(9–16절). 그 이야기는 사실에 입각하여 기록되었고 상세한 내용의 신학적 요점이 무엇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아마도 스데반은 6절의 예언이 어떻게 성취되었는가를 보여 주고 있고, 동시에 어떻게 요셉의 형제들로 대표되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임명하신 지도자들을 반대하는 과정을 시작하였고, (하지만) 하나님이 그의 택하신 지도자를 어떻게 신원하셨는가를 보여 주고 있다.
     그리하여 그 이야기는 요셉이 자신의 미래의 우월한 지위를 계시하는 꿈들을 꾸었을 때, 그의 형제들의 질투 혹은 오히려 시기로 시작하여 그들이 어떻게 그를 노예로 팔았는가를 말하는 데까지 나아간다(창 37:28; 45:4).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곤경 가운데서도 요셉과 함께 계셨고 그를 환란 가운데서 건져내셨다(창 39:2, 21).15)
     하나님은 바로의 꿈들을 해석하고 다가오고 있는 기근을 대처하기 위한 그분의 계획을 통해 그가 보여 준 지혜의 결과로 바로의 은총을 입게 하셨다(창 41:38f, 41; 시 105:16–22). 우리는 어떻게 지혜가 특별히 이집트와 결부되었는지 주목할 수 있다(7:22). 누가 자신은 지헤를 스데반과 결부시키며(6:3, 10), 또한 예수님과 결부시킨다(눅 2:40, 52).

11~13절

     이 이야기의 다음 부분은 어떻게 야곱의 가족이 애굽으로 내려갔는가를 보여 주는 데 관심이 있다. 스데반은 애굽에 임한 기근이 또한 어떻게 세계적 규모의 곤고함을 가져왔고(창 41:57), 특히 가나안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가를 말하면서(창 42:5), 의심할 바 없이 자신의 청중들에게 매우 유명한 이야기였던 것을 간결하게 진술한다. 아마도 그것은 요셉의 형제들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의 형태로 비쳐진다.
     어떤 경우든, 기근은 야곱이 애굽에 있다고 들었던 창고에 비축된 곡식을 사도록 그들을 애굽으로 내려 보내는 상황에서 효과적이다 (창 42:1–5). 형제들의 두 번째 방문에서 요셉은 그들에게 스스로를 알린다(창 45:3).16)

14~16절

     바로가 요셉의 가족을 알게 된 결과로, 그들은 애굽에 정착하도록 초청받았고, 따라서 야곱을 포함한 모든 가족이 애굽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75명이라는 숫자는 창세기 46:27과 출애굽기 1:5에 대한 70인역에 근거하며, 반면에 히브리어 성경 본문은 70명을 말한다. 보다 큰 총계는 야곱과 요셉을 제외하고 요셉의 아홉 아들 중 남은 일곱 명을 포함하면 도달할 수 있다.
     두 경우 모두에 있어서 그 숫자는 애굽으로 내려갔거나 혹은 그곳에서 태어난 야곱의 후손들의 총계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들은 모두 죽었다. 하지만, 가나안 땅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약속이 아직 성취되지 않았을지라도, 가나안 땅에 그들을 매장하는 일은 하나님이 때가 되면 그분의 약속을 성취할 것이라는 믿음의 표현으로 간주될 수 있다.
     매장 이야기와 구약성경의 전승과의 연관성은 복잡하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그들은 모두 세겜에 있는, 아브라함이 하몰의 자손에게서 구입한 무덤 안에 묻혔다.

    ① 창세기 49:29–32, 50:13에 의하면, 야곱은 아브라함이 헷 족속(the Hittite) 에브론에게 매입한 헤브론 근처 막벨라 굴에 매장되었다(창 23장).
    ② 요셉은 야곱이 하몰의 자손들에게 매입한(창 33:18–20) 세겜에 묻혔다(수 24:32).
    ③ 요세푸스는 야곱의 다른 아들들이(그리고 암시적으로 야곱 자신이) 헤브론에 묻혔다고 진술한다(Josephus, Ant. 2:119). 그리고 이 전승은 또한 희년서(Jubilees)와 열두 족장의 유언(Testaments of the Twelve Patriarchs) 안에서도 발견된다.
    ④ 야곱의 열두 아들들이 그곳에 묻혔다는 세겜 지역 자체의 전승이 있었다. 따라서 스데반이, 매장지로 헤브론이 아닌 세겜에서 아브라함이 산 무덤을 말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가 그곳에 또한 매장된 것으로 요셉의 형제들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덧붙인다는 점에서 구약성경의 기술과는 차이를 보인다.

 

     브루스(Bruce, Book, p. 149, 각주 39)는 스데반이 2절에서 우르와 하란에서의 아브라함의 두 번의 부르심을 압축하고, 7절에서 두 개의 하나님의 메시지를 압축한 것과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가나안 땅을 매입한 두 개의 기술들을 집약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스데반은 한 전승을 따르는데, 그 전승에 의하면 요셉뿐 아니라(15절 하반절의 ‘자기와…죽고’는 야곱보다는 요셉을 의도했을 것이다) 그의 형제들이 세겜에서 매장되었고, 그가 창세기 23장에 있는 이야기에 대한 암시를 포함하여 그곳 무덤의 매입을 아브라함에 귀속시켰을 개연성이 높다.
     세겜에 대한 관심과 그곳에 대한 강조는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을 향한 연설에서 현저하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그들이 질색하는 사마리아 영토 안에 요셉의 매장지가 있다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매장지로서 유대에 대한 신성불가침적 요소는 없다.
     이것을 사마리아로의 복음전파의 이야기(8:5–25)를 위하여 누가의 독자들을 위한 미묘한 준비 단계로 볼 수 있을까?

 

▣ 본문의 메시지

    7장을 흔히 '스데반의 설교'라고 부르지만, 사실 지금 스데반은 공회 앞에서 심문과 재판을 받고 있는 중이다. 자신을 고소하는 이들의 거짓 증언을 반박하고 무죄를 입증해야 한다. 스데반은 그렇게 하고 있는가? 스데반의 자기변호는 직접적 방식이 아니라 간접적이고 은근하게 이루어진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돌아봄으로써 스데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스라엘, 그리고 신앙을 이야기 속에 녹여 낸다. 

     스데반에게 조상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약속의 중심은 자손이 아니라 땅에 있었다. '이 땅'으로 오기 위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났고, 이 땅을 소유할 주체로서 자손을 약속받았다. 그 자손들은 '다른 땅'에서 나그네가 되고 종이 되겠지만 400년이 차면 그곳을 탈출해 '이곳'에서 하나님을 섬길 것이었다. 땅은 하나님을 자유롭게 섬길 공간이자, 하나님이 주신 온갖 복을 체감하며 누릴 무대이기도 했다.

     요셉 이야기에도 땅 모티프가 빠지지 않는다. 요셉이 애굽에 팔려 환난을 당하는 동안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신 데는 요셉 개인의 생존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큰 뜻이 있었다. 애굽과 가나안 온 '땅'에 흉년이 들었을 때 요셉이 애굽의 통치자로 활약해 아브라함 자손 75명의 생존을 보장한 것이다. 그런데 요셉 이야기의 결말이 애굽이 아니라 세겜이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야곱과 조상들이 모두 애굽에서 죽었지만 그들은 아브라함이 소유권을 가지고 있던 무던에 장사되었다(16절). 결국 이 땅으로 돌아온 것인데, 무엇보다 요셉을 필두로 모든 족장이 '이 땅'을 떠나 디아스포라로 애굽에 살았다는 점은 스데반과 같은 헬라파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입지를 정당화해 주는 성서적 근거이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도 하나님을 '이 땅'에서 예배하고픈 신앙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이렇게 스데반은 은근하게 자신의 신앙의 진실함을 변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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