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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Story】/[생명의 삶] 요한복음ㅣ2025년

[생명의 삶] 사도행전 7장 17절-50절 _ 2023. 7. 4(화)

by LogosLab Steward 2023. 7. 3.

▣ 본문

17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실 때가 가까워지자 이집트에 살고 있는 우리 민족의 수가 엄청나게 늘어났습니다.
18 한편 그때 요셉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다른 왕이 이집트의 통치자가 됐습니다.
19 그는 우리 민족을 속여 이용해 먹었고 우리 조상들을 괴롭히며 그들의 갓난아기들을 강제로 내다 버려 죽게 했습니다.
20 이때 모세가 태어났는데 그는 하나님 보시기에 남달리 아름다웠습니다. 모세의 부모가 석 달 동안 그를 집에 숨기면서 기르다가
21 어쩔 수 없이 밖에 버리게 됐는데 이때 바로의 딸이 그를 주워 데려다 자기 아들로 키웠습니다.
22 모세는 이집트 사람들이 가진 모든 지혜를 배웠고 그의 말과 행동에 큰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23 모세가 마흔 살이 되자 자기 동족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봐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습니다.
24 모세는 자기 백성들 가운데 한 사람이 이집트 사람에게 학대당하는 것을 보고 그 편을 들러 갔다가 그 이집트 사람을 쳐 죽이고 원수를 갚아 주었습니다.
25 모세는 자기 동족만큼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통해 그들을 구원해 내실 것을 깨닫고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실제로 그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26 그다음 날 모세는 서로 싸우고 있는 두 명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다가가 화해시킬 생각으로 말했습니다. ‘여러분, 당신들은 같은 형제들인데 어째서 다투고 있단 말입니까?’
27 그러자 싸움을 걸었던 사람이 모세를 밀치며 말했습니다. ‘누가 당신을 우리의 지도자나 재판관으로 세웠소?
28 당신이 어제 이집트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는 것이오?’
29 모세는 이 말을 듣자 미디안 땅으로 도망쳐 나왔습니다. 그는 거기서 나그네 생활을 하며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30 40년이 지난 후 한 천사가 시내 산 근처 광야에서 타오르는 가시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모세에게 나타났습니다.
31 모세는 이 광경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가 더 자세히 보려고 가까이 다가가자 주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32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다.’ 이에 모세는 두려워 떨며 감히 쳐다보지도 못했습니다.
33 그때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신을 벗어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다.
34 내가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억압당하는 것을 분명히 보았고 또 그 신음 소리를 듣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내려왔다. 자, 이제 내가 너를 이집트로 보낼 것이다.’
35 이 사람은 이스라엘 백성이 ‘누가 당신을 우리의 지도자나 재판관으로 세웠소?’라면서 거부하던 사람인데 가시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나타났던 천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직접 모세를 그들의 지도자와 구원자로 보내셨습니다.
36 모세는 백성을 이집트에서 인도해 내면서 이집트와 홍해 앞에서 그리고 40년 동안 광야에서 기적들과 표적들을 행했습니다.
37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너희 백성 가운데 나 같은 예언자를 보낼 것이다’라고 한 사람이 바로 이 모세입니다.
38 그는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함께 우리 조상들과 더불어 광야 교회에 있으면서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39 그러나 우리 조상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그를 거절하며 그 마음으로 이집트로 돌아갈 생각을 했습니다.
40 그들은 아론에게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만들어 주시오. 우리를 이집트에서 인도해 낸 모세라는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소’라고 말했습니다.
41 그리고 그들이 송아지를 본떠 우상을 만든 것이 바로 이때였습니다. 그들은 이 우상에게 제물을 바치고 자기들의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했습니다.
42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서 돌아서시고 그들이 하늘의 별들을 섬기게 내버려 두셨습니다. 이것은 예언자들의 책에 기록된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아, 너희가 40년 동안 광야에 있을 때 내게 희생과 제물을 가져온 적이 있었느냐?
43 너희는 너희가 숭배하려고 만든 몰록의 천막과 너희 신 레판의 별을 높이 들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바벨론 저편으로 옮길 것이다.’
44 우리 조상은 광야에서 증거의 장막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시하신 대로 그가 본 양식에 따라 그대로 만든 것입니다.
45 우리 조상들은 이 장막을 물려받아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들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민족들의 땅을 차지할 때도 여호수아의 인도를 따라 그 장막을 가지고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 장막은 다윗의 시대까지 그 땅에 있었습니다.
46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린 사람으로 야곱의 집안을 위해 하나님의 처소를 짓게 해 달라고 간청했으나
47 하나님을 위한 집을 지은 사람은 솔로몬이었습니다.
48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지은 집에 계시지 않습니다. 이것은 예언자가 한 말과 같습니다.
49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늘이 내 보좌이고 땅이 내 발판이다. 그런데 너희가 나를 위해 무슨 집을 짓겠느냐? 또 내가 쉴 만한 곳이 어디 있겠느냐?
50 이 모든 것을 다 내 손으로 만들지 않았느냐?’
[행 7:17–50]

 

▣ 본문주해

〈17–19〉 스데반은 이제 그의 연설의 세 번째이자 가장 긴 부분에 다다른다. 그 부분은 주로 모세와 연관이 있다. 하나님에 의해 체결된 약속의 성취 시기(7절)가 다가오고 있었고,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그 숫자가 증가되고 있었다(출 1:7).
클라이맥스는 요셉을 알지 못하는 애굽의 새로운 왕의 출현과 함께 도달하였다(출 1:8). 그 의미는 그가 요셉과 애굽을 위한 요셉의 선한 행적을 무시하였거나 혹은 (아마도 더 개연성 있지만) 그가 이스라엘 사람들의 증대되는 힘 안에서 보게 된 위협에 직면하여 요셉을 망각하길 선호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강제적으로 그리고 잔인하게 이스라엘 사람들의 어린아이들을 내버려 살지 못하게 함으로써 이스라엘 사람들을 제압하려 했다(출 1:10 f, 22).

〈20–22〉 모세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의 일생이 그의 삶을 구성한 세 번의 40년씩의 기간 각각에 상응하도록 세 부분에서 다루어진다(23절).
처음 기간은 애굽에서의 그의 어린 시절이다. 묘사가 질서정연한 세 겹의 패턴의 관점에서 주어지고, 그의 출생, 그의 유아시절, 그리고 그의 교육을 다룬다. 그가 태어났을 때, 그는 잘 생긴 아이였다(출 2:2; 히 11:23). 하나님 보시기에라는 첨언은 그가 하나님의 호의를 입었음을 의미하거나(참조. 23:1) 그 표현은 단지 그가 매우 잘 생긴 아이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히브리적 관용구를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참조. 욘 3:3). 석 달 동안 자신들의 아기를 버려야 한다는 포고령을 거부하였지만, 그의 부모들은 마침내 아이를 내다 버렸다. 하지만 그 아이는 그를 양육한 바로의 딸에 의해 발견되었다(출 2:1–10).
비록 구약성경이 그 일을 명백히 상술하지는 않을지라도, 스데반은 필로 안에서 입증된, 모세가 철저한 이집트 교육을 자연스럽게 받았다는 전승을 따른다. 그가 말과 하는 일이 다 능하였다는 진술은(참조. [예수님에 대한] 눅 24:19) 출애굽기 4:10과 상충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으나, 우리는 그가 감당하기를 원치 않았던 과업을 회피하기 위한 변명에 불과했던 모세의 자기 비하적인 표현에 너무 많은 실제적인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

〈23–25〉 모세의 일생에 있어서의 위기가 그의 나이 사십이 되었을 때 찾아왔다. (이 점에서) 모세의 나이가 구약성경에는 주어지지 않았으나, 스데반의 진술은 몇몇 유대 랍비들의 의견과 일치한다. 그 숫자는 아마도 대략의 수치를 취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사십’은 어떤 사람이 ‘장성한’ 것으로 간주되는 나이였다(출 2:11). 유사하게, 구약성경은 (모세 이야기에서 자연스럽게 추론될 수 있기는 하지만 [출 2:11]) 모세가 동족을 돌보기를 결심한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여기서의 어휘의 선택은 모세의 사고(thought)가 하나님에 의하여 그의 마음속에 심겨진 것이었으며, 그 사고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적극적 관심이었음을 암시하기 위하여 의도된 것일 수 있다. 이러한 관심은 이스라엘 사람들 중 한 사람을 압제하고 있는 어떤 애굽 사람을 공격하여 죽이는 일에서 드러났다.
구약성경 이야기에 의하면, 모세는 모래 속에 그 시체를 숨겼고, 그가 행한 바를 어느 누구도 알게 되기를 원치 않았다. 이는 그에게 적대적인 어떤 사람이 무슨 일이 발생하였가는 알고 그 사건을 당국자에게 보고하는 것을 원치 않았던 모세의 관점이 스데반에 의하여 해석된 것임에 틀림없다(출 2:14).
모세의 희망사항은 스데반에 의해 해석된 대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시고자, 곧 노예로 살아가는 불운한 처지에서 놓임 받도록 사용하시기 위해서, 영향력 있는 위치에 세워 두신 그들의 동료요 동지(모세-역주)가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었다.
누가는 의심할 바 없이 그의 그리스도인 독자들이 여기에서 (스데반의 청자들이 그 요점을 인식하든 인식하지 못하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자들인 모세와 예수님 사이의 평행을 보게 되길 기대했었을 수 있다(7:52).

〈26–29〉 즉시로 그 사건에 뒤이어 또 하나의 사건이 뒤따랐다. 이는 스데반의 해석에 의하여 확증된다. 모세가 그들(즉 이스라엘 사람들)이 서로 다투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 그는 그들에게 형제들로서 상호 대우하라고 권면하여 그들 사이를 중재하려 하였다. 여기에서 스데반은 압제당하는 사람의 편에 서서 압제하는 자를 꾸짖는 모세의 관점에서 기술된 구약성경의 진술을 일반화한다(출 2:13). 그것을 다루는 스데반의 방식은 중재자로서의 모세의 활동을 강조한다.
그러나 모세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행악자는 모세가 스스로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세우려 한다면서 그를 거세게 공격하였다(출 2:14). 이처럼 그 사람은 그(관리와 재판장)와 같이 모세를 임명한 분이 하나님이심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모세가 애굽 사람을 죽였다는 그의 적대적 시각은 모세에게는 잠재적 위협이 되었고, 그리하여 모세는 그 나라(그리고 바로의 진노[출 2:15])를 떠나 피신해야 할 상황으로 판단하였고, 도주하여 미디안 땅에 나그네가 되었다. 여기에서 그는 가족을 부양할 만큼 오랜 시간 정착하여 머물렀다(출 2:21 f; 18:3 f)

〈30–34〉 출애굽기 7:7로부터, 사십 년은 그가 애굽 사람을 죽인 후로부터 지난 시간임이 추론될 수 있다. 이제 모세는 시내 산에서 가시나무 떨기 불꽃 가운데서 한 천사를 보는 환상을 대면하였을 때, 그의 일생의 경력 중 결정적인 때를 만나게 되었다. 그 광경은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에게 충격적이었던 것은 그 가시덤불이 불꽃이 사그라짐 없이 계속적으로 불타고 있는 사실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천사의 소리는 가시나무 떨기 안에 계신 하나님의 현존을 나타내는 은유적 방식이었을 것이다(출 3:2 f). 그가 가시나무 떨기에 가까이 왔을 때, 그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스데반은 출애굽기 3:5f에 있는 진술의 순서를 바꾸어 모세에게 지금 스스로를 계시하는 분이 모세의 조상들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에 일차적 강조점이 주어지도록 한다. 그리하여 족장들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약속들이라는 사고(thought)가 이제 모세의 마음에 새겨졌다. 그 이야기는 신의 현현이라는 전형적 방식으로 계속된다. 그 이야기는 두려움과 공포라는 인간의 반응을 묘사하고 하나님의 안심시키는 말씀이 뒤따른다.
확실히 두려움이라는 요소는 전적으로 제거되지 않는데, 모세에게 그 장소를 거룩한 땅으로 간주하라는 명령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스데반의 청중들에게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유대적인 토양 안에서만 제한되는 것이 아님을 상기시키는 또 하나의 사건이 된다. 구약성경 계시의 가장 중요한 장소인 시내 산은 약속된 땅에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시의 중요 요소는 모세의 손으로 애굽에서 학대당하고 속박 가운데 있던 그분의 백성을 구원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다(출 3:7–10).

〈35–36〉 내러티브 문체가 여기에서 사라지고, 대신에 우리는 모세에 관한 일련의 진술들을 만나게 된다. 그 진술들은 헬라어 본문 안에서 다소 수사학적으로 표현된다. 각각의 진술은 네 차례에 걸쳐 사용된 지시적인 이(사람)로 시작된다. 38절 하반절과 39절은 관계 대명사들로 시작된다. 우리는 베드로가 사도행전의 초반부의 그의 연설들 안에서 ‘이 예수’에 대해 말하는 유사한 방식을 상기하게 된다(예를 들어, 2:23, 32, 36).
첫 번째 진술 안에서의 그 기교의 요점은 명백하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서 거부한 이는, 하나님이 지도자요 구원자로 임명하신 바로 이 모세였다. 다음으로 마침내 스데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복종하길 거부했던 이가 바로 이 모세였다는 사실을 다시 꺼내 들기 전에, 36, 37, 그리고 38절에서 이어지는 진술들은 추가적으로 모세가 말했고 행한 중요한 것들을 강조한다(39–41절). 그리하여 그 본문은 단지 모세에 대한 이스라엘의 거부를 제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여하신 지도자를 거부하는 방식을 지적한다.
다시 하나님이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살리신 분인, 예수께 대한 유대인들의 거부와 모형론적인 평행이 암시된다. 이는 특히 여는 진술 안에서 명백하다.
스데반이 관리와 재판장으로서의 모세를 거부한 사실을 되받아칠 때, 그는 하나님이 모세를 관리와 속량 하는 자로 보내셨다고 주장한다. 관리는 예수님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용어이고(계 1:15), 매우 유사한 용어가 5:31에서 사용되었다. 속량하는 자는 헬라어 어휘(뤼트로테스[lytrōtēs])에 대한 번역으로, 그 어휘는 ‘대속하다’(redeem)를 의미하는 동사로부터 온 것이다. 놀라운 일이겠지만, 신약성경에서 속량하는 자라는 실제적 칭호를 받은 유일한 이는 예수님이 아니라 모세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임무가 다른 곳에서는 예수님에게 부과되기 때문에(눅 2:38; 24:21; 참조. 1:68), 그리스도인 독자들은 여기에서 모형론적 암시를 감지해 낼 수 있다.
하나님의 임무였던 것(시편 19:14; 78:35)이 여기에서는 가시나무 떨기 가운데서 들려진 천사의 목소리를 통해 그분의 대리인에게 위임된다. 이처럼 하나님에 의해 행해진 기적적 징표들과 함께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 밖으로 실제적으로 인도해 낸 것은 모세였다. 그 어법은 구약성경에서 취해진 것이나, 그리스도인 독자들은 동일한 어법이 예수님의 사도들에게 사용된 것을 회상하게 될 것이다(2:22, 43; 참조. [스데반 자신에 대한] 6:8).

〈37〉 이제 모형론적인 요점이 보다 명확해진다. 스데반은 그의 청중들로 자신과 같은 한 선지자의 도래에 관한 예언에 책임이 있는 자는 바로 이 사람, 모세였음을 상기시키는데(신 18:15), 이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예수님의 오심 안에서 성취된 것으로 보기 시작한 예언이다(3:22). 이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용례는 아마도 왜 그 본문이 여기에서 인용되었는지를 설명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그 구절이 사마리아인들의 신학(Samaritan theology) 안에서 중요하고, 여기서 그 구절의 존재가 스데반에 대한 사마리아인들의 영향을 위한 점진적 주장에 무게를 실어줄 수 있음이 주지될 수 있다.

〈38〉 그러나 유대인 청중들에게는, 모세에 묘사에 있어서의 정점이 시내 산에 있던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회중에 대한 진술과 함께 다가온다. 다시 모형론(typology)이 드러난다. 회중으로 번역된 어휘는 에클레시아(ekklēsia)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어휘를 자신들의 공동체에 대한 명칭으로 취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광야 여정 동안 모세와 함께 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존재와 지상적 순례길에서 예수님과 함께 하는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들의 실존 사이에 어떤 평행 구조를 보았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스데반의 유대인 청중들을 향한 본문의 주요 메시지의 부분인 것 같지는 않다.
요점은 오히려 이 백성의 모임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인 율법을 받았다는 것이다(롬 3:2). 이는 이스라엘의 높은 특권의 표식이다. 율법의 수여는 하나님이 그들과 맺으신 언약의 표지였고, 그들이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는 것은 그 율법에 대한 순종을 통해서였다. 스데반은 암시적으로 이 믿음을 공유하였다.

〈39–40〉 그라나 전환점이 도래한다. 38절에서 시작된 헬라어 문장이 여전히 계속되는 동안, 스데반은 원래 율법을 받았던 자들이 어떻게 그 율법을 지키는데 실패하였는가를 논평한다. 그들은 율법의 수여자로서의 자격을 지닌 모세를 거부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 가운데 그들은 애굽으로 향하였다(참조. 민 14:3 f).
더욱 한심한 것은, 그들은 아론에게 그들 앞에서 인도할 신들을 만들라고 아론에게 명령했고, 하나님에게서 율법을 받기 위해 자리를 비운 모세를 경멸하였다(출 32:1). 율법이 엄중히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에 주어진 바로 그 순간부터, 그들은 율법을 주신 분을 반역했고 우상숭배로 돌아섰다. 율법과 성전에 대해 충성한다는 그들의 주장과 스데반에 대한 그들의 비난에도 불구하고(6:11, 13f), 그의 청중들은 처음부터 율법을 수여하신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예배를 거부했던 그 나라에 속하였던 것이다.

〈41–43〉 이 사고와 함께 연설은 새로이 방향을 바꾸고 50절까지 내리닫는데, 그 연설은 이스라엘 안에서의 우상숭배와 성전 예배라는 쌍둥이 주제들을 다룬다. 그 주제는 방황하던 광야 생활로부터 솔로몬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을 아우르는 간결한 역사적 고찰을 통해 전개된다.
무엇보다도 스데반은 우상숭배를 상세히 추적하는데, 그는 이미 40절에서 우상숭배에 대해 간결하게 언급하였다. 여기에서 최초로 발견된 헬라어 어휘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한 바를 경멸적으로 표현한다. 그들은 송아지를 만들었다(출 32:4). 예배 안에서 송아지 혹은 황소 이미지의 사용은, 이스라엘에게는 지속적인 유혹이었고(왕상 12:28) 그 우상숭배에 대한 스데반의 정죄는 구약성경 저자들에 의해 이미 행해진 고발과 궤를 같이 한다(왕하 10:29; 호 8:4–6). 그것은 참 하나님 대신에 우상에게 희생제사를 결부시키는 행위였고, 또한 그것은 신들이 인간의 능력으로 만들어질 수 있음을 시사하기 때문에 정죄되었다.
다시 스데반은 강력한 구약성경의 모티브를 반향하고 있다(시 115:4; 135:15; 사 44:9–20). 하나님은 인간의 자기 충족적인 그러한 행위에 대하여 이스라엘로 우상숭배의 충분한 쓰디쓴 열매를 맛보도록 하심으로 반응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서 돌이켰던 것과 마찬가지로(39절), (그들에게서) 돌이키시고, 그들을 하늘의 군대(heavenly host) 섬기는 일에 내버려 두셨다.
비록 하나님이 이교도들을 그들의 우상숭배의 결과에 대해 내버려 두셨다는 사고가 다루어질지라도, 이 진술에 대한 가장 밀접한 평행이 로마서 1:24, 26, 28에서 발견된다.
하늘의 군대(host of heaven)는 태양, 달, 별들을 가리키고(신 4:19), 그것들은 신들 혹은 영적 존재들의 거처로 간주되었다. 그러한 숭배에 대하여 그들에게 주어진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실제적으로 그러한 존재를 의지하였다(대하 33:3, 5; 렘 8:2).
스데반은 이 모든 것이 선지자의 책, 즉 소위 소선지서로 불리는 열두 권을 담고 있는 유대 두루마리에 있는 예언에 일치하여 발생하였다고 말한다. 그는 70인역에 따른 아모스서 5:25–27을 인용한다. 아모스서에서 ‘너희가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라는 질문은 부정적인 답을 예상케 하고, 아모스가 생각하기에 그 어떤 희생제사도 광야 기간 동안 드려진 일이 없었음을 시사하기 위한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이는 매우 개연성이 적으며, 아모스는 사람들이 단지 희생제사를 드리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순종을 드리지 않았음을 시사하였을 가능성이 더 높다.
반면, 스데반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여호와께 희생제사를 드리지 않았으나, 다른 신들에게는 희생제사를 드렸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그 질문은 42절 전반절보다는 41절에 대한 확증이다. 그 인용(43절)의 두 번째 부분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떻게 몰록이 예배되는 장막과 레판의 별 혹은 상징을 세우기까지 했는지를 묘사한다. 이들(신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들을 예배하기 위해 만든 형상으로 표현되었다.
몰록은 아이를 인신제사로 바칠 것을 요구하는 신이었고 레판은 새턴(Saturn, 고대 농경의 신-역주)과 연관이 있는 애굽 신의 이름으로 보인다. 70인역은 여기에서 ‘너희 왕 사쿠트(Sakkuth)와 너희의 별-신(star-god) 카이완(Kaiwan)을 들어 올림’을 가리키는 아모스의 히브리어 본문과 현저하게 다르다. 이들은 아마도 앗시리아 신들의 이름이었을 것이다. 70인역과 아모스서의 히브리어 본문 사이의 관계성이 여기에서 우리의 관심을 붙들어 둘 필요는 없다(70인역은 어려운 히브리어 본문의 의역이다).
여기에서 말해질 필요가 있는 모든 것은 그 히브리어 본문이 70인역만큼이나 스데반의 요점을 효과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스데반이 어떤 판본을 사용했을지라도, 누가는 여기에서 그의 일반적 관행을 따르며 70인역을 인용한다. 우상숭배는 거짓 신들의 땅에서 포로로 잡혀가는 응분의 대가를 받았다.

〈44–45〉 아모스서의 인용은 조만간 스데반으로 하여금 모세로부터 우상숭배에 빠진 더 후대로 내딛게 한다. 그는 이제 자신의 행보를 모세의 시대로 되돌린다. 비록 이스라엘 사람들이 몰록의 장막을 세운 것은 후대의 일이나, 그들이 광야에서 세웠던 것은 증거의 장막이었다. 그 장막은 모세에게 주어진 양식 대로 만들게 하신 것이다(출 25:40).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통과할 때, 가지고 다닌 이동식 예배 처소였다. 그 장막은 이스라엘의 다음 세대에 의하여 전수되었고, 그 조상들은 여호수아의 영도 아래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 그들은 하나님이 몰아낼 수 있도록 도와주신 이방인들에 의해 점유되었던 땅을 취한 이들이었다.

〈46〉 그 일들은 그리하여 다윗의 시대까지 계속되었다. 다윗은 그 땅의 안전한 소유를 만끽하게 된 통일된 왕국의 통치자가 되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 따라서 다윗은 야곱의 하나님(개역개정에는 ‘야곱의 집’으로 되어 있다-역주)을 위한 처소를 마련할 수 있는지를 하나님께 아뢰었다. 범상치 않은 이 표현은 시편 132:4f에 근거한다. 그곳에서 다윗은 ‘여호와의 처소 곧 야곱의 전능자의 성막을 발견하기까지’ 쉬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그 이야기의 산문체 기술은 삼하 7장을 보라).
야곱의 하나님을 위하여는 ‘야곱의 집을 위하여’ 만큼 잘 입증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본문상의 문제가 있는데, 우리는 아마도 후자의 읽기를 택해야 할 것이다. 이 경우 ‘처소’로 번역된 그 어휘는 필시 ‘예배 장소’를 의미할 것이다. 그것이 다윗이 법궤를 위하여 제공한 것과 같은 장막이든지(삼하 6:17) 혹은 보다 상설적인 건물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성전을 세우는 일에 대한 다윗의 질문에 답하여 나단은 하나님은 결코 거할 집을 요청하신 적이 없으시나, 다윗의 아들이 그분을 위한 집을 짓게 될 것을 (강하게) 확정하여 말하였다(삼하 7:5–16).

〈47–50〉 따라서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는 진술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모호함이 있다. 스데반은 다윗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고 (그가 그 일을 언급하지 않을지라도) 성전은 하나님의 승인 아래 건축되었다는 것을 안다(왕상 8장).
사실상 하나님이 승인하신 장막과 솔로몬에 의해 지워진 상설적인 집 사이에는 대조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후자는 사람이 만든 것으로 (장막에 대해서도 인정되는 바와 같이), 아마도 하나님의 계획이 아닌 인간의 디자인에 따라 지어졌으며, 초월적 하나님이 실제적으로 우상과 같이 성전이라는 울타리 안에 사셨던 것으로 생각하기 쉬웠을 것이다.
확실히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보다는 더 깊은 지식이 있었어야 하는데, 요점은 솔로몬 자신이나(왕상 8:27) 혹은 스데반이 인용한 선지자(사 66:1 f)에 의해서도 명확하게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만유의 창조자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에 제한되실 수 없다. 실제적으로는 이사야 66:2의 하반절에서 선포되는 것처럼, 이는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지어지지 않은 성전에 거하신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말하는 것인가?
하지만, 이것이 스데반의 생각일지라도, 그가 완전한 인용으로 나아가지 않은 것은 놀라운 일이다. 스데반이 기독교 교회인 ‘새 성전’을 생각하고 있었는지 여부를 확실하게 보여 주기에 우리는 (감질날 뿐) 온전한 정보는 갖고 있지 못하다. 그는 성전 예배는 하나님의 본성을 제한하는 오류를 지닌다는 부정적 요점을 의존한다.

▣ 본문의 메시지

    스데반에게 모세는 하나님이 이끄신 이스라엘 역사의 주인공이었다. 요셉처럼 모세도 외국 땅에 살면서 성공란 이스라엘의 조상이었다. 모세는 요셉과 마찬가지로 단지 애굽 시민으로 살지 않았다. 모세의 나이 40세가 되었을 때, 그는 동족을 돌볼 생각을 했고 이를 직접 행동에 옮겼다.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런 그의 마음을 잘 알지 못했다. 모세 역시 자신의 손을 통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리라는 생각까지는 못했을 것이다. 결국 또 한 번 40년이 찼을 때(80세),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셨고 모세를 통해 구원을 이루어 가셨다. 지도자이자 재판장, 해방자로서 모세는 40년간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기사와 표적'을 행했다. 이것은 하나님이 기획하신 역사의 데칼코마니이다. 오순절 성령 강림을 계기로 교회가 생겨나 성장하는 과정에 하나님이 사도들을 통해 '기사와 표적'을 행하셨기 때문이다. 

     모세의 역할은 역사적일 뿐 아니라 계시적이었다. 그는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예언했다(신 18:15). 신약 저자들은 이를 메시아 예언으로 여겼다. 또 모세는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 이스라엘에게 주었다. 스데반을 거짓 고소했던 유대인들과 달리, 스데반은 율법을 무시하거나 유효 기간이 다한 죽은 전통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담긴 권위 있는 가르침이었다. 

     스데반은 모세를 거절한 이스라엘 조상들의 죄를 지적한다. 그 죄의 본질은 금송아지 사건에 단적으로 나타난다. 그 마음이 애굽의 풍요로 향했고, '하늘의 군대'와 같은 화려한 우상에 이끌리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거기 내버려 두셨다.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조상으로부터 받은 유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 신앙에 있다는 것, 이것이 스데반의 자기변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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